실종 - 사라진 릴리를 찾아서,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4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헨리 피어스는 분자컴퓨터 전문가이자 획기적인 생명공학 프로젝트 프로테우스를 이끄는 스타트업의 리더입니다. 심각한 일 중독 때문에 연인과 헤어진 피어스는 새로 이사한 집에서 황당한 일을 겪습니다. 릴리라는 매춘부를 찾는 수십 통의 전화를 받게 된 것입니다. 성인 웹사이트에서 그녀의 프로필을 찾아낸 피어스는 자신이 부여받은 새 집의 전화번호가 그녀가 쓰던 번호와 똑같은 걸 알게 되는데, 문제는 그녀가 얼마 전부터 실종된 게 분명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때부터 피어스는 일면식도 없는 릴리를 찾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건 단순한 호기심 차원이 아니라 피어스의 어린 시절의 악몽이 사라진 릴리에게서 어른거렸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쓰던 전화번호를 부여받은 탓에 곤란함을 겪는 건 흔하진 않아도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전화번호의 전 주인이 매춘부인 탓에 느끼한 남자들의 전화를 연이어 받게 된다면 그야말로 당혹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상식대로라면 새 전화번호를 요청하는 걸로 끝날 일이지만, 피어스가 회사의 미래가 달린 투자자 미팅을 앞둔 상태에서 사라진 릴리를 찾는데 전념하기 시작한 것은 그의 누나와 관련된 참혹한 과거가 남긴 트라우마와 죄책감 때문입니다. 스스로에게 ?”라는 자문을 끊임없이 던지면서도 피어스는 사라진 릴리를 찾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말할 수 없는 중압감에 사로잡히고 만 것입니다.

 

형사와 사립탐정과 변호사가 등장하긴 하지만 실종은 아마추어 탐정 피어스의 원맨쇼나 다름없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상대는 일면식도 없는 매춘부인데다 그녀를 관리하는 업체는 위험천만한 어둠의 세력이라 주먹질 하나 제대로 못할 것 같은 피어스의 행동은 그저 무모해 보이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냥 손 떼는 게 좋을 것 같은데.”라는 조바심을 불러일으키던 그의 탐문은 의외로 생각지도 못한 단서들을 찾아내기 시작하는데, 문제는 그 덕분에 끔찍한 폭력에 휘말리는 것은 물론 오히려 릴리를 살해한 유력 용의자로 몰리게 된다는 점입니다.

 

공권력이나 사법시스템과 거리가 먼 평범한 사람이 중대 범죄를 해결하는 이야기는 자칫 현실감을 잃기 쉽지만 헨리 피어스는 조금의 위화감이나 어색함 없이 산전수전 끝에 사라진 릴리의 진실에 도달합니다. 또 주인공의 배경 정도로만 그려질 것 같았던 분자컴퓨터, 나노기술, 생명공학 프로젝트 등이 자연스럽게 사건과 연결되는 설정도 무척 매력적이었습니다. 피어스로 하여금 릴리를 찾게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인 어린 시절 누나가 얽힌 비극적인 과거사는 살짝 작위적인 느낌이 있긴 했지만 크게 거부감이 들진 않았습니다. 이처럼 실종은 서로 섞이기 힘든 다양한 설정과 코드들이 흥미롭게 조합된 이야기입니다. ‘해리 보슈 시리즈미키 할러 시리즈의 풍미가 느껴지면서도 사뭇 결이 다른 특별한 간식이라고 할까요?

 

실종은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 가운데 유일한 외톨이입니다. 마이클 코넬리의 스탠드얼론 주인공들(잭 매커보이, 테리 매케일렙, 캐시 블랙)해리 보슈 시리즈에 중요한 조연이나 카메오급으로 등장하여 이른바 범 해리 보슈 패밀리로 불릴 수 있는 반면, ‘실종의 주인공 헨리 피어스는 마이클 코넬리 작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어딘가 등장했을지도 모릅니다. ‘해리 보슈 시리즈를 꼼꼼히 읽고 크고 작은 등장인물들을 메모해놓았지만 저도 모르게 헨리 피어스라는 이름을 놓쳤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실종은 꽤 여러 곳에서 해리 보슈 시리즈와 접점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우선 피어스를 돕는 검사 출신 변호사 재니스 랭와이저는 해리 보슈 시리즈여러 편에서 보슈의 지원군 역할을 맡았던 인물입니다. 콘크리트 블론드의 끔찍한 매춘부 연쇄살인마 인형사가 피어스의 트라우마와 연결되기도 하는데, 재미있는 건 이 대목에서 재니스 랭와이저가 그놈을 쏘아죽인 형사를 나중에 알게 됐는데, 그분은 올해 은퇴했어요.”라며 해리 보슈에 대해 피어스에게 설명해주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피어스가 세상의 폭력과 혼란을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그림에 빗대어 언급하기도 합니다. (보슈의 어머니는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이름을 따서 보슈에게 히에로니머스 보슈라는 이름을 지어줬습니다.)

이렇게 많은 접점을 갖고 있으니 실종을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 가운데 유일한 외톨이로 부르는 건 적절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헨리 피어스가 해리 보슈 시리즈가운데 어느 한 편에서라도 잠깐이나마 등장했다면 그 역시 범 해리 보슈 패밀리가 됐을 텐데 말입니다.

 

실종이 미국에서 출간된 게 2002년이니 이제 와서 새삼 헨리 피어스 시리즈가 나올 일은 없겠지만 마이클 코넬리의 어느 작품에서라도 장년이 된 헨리 피어스를 잠깐이라도 볼 수 있다면 무척 반가운 일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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