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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흐르는 곳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8월
평점 :
표제작 ‘피가 흐르는 곳에’를 비롯 모두 4편의 중단편이 실린 작품집입니다. 마니아까지는 아니어도 스티븐 킹의 독특하고 오싹한 호러물을 즐겨 읽는 편인데, 특히 그의 중단편 작품집은 장편 못잖은 쫄깃쫄깃하고 알찬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더 흥미롭게 읽힌 경우가 많습니다. ‘악몽을 파는 가게’, ‘자정 4분 뒤’, ‘별도 없는 한밤에’가 대표적인데 그중에서도 ‘별도 없는 한밤에’는 스티븐 킹을 전혀 모르는 독자조차 금세 그의 호러월드에 빠져들게 만드는 만점짜리 작품집이란 생각입니다.
스티븐 킹을 읽을 때면 매번 비슷한 궁금증 - “도대체 이런 아이디어를 어떻게 떠올릴 수 있을까?” - 이 생기곤 합니다. 시신과 함께 매장된 아이폰이 몇 달이 지나도록 배터리가 닳지 않는 것은 물론 ‘소통’마저 가능하게 만든다는 설정(해리건 씨의 전화기), 60년이 넘도록 늙지도 변하지도 않은 채 인간의 고통과 절망을 파먹는 존재(피가 흐르는 곳에), 오지의 통나무집에서 소설 집필에 몰두하다가 독감과 폭풍에 휘말린 주인공이 시궁쥐와의 악마적 거래를 통해 위기를 벗어나는 이야기(쥐) 등 평범한 사람이라면 쉽게 떠올리지 못할 아이디어를 무궁무진하게 퍼올리는 스티븐 킹의 상상력은 그야말로 저절로 감탄을 자아낼 뿐입니다.
이 작품의 표제작이자 거의 절반 가까이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피가 흐르는 곳에’는 스티븐 킹의 ‘빌 호지스 3부작’과 ‘아웃사이더 1~2’를 읽은 독자에겐 또 다른 흥분을 선사하는데, 우선 주인공이 앞선 두 작품에 등장했던 홀리 기브니라는 점 때문입니다. 스티븐 킹의 첫 탐정 미스터리인 ‘빌 호지스 3부작’에서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했던 중년여성 홀리 기브니는 이후 ‘아웃사이더 1~2’를 통해 독립했다가, ‘피가 흐르는 곳에’서는 완전 1인 주인공으로 활약합니다. 개인적으론 ‘아웃사이더 1~2’를 읽지 못해서 이 작품 속의 홀리 기브니의 공포심을 100%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그녀가 맹활약했던 ‘빌 호지스 3부작’을 떠올릴 수 있어서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또 한 가지 독자를 흥분시킨 요소는 스티븐 킹만이 창조해낼 수 있는 ‘범인의 정체’입니다. ‘빌 호지스 3부작’의 마지막 편인 ‘엔드 오브 왓치’가 인간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괴물을 다뤘고, ‘아웃사이더 1~2’가 같은 시간대에 서로 다른 두 장소에서 목격된 용의자라는 독특한 설정을 앞세웠다면, ‘피가 흐르는 곳에’는 오랜 세월동안 조금도 늙지 않으며 인간의 고통과 절망을 자양분으로 삼아온 끔찍한 존재가 등장하는데, 이 세 캐릭터는 결국 같은 범주의 악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초현실적이라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설정이긴 하지만, ‘샤이닝’을 비롯하여 스티븐 킹의 호러물에 한번이라도 매료된 적이 있는 독자라면 얼마든지 흥겹게 만끽할 수 있는 설정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론 첫 수록작인 ‘해리건 씨의 전화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단막극이나 단편영화로 만든다면 그 오싹함이 훨씬 더 배가될 것 같습니다. 또, 스티븐 킹이 ‘작가의 말’을 통해 아낌없이 애정을 드러낸 주인공 홀리 기브니가 등장한 표제작 ‘피가 흐르는 곳에’도 매력적이었습니다. 머잖아 그녀를 주인공으로 삼은 후속작이 출간될 것으로 보이는데 그에 앞서 (그녀가 맹활약했던) ‘아웃사이더 1~2’를 먼저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