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살인자 쿠르트 발란데르 경감
헨닝 만켈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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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살인자’(1991)는 헨닝 망켈의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의 시작을 알린 첫 작품입니다. 이후 2009불안한 남자까지 이 시리즈는 모두 11(한국에 소개된 건 8)의 작품이 출간됐습니다. 헨닝 망켈은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집필한 콤비 작가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의 뒤를 이은 대표적인 스웨덴 작가인데 북유럽 스릴러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관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편입니다.

유일하게 읽은 작품이 시리즈 5편인 사이드트랙인데, 그 외에 그나마 최근에(2013) 출간된 작품이 하필 시리즈 마지막 편인 불안한 남자뿐이라 왠지 읽기가 꺼려졌던 게 사실입니다. (나머지 작품들은 모두 2000~2004년에 출간돼서 개정판이 나오면 읽어야지, 하며 차일피일 미뤄왔습니다.) 그러던 중 시리즈 첫 편이 출간된다는 소식이 들려 너무 반가웠는데, 앞으로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가 순서대로 한국에 소개됐으면 좋겠습니다.

 

스웨덴 남부 스코네 주의 소도시 위스타드의 형사 쿠르트 발란데르는 42살의 베테랑입니다. 뛰어난 수사력을 발휘하는 능력자지만 일반적인 스릴러 주인공들과 달리 딱 배 나온 아저씨스타일의 외모에 어딘가 살짝 허술해 보이는 인물입니다. 가정사도 만만치 않은데, 이혼을 요구하던 아내는 집을 나갔고, 19살 딸 린다 역시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연락조차 없으며, 발란데르가 경찰이 되겠다고 결심한 시절부터 평생 그를 못 마땅히 여겨온 아버지는 아흔 살을 넘겨 치매 증세를 보입니다. 그야말로 사방이 꽉 막힌 듯한 난감한 상황입니다. 그의 유일한 위안과 안식은 오페라입니다. 젊은 시절 오페라 기획자를 꿈꿨던 그는 지금도 여전히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된 오페라를 듣는 순간을 가장 행복하게 여깁니다.

 

혹독한 겨울을 앞둔 어느 날 노부부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온갖 흉기가 동원된 끔찍한 고문 흔적들은 복수 또는 돈이 범행동기임을 가리키지만, 고립된 농가에 살던 그들은 적()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평범한 노인들이었습니다. 유일한 단서는 죽어가던 부인이 남긴 외국이라는 단 한마디뿐입니다. 문제는 이 사실이 언론에 폭로되자 스웨덴 도처에 머물던 난민들을 향한 테러가 시작됐으며 끝내 살인사건까지 벌어졌다는 점입니다. 발란데르는 상부의 지시로 노부부 살인사건 대신 정치적 여파가 큰 난민 살인사건 해결에 전력을 쏟습니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동시다발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아내와 딸과 아버지 때문에 발란데르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합니다. 또 새로 부임한 매력적인 여검사 아네테 브롤린과의 미묘한 관계까지 겹쳐져 발란데르는 롤러코스터 같은 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경찰 초년병 시절 죽을 고비를 넘긴 뒤로 살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는 법이야.”라는 주문을 외워온 발란데르로서는 일과 가족 때문에 몸과 마음이 극도로 피폐해지자 지금이 과연 살 때인지 죽을 때인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그의 머릿속엔 벗어나기, 달아나기, 사라지기, 새 삶을 시작하기.”라는 욕구만 가득합니다. 대단한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아니고 위기를 헤쳐나갈 현명한 지혜가 있는 것도 아닌 발란데르가 자기 앞에 놓인 여러 개의 폭탄들 때문에 쩔쩔 매는 모습은 분명 매력적인 주인공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지만 역설적으로 오히려 그런 면 때문에 훨씬 더 인간미가 느껴진 것 역시 사실입니다.

 

몇 차례의 헛발질 때문에 수사는 장기화되고 한때 발란데르는 사건에서 손을 뗄 생각을 갖기도 하지만 결국 계시와도 같은 깨달음과 뛰어난 추리력으로 범인을 특정하고 사건을 해결합니다. 그렇지만 사건이 마무리된 뒤에도 발란데르에겐 불편하고 무거운 여운만 남을 뿐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새로운 경찰을 요구하는 시대의 변화입니다. 대도시에나 어울리는 범죄가 소도시에 만연하기 시작한데다 컴퓨터의 등장으로 수사방식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면서 발란데르는 자신이 서있을 자리에 대해 회의에 빠집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모든 살인사건의 배경에 놓인 스웨덴의 난민 문제입니다. 인종주의자는 절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난민을 받아들이는 정부 정책에 발란데르는 반감을 느낍니다. 어쩌면 자신이 어렵게 해결한 끔찍한 살인사건들의 근원은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의 산물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What went wrong with Swedish society?”, 즉 스웨덴의 다양한 사회적 문제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한다고 합니다. 유일하게 읽은 사이드트랙의 서평을 찾아보니 복지국가 스웨덴의 민낯이라든가, 까마득히 벌어진 빈부 격차, 지독한 개인주의와 이기심이 빚어낸 폭력을 묘사한다.”라고 돼있는데, 그런 면에서 이 시리즈는 사회파 미스터리로 분류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작품 외적인 얘기를 잠깐만 하자면...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는 한국에서 다소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작품을 출간한 피니스아프리카에 앞서서 2000년부터 좋은책만들기, , 웅진지식하우스 등 세 곳의 출판사가, 그것도 (시리즈 첫 편은 외면한 채) 원작 순서와 무관하게 중구난방으로 시리즈를 출간했는데, 심지어 작가의 이름마저도 헤닝 만켈, 헨닝 만켈, 헨닝 망켈 등 제각각으로 표기해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시리즈 첫 편을 출간한 피니스아프리카에서 앞으로 순서대로, 또 일관성 있게 출간해줬으면 하는 바람인데, 북유럽 스릴러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인간미 넘치는 중년형사 발란데르의 성장과 변화를 지켜보고 싶기도 하고,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기 직전의 1990년대의 아날로그 정서도 그립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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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지 못한 여자 스토리콜렉터 10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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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지 못한 여자는 독일 호프하임 경찰서 강력반의 멋진 콤비인 피아 키르히호프와 올리버 폰 보덴슈타인이 이끄는 타우누스 시리즈의 첫 편입니다. 지금까지 출간된 모든 시리즈를 읽었는데도 무슨 이유에선지 시리즈 첫 편인 이 작품만은 꽤 오랫동안 책장에서 제 선택을 외면당하고 있었습니다. 밀린 숙제를 하듯 방치했던 작품들을 하나씩 꺼내서 읽기로 한 덕분에 겨우 빛을 본 셈인데 결과적으로는 마치 두 주인공의 프리퀄을 만끽한 듯한 의외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피아와 올리버는 각각 38, 45살의 나이로 등장합니다. (최근작인 잔혹한 어머니의 날에서 피아는 곧 만 50세를 앞두고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프랑크푸르트에서 오랫동안 도시생활을 하다가 시골이라 할 수 있는 호프하임에서 반장과 신참으로 첫 만남을 갖게 됩니다. 특히 피아는 평범한 주부를 요구했던 남편 때문에 7년의 공백 끝에 복직한 상태였고, 올리버는 강력11반의 쌩쌩하고 의욕적인 반장으로 등장해서 무척 신선하게 보였습니다. 상처받고 지친 모습이었던 두 주인공의 최근작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시리즈의 첫 편을 일부러 미뤄뒀다가 프리퀄처럼 읽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두 주인공의 첫날은 분주하게 시작됩니다. 청렴결백한데다 정치적 영향력도 있는 노()검사가 자살한 채 발견돼서 충격에 빠져있는데 현장을 채 살펴보기도 전에 젊은 여성 이자벨이 추락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후 피아와 올리버는 이자벨 사건에 전념하는데, 문제는 이자벨의 주변을 조사할수록 예상치 못한 추악한 사건들이 고구마줄기처럼 계속 딸려 나온다는 점입니다. 또한 이자벨이 남편이 근무하는 말 종합병원은 물론 그녀가 몸 담았던 유명 승마클럽 등 자취를 남긴 곳마다 온갖 추문과 오점을 뿌려온 탓에 아무도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는 점도 피아와 올리버를 당황케 만듭니다.

 

시리즈 첫 작품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다른 작품들에 비해 다소 산만하고 복잡하게 보입니다. 그 누구도 용의자가 될 수 있을 만큼 이자벨 주변의 인물들의 상황을 복잡하게 꼬아놓았고, 그런 탓에 피아와 올리버의 수사는 자연히 좌충우돌 동분서주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합니다. 고구마줄기처럼 딸려 나온 사건들은 꽤 묵직하고 중요한 것들로 판명되지만 정작 이자벨 살인사건 자체와는 동떨어진 것들이라 피아와 올리버를 피곤하게만 만듭니다.

특히 시기와 질투, 탐욕과 불신으로 얽힌 이자벨 주변 인물들의 관계도가 너무 복잡해서 읽는 동안 몇 번씩이나 혼란을 겪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론 프리퀄처럼 읽는 재미에 푹 빠져서 아쉬움이 덜한 편이었지만 상대적으로 타우누스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입소문을 덜 탔던 건 이런 이유 때문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만큼 복잡한 설계도를 그려내고 한 치의 오차 없이 엔딩을 끌어낸 건 대단한 일입니다. ‘사랑받지 못한 여자라는 제목보다 모두가 죽이고 싶었던 여자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만큼 수많은 용의자가 등장하고 그에 따른 부수적 사건들이 여러 건 등장하지만 그 거미줄 같은 상황 속에서 피아와 올리버는 집요한 추리와 탐문 끝에 진실을 찾아내는데, 다 읽고 복기해보면 그 복잡한 과정의 설계와 마무리에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만한 저력이니 이후 타우누스 시리즈가 세상의 독자들과 만날 수 있었던 거겠죠.

 

혹시라도 저처럼 이 작품을 아직 안 읽은 넬레 노이하우스의 팬이라면 피아와 올리버의 첫 만남, 그리고 두 사람과 가까운 인물들(가족과 경찰 모두)의 첫 등장을 이 작품을 통해 꼭 맛보시기 바랍니다. 피아와 올리버의 역사적인(?) 첫 만남을 묘사한 문장들로 서평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실 이 문장을 읽기 전까지 전 피아가 꽤 단신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줄무늬 셔츠에 밝은 색 리넨 양복을 입고 포도밭 사이로 걸어오는 그를 보며 피아는 저런 사람과 함께 일을 하는 건 과연 어떨까 생각해봤다. (중략) 그와 얘기하려면 178센티미터인 피아도 올려다봐야 한다.”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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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전트 러너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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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의 오랜 현장 임무를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온 47살의 비밀정보국 요원 내트는 자신에게 주어질 두 개의 선택지 - 무료한 사무직이 되거나 해고 통보를 받아들이거나 를 놓고 고민에 빠집니다. 하지만 정보국은 내트에게 유명무실해진 분국 한 곳의 지휘를 제안합니다. 제안 자체가 의심스럽지만 내트는 베테랑 스파이로서의 관록을 발휘해보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악재가 터지면서 내트와 분국 요원들은 좌절하게 됩니다. 내트는 취미 이상의 애정을 쏟아온 배드민턴에 의지해 몸과 마음을 달래려 하는데 그런 그에게 20대 청년 에드가 도전장을 내밉니다. 처음엔 다혈질에 괴짜처럼 보였지만 매주 이어진 배드민턴 게임을 통해 내트는 에드에게 친밀감을 느낍니다. 그러던 중 러시아 거물급 스파이의 행적을 눈치 챈 내트는 베테랑답게 정보국 전체를 이끌며 작전 지휘를 맡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내트는 갑자기 반역자로 몰리고, 함께 작전을 펼치던 동료들로부터 심문을 받는 신세가 됩니다.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에는 내트가 반역자로 몰리게 된 이유까지 상세히 설명돼있는데, 읽다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가급적 피하시기 바랍니다.)

 

스파이 소설을 쓰는 스파이라는 별명답게 존 르 카레는 실제로 영국에서 스파이로 복무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임무에 관해서든 사생활에 관해서든 스파이의 내밀한 부분들을 무척 리얼하게 그려냈다는 생각입니다.

한국에 꽤 많은 작품이 소개됐음에도 불구하고 존 르 카레를 읽은 것은 모스트 원티드 맨이 유일합니다. 딱히 스파이물이 취향에 안 맞는 건 아닌데 5~6년 전쯤 한 작품을 중도에 포기한 뒤로 좀처럼 손이 나가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각주에 따르면 에이전트 러너는 비밀에 접근 가능한 사람들을 포섭해 관계를 유지하고 비밀 확보를 위해 지시와 지원을 하는 고급 요원을 지칭하는데, 말하자면 스파이를 발굴하고 관리하는 스파이이란 뜻입니다. 그만큼 경험도 많아야 되고 유능해야 한다는 얘긴데, 내트는 요원으로서의 능력은 물론 살짝 마초 기질도 지닌 매력적인 중년남자로 그려집니다.

 

이 작품의 중요한 배경 가운데 하나는 20166월 결정된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즉 브렉시트(Brexit)입니다. 주인공 내트는 물론 그의 배드민턴 파트너인 에드의 입을 통해 작가는 브렉시트에 대한 반감과 미국 대통령 트럼프에 대한 증오심을 숨김없이 드러냅니다. 그리고 내트를 반역자로 몰고 간 결정적인 계기 역시 브렉시트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을 읽기 전에 브렉시트가 결정된 직후 영국의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를 미리 공부한다면 훨씬 더 흥미로운 책읽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유명무실해진 비밀정보국 분국을 맡았다가 좌절하는 이야기가 전반에 펼쳐지고 이어 러시아 거물급 스파이가 일으키는 긴장감 넘치는 첩보 미션이 전개됩니다. 그러다가 주인공 내트가 반역자로 몰리면서 막판 클라이맥스로 이어지는데, 보통 이런 설정은 주인공이 오해를 풀고 악당을 제거하는 이야기가 되기 마련이지만 이 작품은 전혀 뜻밖의 결말을 향해 달려갑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조차 불분명해지는가 하면, 정의와 불의의 경계선도 모호해지면서 주인공 내트의 선택과 결정은 일반적인 스파이물에선 볼 수 없는 특별한 반전을 이끌어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브렉시트가 야기한 영국의 암울한 미래에 관한 정치적 찬반론까지 진하게 녹아든 탓에 독자는 내트의 마지막 결정에 대해 명쾌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게 됩니다. (이런 점 때문인지 뉴욕타임스는 스파이의 환멸을 담아 영국에 보내는 일격.”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스파이물의 미덕도 잘 갖췄고 영국식 유머도 간간이 맛볼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지만, 동시에 영국식 불친절함이 남긴 모호함과 아쉬움도 그만큼 많이 남았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내트의 행적 가운데 일부는 ?”라는 의문이 들었고, 반역자로 몰린 뒤 그가 내린 마지막 결정 역시 상당 부분 생략돼있어서 어떻게?”?”라는 궁금증이 전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영국 미스터리와 스릴러에서 드물지 않게 겪는 이 불친절함은 도무지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데, ‘에이전트 러너역시 비슷한 경험을 안긴 작품이었습니다.

제대로 만나보지 못한 거장이라 작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작품들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가지겠지만 매력적인 스파이 서사와 블랙유머의 미덕들이 부디 영국식 불친절함에 의해 가려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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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몸과 타인들의 파티
카먼 마리아 마차도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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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서 이 작품을 먼저 읽은 사람이 “39금 소설이라고 살짝 호들갑(?)을 떤 데다 여성의 몸과 욕망,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말해지지 않은 진실.”, “강렬한 페미니즘이 관통.”, “(금기시되었던) 레즈비언, 여성의 육체적 쾌락, 폭력, 그리고 주체성을 가진 몸에 대한 이야기.” 등 관심을 끄는 여러 매체의 호평도 있고 해서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읽은 작품입니다.

 

모두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주제들이 무겁거나 가볍게, 혹은 기괴하거나 판타지처럼 그려지고 있습니다. 수록작마다 다양한 코드들이 동원돼서 그런지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평론가들은 사이코 리얼리즘, SF, 개그, 공포, 판타지, 우화 등 온갖 장르를 들먹이며 도대체 이 작품을 어디에 밀어 넣어야 할지 갈팡질팡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론 여성과 동성애 서사를 괴담 형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이런 조합은 거의 본 적이 없어서 꽤 신선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비밀스런 녹색 리본을 평생 목에 매고 살며 성()에 관해 거침없고 주도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여자, 신체접촉으로 퍼지는 바이러스가 전 인류를 궤멸시키는 가운데 피난 중에도 남녀를 불문하고 육체관계를 갖는 여자, 갑자기 몸이 투명해지다가 결국 완전히 사라져버리지만 그렇다고 죽었다고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여자들, 그리고 동성 파트너 사이에 벌어지는 학대와 폭력 등 기담 혹은 괴담의 형식에 담긴 다양한 여성-동성애 주제를 만날 수 있습니다.

 

()에 관해 자기주도적이고 욕망을 숨기지 않는 여성도 등장하지만, 반대로 억압받거나 무기력한 여성도 등장합니다. 동성애 코드 역시 당당하고 유쾌하게 묘사된 작품도 있고 여전히 핍박받는 소수의 비극으로 그려진 작품도 있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않고 뭔가를 강요하듯 주장하지도 않는 다양한 시선들은 기담 혹은 괴담이란 형식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현실감을 고조시키고 공감의 폭을 넓게 해줍니다.

 

다만, 장르물을 주로 읽는 저 같은 독자에겐 좀 어렵고 난해한 대목들이 많아서 수록작 가운데 절반쯤은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던 게 사실입니다. 간혹 매력적인 비유나 신선한 문장들도 눈에 띄었지만, 반대로 몇 번을 되읽어도 무슨 상황인지, 무엇에 대한 묘사인지, 작가의 의도가 뭔지 헤아릴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번역가가 산문이라기보다 시에 가깝고, 좀 과장하면 문장을 이용한 미술 또는 회화 작품에 가깝다.”고 설명한 걸 보면 원작 자체가 그런 특징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선지 각각의 수록작에 대한 해설이 꼭 첨부됐어야 할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저 같은 독자라면 해설을 꼼꼼히 읽은 뒤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가 정독을 해야 이 작품의 진가를 조금이나마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몸과 타인들의 파티‘39금 소설도 아니고 흥미 위주로 읽을 작품도 절대 아닙니다. 지금까지 읽은 여성과 동성애를 주제로 삼은 그 어느 작품들보다 더 깊은 인상과 여운을 느낀 건 분명하지만, 스토리에만 집중하며 빠르게 페이지를 넘긴 탓에 난해함과 아쉬움이 더 많이 남기도 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른 독자들의 서평이나 이른바 전문가들의 해설을 좀더 접한 뒤에 꼭 한 번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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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몰자의 날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6 미치 랩 시리즈 5
빈스 플린 지음, 이영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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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테러 부문 수석보좌관 미치 랩과 CIA국장 아이린 케네디는 각각 미국에 대한 심상치 않은 테러 조짐을 감지합니다. 비밀리에 특수부대와 함께 파키스탄 국경지대로 날아간 랩은 알카에다 핵심들의 회의 장소에서 워싱턴을 통째로 날려 보낼 끔찍한 핵폭탄 공격 계획을 발견합니다. 랩의 정보는 워싱턴을 발칵 뒤집어놓지만 문제는 대통령을 비롯한 관료들이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만 해석하며 랩의 발목을 잡는다는 점입니다. 재선을 앞두고 9.11 이후 제정됐던 강력한 테러대책법을 완화하려는 대통령, 혼란을 야기할 안이한 대책만 내놓는 장관들, 백악관의 정치적 타격만 걱정하는 수석보좌관 등을 지켜보며 랩의 분노는 극에 달합니다.

 

존재 자체가 비밀이었던 CIA 특수부대 암살자 미치 랩은 야비한 정치꾼들로 인해 그 신분이 노출된 이후 이른바 대테러 부문 수석보좌관이라는 사무직을 맡게 됐지만 사건이 터질 때마다 현장으로 달려가 직접 일을 해치우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번 작품에선 현장요원이나 다름없는 맹활약을 펼치며 미국에 대한 핵폭탄 테러를 저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앞선 작품들에서 매번 그랬듯이 이번에도 랩은 잔혹한 현실에 대해 1도 모르면서 그저 이해타산적인 정치술수와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는 워싱턴 관료들의 작태에 격분합니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 그는 예전과는 급이 다른 분노를 폭발시킵니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기만 하는 장관이나 보좌관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물론 언제나 끝까지 자신을 믿어줬던 대통령마저 재선에 눈이 멀어 제대로 된 판단을 못 내리자 랩은 넘어선 안 될 선마저 넘어서며 거친 공격을 퍼붓습니다. 핵폭탄이라는 미증유의 테러가 코앞에 닥친 상태에서 결국 랩은 모든 절차와 규약을 무시한 채 고문과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도 마다하지 않기로 작심합니다.

 

나쁜 이슬람을 응징하는 미국식 영웅 만들기라는 프레임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대통령을 비롯한 관료들의 안이한 행태를 지켜보고 있으면 랩의 참을 수 없는 격분과 극단적인 행태에 100% 공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현장요원들이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동안 백악관은 재선 전략에만 몰두하거나 외국정상들까지 참석한 화려한 연회를 즐깁니다. 분초를 다투는 싸움을 두고 절차와 허가를 운운하며 권위만 앞세우거나 오히려 독이 되는 무모한 대안만 강요합니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증오심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랩은 기어이 폭발하고 맙니다. 덕분에 그 어느 작품에서보다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암살자로서의 랩의 매력이 유감없이 발산되는데, 그 매력은 핵폭탄 테러라는 엄청난 사태와의 시너지 효과로 인해 그야말로 절정에 이릅니다.

 

정치색이라곤 조금도 없는 랩이지만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고문과 살인을 자행하는 모습에선 다소 극단적인 신념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핵폭탄을 터뜨리기 위해 미국에 잠입한 테러리스트를 두 번째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신념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전달하려 애쓰며 나름의 균형 잡힌 서사를 전개시킵니다. 물론 다소 맹목적이고 과격하며 적개심으로 가득 찬 위험천만한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더 많긴 하지만 말입니다.

 

이번 작품에서 랩은 단독 주인공으로서의 비중이 좀 부족한 편입니다. 초중반까지는 파키스탄 국경지대에서 작전을 펼치느라 정작 워싱턴의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에는 끼어들지 못합니다. 또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FBI 특수수사관 스킵 맥마흔, 에너지국 핵 비상지원팀의 폴 라이머, CIA 최고의 심문관 바비 아크람 등 카리스마 넘치는 조연들의 도움을 많이 받기 때문에 원톱으로서의 매력은 상대적으로 덜한 편입니다. 하지만 이들과의 협업을 이끌어가는 랩을 지켜보는 일 역시 색다른 흥미를 전해줍니다.

다음 작품에도 등장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야심찬 30대 법무부 부차관보 페기 스텔리가 눈길을 끌었는데, 핵폭탄 문제를 놓고 랩과 크게 충돌하면서도 그에게 치명적인 매력을 느끼는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랩이 유부남인 것 따윈 상관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여서 다음 작품에서 어떤 사고를 칠지 기대감이 만발하는 캐릭터입니다. (상대적으로 랩의 발목만 잡던 아내 애너가 거의 등장하지 않은 점은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전몰자의 날미치 랩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한국에는 모두 일곱 편이 출간됐으니 이제 읽을 작품이 두 편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작품들이 출간되지 않은 게 그저 아쉬울 수밖에 없는데 언제라도 좋으니 반가운 소식이 들려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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