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전트 러너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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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의 오랜 현장 임무를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온 47살의 비밀정보국 요원 내트는 자신에게 주어질 두 개의 선택지 - 무료한 사무직이 되거나 해고 통보를 받아들이거나 를 놓고 고민에 빠집니다. 하지만 정보국은 내트에게 유명무실해진 분국 한 곳의 지휘를 제안합니다. 제안 자체가 의심스럽지만 내트는 베테랑 스파이로서의 관록을 발휘해보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악재가 터지면서 내트와 분국 요원들은 좌절하게 됩니다. 내트는 취미 이상의 애정을 쏟아온 배드민턴에 의지해 몸과 마음을 달래려 하는데 그런 그에게 20대 청년 에드가 도전장을 내밉니다. 처음엔 다혈질에 괴짜처럼 보였지만 매주 이어진 배드민턴 게임을 통해 내트는 에드에게 친밀감을 느낍니다. 그러던 중 러시아 거물급 스파이의 행적을 눈치 챈 내트는 베테랑답게 정보국 전체를 이끌며 작전 지휘를 맡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내트는 갑자기 반역자로 몰리고, 함께 작전을 펼치던 동료들로부터 심문을 받는 신세가 됩니다.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에는 내트가 반역자로 몰리게 된 이유까지 상세히 설명돼있는데, 읽다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가급적 피하시기 바랍니다.)

 

스파이 소설을 쓰는 스파이라는 별명답게 존 르 카레는 실제로 영국에서 스파이로 복무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임무에 관해서든 사생활에 관해서든 스파이의 내밀한 부분들을 무척 리얼하게 그려냈다는 생각입니다.

한국에 꽤 많은 작품이 소개됐음에도 불구하고 존 르 카레를 읽은 것은 모스트 원티드 맨이 유일합니다. 딱히 스파이물이 취향에 안 맞는 건 아닌데 5~6년 전쯤 한 작품을 중도에 포기한 뒤로 좀처럼 손이 나가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각주에 따르면 에이전트 러너는 비밀에 접근 가능한 사람들을 포섭해 관계를 유지하고 비밀 확보를 위해 지시와 지원을 하는 고급 요원을 지칭하는데, 말하자면 스파이를 발굴하고 관리하는 스파이이란 뜻입니다. 그만큼 경험도 많아야 되고 유능해야 한다는 얘긴데, 내트는 요원으로서의 능력은 물론 살짝 마초 기질도 지닌 매력적인 중년남자로 그려집니다.

 

이 작품의 중요한 배경 가운데 하나는 20166월 결정된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즉 브렉시트(Brexit)입니다. 주인공 내트는 물론 그의 배드민턴 파트너인 에드의 입을 통해 작가는 브렉시트에 대한 반감과 미국 대통령 트럼프에 대한 증오심을 숨김없이 드러냅니다. 그리고 내트를 반역자로 몰고 간 결정적인 계기 역시 브렉시트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을 읽기 전에 브렉시트가 결정된 직후 영국의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를 미리 공부한다면 훨씬 더 흥미로운 책읽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유명무실해진 비밀정보국 분국을 맡았다가 좌절하는 이야기가 전반에 펼쳐지고 이어 러시아 거물급 스파이가 일으키는 긴장감 넘치는 첩보 미션이 전개됩니다. 그러다가 주인공 내트가 반역자로 몰리면서 막판 클라이맥스로 이어지는데, 보통 이런 설정은 주인공이 오해를 풀고 악당을 제거하는 이야기가 되기 마련이지만 이 작품은 전혀 뜻밖의 결말을 향해 달려갑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조차 불분명해지는가 하면, 정의와 불의의 경계선도 모호해지면서 주인공 내트의 선택과 결정은 일반적인 스파이물에선 볼 수 없는 특별한 반전을 이끌어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브렉시트가 야기한 영국의 암울한 미래에 관한 정치적 찬반론까지 진하게 녹아든 탓에 독자는 내트의 마지막 결정에 대해 명쾌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게 됩니다. (이런 점 때문인지 뉴욕타임스는 스파이의 환멸을 담아 영국에 보내는 일격.”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스파이물의 미덕도 잘 갖췄고 영국식 유머도 간간이 맛볼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지만, 동시에 영국식 불친절함이 남긴 모호함과 아쉬움도 그만큼 많이 남았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내트의 행적 가운데 일부는 ?”라는 의문이 들었고, 반역자로 몰린 뒤 그가 내린 마지막 결정 역시 상당 부분 생략돼있어서 어떻게?”?”라는 궁금증이 전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영국 미스터리와 스릴러에서 드물지 않게 겪는 이 불친절함은 도무지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데, ‘에이전트 러너역시 비슷한 경험을 안긴 작품이었습니다.

제대로 만나보지 못한 거장이라 작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작품들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가지겠지만 매력적인 스파이 서사와 블랙유머의 미덕들이 부디 영국식 불친절함에 의해 가려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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