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 스티븐 킹 걸작선 1
스티븐 킹 지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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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살 캐리 화이트는 학교 샤워실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뒤늦은 초경을 겪습니다. 벌거벗은 채 자신의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의 의미조차 알 수 없어 충격에 빠진 캐리를 향해 친구들은 생리대와 탐폰을 던지며 야비하고 잔인한 공격을 퍼붓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3살 이후 잠복해있던 캐리의 염력이 발현됩니다. 광기에 가까운 기독교 원리주의자로서 딸의 모든 것을 통제해온 어머니 마거릿은 여자가 된 캐리가 육체에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더욱 거세게 몰아붙이고 이 역시 캐리의 가공할 염력을 일깨우는 촉매제가 됩니다. 그리고 그 염력은 졸업예정자들의 꿈의 무대인 무도회에서 피비린내 진동하는 대참극을 일으킵니다.

 

이 작품 전까지 읽은 스티븐 킹의 작품은 모두 14편입니다. 그가 발표한 소설과 중단편집이 모두 74편이니 겨우 1/5 정도 읽은 셈이지만, 어쨌든 나름 스티븐 킹을 꽤 좋아한다고 자부할 정도는 되는 실적입니다. 하지만 그의 공식적인 첫 작품 캐리를 읽지 못한 탓에 늘 숙제 하나를 빼먹은 듯한 아쉬움을 느껴왔는데, 드디어 그 숙제를 마무리하게 됐습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캐리는 스티븐 킹의 첫 공식작품인데도 불구하고 호러 킹으로서의 그의 매력과 미덕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문제작입니다. 호러 코드는 염력’, 즉 정신력으로 물체를 이동하거나 물체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능력인데, 유전되긴 했어도 잠재적 능력에 불과했던 캐리의 염력을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것은 극도의 스트레스와 분노입니다. 염력 유전자는 캐리의 인생에서 모두 세 번에 걸쳐 폭발합니다. 이웃집과의 갈등이 극단에 이르렀던 3살 때 우박과 돌덩이를 불러들였고, 16살에 겪은 끔찍한 초경과 그것이 초래한 주위의 잔인한 공격은 잠복해있던 염력을 부활시켰으며, 잠시나마 세상과 화해하려던 순간 마지막 폭발을 일으킵니다.

 

이야기는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500명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한 19795월을 전후로 한 이야기가 메인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사건 발생 1~2년 후 캐리의 염력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과 대참사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인터뷰 등 참고자료들이 간간이 끼어드는 형식입니다.

재미있는 건 극과 극을 달리는 학자들의 논쟁입니다. 누군가는 학문적 관점에서 염력의 유전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누군가는 2의 캐리는 시간문제라며 조기 유전자 검사를 통해 위험한 아이들을 완전히 격리시켜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두 주장 모두 염력이란 실제 존재하는 힘이며 특히 유전되는 현상임을 전제로 깔고 있습니다. 이런 설정은 캐리의 염력과 그것이 일으킨 대참사를 명백한 현실의 사건으로 포장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픽션이란 점을 잊게 만듭니다. 더불어, ‘또 한 명의 캐리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에필로그는 책을 덮는 순간까지 서늘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게 만듭니다.

 

읽는 내내 마치 직접 눈으로 보듯 사방에 난무하는 피의 향연을 느낄 수 있는데, 캐리의 염력의 부활을 알린 생리혈, 온갖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 대참사의 도화선이 된 엄청난 양의 돼지피 등 시각적인 공포를 고조시키는 온갖 종류의 피가 수시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를 보고 싶어진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이 피의 향연이 책 이상의 공포심을 자극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1979년으로 설정된 점도 흥미로웠는데, 출간 시점인 1974년을 기준으로 보면 일종의 미래 소설인 셈이기 때문입니다. 첫 출간작을 내놓게 된 스티븐 킹에게 유전되는 염력이란 설정은 현재 시점을 배경으로 삼기엔 다소 부담스러웠기 때문일까요?

 

스티븐 킹에게 홀딱 빠져들 정도의 광팬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이 별난 간식처럼 구미를 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다는 건 확실히 인정합니다. ‘캐리는 그의 공식 첫 작품이란 점 때문에 더욱 더 별난 간식처럼 느껴졌는데, 막판의 불가지론같은 일부 대목만 제외한다면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팽팽한 긴장감과 호러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캐리의 염력 자체도 흥미롭지만 자신의 삶을 파탄에 이르게 만든 어머니와 친구들과 마을을 통렬하게 날려버리는 복수 코드는 호러와는 별개의 쾌감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스티븐 킹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난감한 독자라면 중단편집인 별도 없는 한밤에를 강력히 추천합니다. 다분히 개인적인 취향에 의한 추천이지만 재미와 호러를 겸비한 최고의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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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미니 - 전면개정판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
M. J. 알리지 지음, 전행선 옮김 / 북플라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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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햄프셔 주의 남부에 위치한 사우샘프턴 중앙경찰서 강력범죄수사팀 수사반장 헬렌 그레이스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살인사건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범인은 연인 혹은 직장동료 등 두 사람을 납치하여 인적 없는 곳에 감금한 뒤 총알 한 개가 든 총과 함께 한 사람을 죽여야 나머지 한 사람이 살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남깁니다. 자신들의 배설물과 분비물에 포위당한 채 공포와 배고픔에 시달리던 그들은 결국 살인이 벌어진 뒤에야 범인의 끔찍한 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죽은 자의 억울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살아남은 자 역시 죄책감과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삶 자체가 완전히 망가지고 맙니다. 납치범의 범행 동기는 물론 어떤 식으로 희생자를 선택했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는 헬렌과 수사팀은 큰 혼란에 빠집니다.

 

영국에서 2014년에 발표된 이니 미니는 한국에 2015년에 출간됐다가 2021년에 개정판으로 다시 나온 작품입니다.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의 첫 편인데, 실은 작가인 M. J. 알리지의 이름은 물론 시리즈 이름조차 생소해서 읽을까 말까 꽤 주저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이렇게 흥미진진한 작품이 왜 스릴러 독자들의 입소문을 타지 못했는지(제가 그 소문을 못 들었을 수도 있지만) 궁금해진 게 사실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 이니 미니는 미국의 동요 “eeny, meeny, miny, moe!”에서 따온 것인데 우리 식으로 번역하면 어느 것을 고를까요? 알아맞혀 보세요!” 정도입니다. 두 사람을 납치한 뒤 선택을 강요하는 범인의 기괴한 행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제목인데, 납치된 사람들은 연인, 직장동료, 가족들이라 자신이 살기 위해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상황을 절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지만 길게는 2주일 넘게 공포와 배고픔에 사로잡히면서 그들은 결국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막다른 벽에 몰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발견되면서 헬렌 그레이스와 그녀의 동료들이 수사에 나서게 됩니다.

납치, 감금, 살인 강요로 이어지는 범죄 패턴은 동일하지만 피해자들의 마지막 선택(정말 상대를 죽일까? 누가 누구를 죽일까? 어떻게 죽일까?)은 모두 제각각이라 연이어 비슷한 사건들이 벌어져도 그들의 최후가 어떻게 그려질지 쉽게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또 경찰 역시 아무런 단서도 없는 가운데 다만 피해자들이 결코 무작위로 선택된 게 아니라고 여기는 헬렌의 추측 외에는 딱히 정해진 수사방향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어서 독자로선 초반 내내 헬렌과 수사팀이 느끼는 혼란과 무기력함에 고스란히 이입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사건 못잖게 눈길을 끄는 건 주인공 헬렌 그레이스의 캐릭터입니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으며 일 중독자에 아이 갖는 일에는 관심조차도 없었다. 발전기처럼 일했고, 거의 혼자서 부서 내의 사건 해결률을 높여놓았다.”는 표현대로 헬렌은 최연소 여성 수사반장이란 타이틀에 어울리는 최고의 형사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겐 누구에게도 내보인 적 없는 내밀한 비밀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악몽과 비극으로 인해 진짜 자기 모습을 꽁꽁 감춘 채 완벽한 형사라는 갑옷으로 중무장한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건 오직 한 순간, SM클럽에서 채찍에 몸을 내맡긴 채 무자비한 상처를 낼 때뿐입니다. 변태적 성욕을 채우려는 다른 손님들과 달리 헬렌은 오직 자신을 자책하고 죄책감을 잊지 않기 위해, 또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더욱 거센 채찍질을 요구합니다. 그저 궁금할 뿐이던 그녀의 오랜 악몽과 비극은 막판에야 비로소 독자들에게 소개됩니다.

 

조연들 역시 특별한 사연들을 갖고 있어서 적잖은 분량이 그들의 심리를 묘사하는데 할애됩니다. 유능한 형사지만 이혼 후 알코올 중독에 빠진 마크, 헬렌을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아 맹렬히 노력하면서도 임신을 갈망하는 찰리, 어릴 적 황산테러로 얼굴 반쪽이 망가진 타블로이드 기자 에밀리아 등이 그들입니다.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는 가운데 난해한 표현 대신 쉽지만 절절한 문장들로 그려진 등장인물들의 심리는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입니다. 클라이맥스로 치달을수록 적잖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거나 큰 마음의 상처를 입는 비극적인 상황들이 더욱 강렬하게 읽히는 건 이런 디테일한 심리 묘사 덕분입니다.

 

한국에는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가 단 세 편만 소개됐지만(‘죽음을 보는 재능은 스탠드얼론입니다.), 영국에선 모두 10편의 장편과 2편의 단편이 출간됐습니다. 올해 북플라자에서 이니 미니의 개정판을 낸 걸 보면 나머지 작품들의 출간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매력 넘치는 시리즈가 빠짐없이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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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체스트넛맨
쇠렌 스바이스트루프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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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봉으로 잔혹하게 폭행당한 뒤 신체 일부가 절단된 채 살해된 여성들의 시신이 잇달아 발견됩니다. 코펜하겐 경찰 살인수사과의 나이아 툴린은 유로폴에서 징계를 받고 한시적으로 살인수사과에 복귀한 마르크 헤스와 파트너가 되어 수사에 참여합니다. 피해자들의 곁에 놓여있던 밤 인형(chestnut man)에서 1년 전 실종된 소녀 크리스티네의 지문이 발견되자 수사는 혼란에 빠집니다. 사회부 장관 로사 하르퉁의 딸인 크리스티네를 납치한 범인이 이미 1년 전 체포됐고, 그는 시신을 토막 낸 뒤 숲에 유기했다고 진술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굴러온 돌헤스는 연쇄살인과 크리스티네 실종이 연관된 사건이라고 확신하지만, ‘박힌 돌툴린과 1년 전 범인 체포로 큰 공을 세웠던 살인수사과 반장은 헤스의 추측을 무시합니다. 가까스로 피해자들의 공통점이 밝혀진 가운데 추가범행까지 벌어지자 수사관계자들은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동안 북유럽 스릴러의 대세는 각각 스티그 라르손과 요 네스뵈로 대표되는 스웨덴과 노르웨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상대적으로 약세였던 덴마크스릴러의 출간 소식은 무척 반가웠습니다. 더구나 어느 정도는 재미의 보증수표라고 할 수 있는 넷플릭스 오리지널이란 타이틀까지 갖춘 덕분에 읽기 전부터 두툼한 분량에 대한 기대감이 남달랐습니다. 끔찍한 폭행 이후 산 채로 신체를 절단하고 시신 옆에 밤 인형을 남겨놓는 연쇄살인마의 행각은 북유럽 스릴러 특유의 잔혹함을 여지없이 드러냈고, 범인을 쫓는 두 주인공 나이아 툴린과 마르크 헤스의 캐릭터 역시 여러 북유럽 스릴러 주인공들을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툴린과 헤스가 사건에 임하는 태도와 처지는 일반적인 주인공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살인수사과의 최연소 여성 팀장 후보지만 정작 살인사건에선 별 흥미를 못 느낀 채 컴퓨터 재능을 살릴 수 있는 사이버범죄센터로의 이적을 꿈꾸는 툴린은 부디 이 사건이 복잡하지 않기만을 바라는 귀차니즘을 애써 감추지 않습니다. 또 유로폴에서 징계를 받고 한시적으로 살인수사과에 좌천성 복귀를 지시받은 헤스는 오로지 유로폴로의 복귀만 생각하며 빈민가에 위치한 아파트를 팔아넘기는 일에 더 몰두합니다. 말도 없고 사건에는 관심도 없고 행색마저 추레한 헤스가 못마땅한 툴린은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지만, 헤스는 그런 적대감따윈 달관한 듯 초연한 태도만 보입니다.

이렇듯 물과 기름 같던 두 주인공은 동일범의 살인이 연이어 벌어지고 생각지도 못한 단서 1년 전 실종된 크리스티네의 지문이 묻은 밤 인형 가 나타나면서 조금씩 협력 관계를 구축해나갑니다. 두 사람의 케미는 사건 못잖게 흥미진진하게 눈길을 끄는데 만약 시리즈로 확대된다면 그 어느 콤비보다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연쇄살인과 1년 전 장관의 딸 크리스티네의 실종사건이 엇비슷한 비중으로 전개되면서 독자는 두 사건의 접점이 과연 언제, 어디에서 드러날까 촉각을 곤두세우게 됩니다. 두 사건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헤스와 자신의 공적이 날아갈까 봐 실종사건 재수사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수뇌부가 치열하게 갈등하는 가운데, 툴린은 점점 헤스의 주장에서 설득력을 발견하고 그가 과거 살인수사과의 최고 능력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릅니다.

연쇄살인사건과 나란히 병행되는 또 하나의 시퀀스는 딸 크리스티네를 잃고 휴직했던 장관 로사가 1년 만에 복직하자마자 벌어지는 협박사건입니다. 누군가 로사를 살인범이라 지칭하며 노골적인 협박을 가해오는데 이로 인해 툴린과 헤스의 수사는 더욱 큰 혼선을 빚게 됩니다.

 

꽤 오래 전 기사지만 북유럽 스릴러 소설 왜 국내에선 안 뜰까?”(201234, 경향신문)에서는 어두운 분위기과 복잡한 플롯, 그리고 사건은 흉악한데다 등장인물의 과거 상처나 기억이 얽혀드는 탓에 북유럽 스릴러가 한국 독자들에게 안 먹힌다고 분석한 적 있습니다. 분명 그런 경향이 있긴 하지만 더 체스트넛 맨은 비교적 쉽고 명쾌하게 읽히는 작품입니다. 물론 어둡기만 한 헤스의 캐릭터와 과거사라든가 끔찍한 범행수법, 또 배경이 10월임에도 작품 내내 장마처럼 내리는 비와 우중충한 풍경 묘사 등 기사 내용과 엇비슷한 부분도 있는 게 사실인데, 그래도 다른 작품들에 비해선 영미권 스릴러처럼 친숙하게 읽히는 편입니다.

다만, 딱 한 가지 아쉬움을 꼽는다면 사건에 비해 과도한 분량입니다. 이 역시 북유럽 스릴러의 특징 중 하나인데, ‘더 체스트넛 맨의 경우 부차적인 시퀀스나 장면들이 분량을 꽤 많이 잡아먹었고, 막판에 밝혀진 진실은 앞서 읽은 분량들을 조금은 허망하게 만들 정도로 단순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분량이 400페이지 안팎인데, ‘더 체스트넛 맨을 읽다가 조금 지루하다 싶어서 페이지를 확인해보니 딱 그 지점을 지나는 중이었습니다. 조금만 슬림했더라면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을 거란 아쉬움은 책을 덮을 때까지 계속 됐습니다.

 

마지막 챕터를 보면 툴린과 헤스가 시리즈 주인공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애매한 상황인데, 개인적으론 어떻게든 두 사람이 또 한 번 호흡을 맞출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북유럽 혹은 독일 스릴러에 못잖은 덴마크콤비 시리즈의 활약이 더없이 기다려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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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행위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8 미치 랩 시리즈 7
빈스 플린 지음, 이훈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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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선을 코앞에 두고 끔직한 폭탄테러 사건이 벌어져 민주당 후보인 조시 알렉산더의 아내와 경호원 등 다수가 사망합니다. 3개월 후, FBI 국장 아이린 케네디의 밀명을 받고 테러범을 잡기 위해 지중해의 키프로스에 머물던 미치 랩은 새 대통령의 취임식 1주일 전 보스니아 출신 암살자를 체포합니다. 하지만 랩이 확실한 증거를 포착하기도 전에 체포 사실이 세상에 공개됐고 FBI와 법무부가 사건을 채가려 하자 랩은 테러범만 넘긴 채 종적을 감춥니다. 그리고 합법적인 수사로는 알아낼 수 없는 사건의 진상을 캐기 위해 위험천만한 행보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명확한 증거도 없는데다 랩이 용의자를 고문했다는 의심까지 제기되자 CIA와 케네디 국장은 위기에 몰립니다. 케네디와 랩을 눈엣가시로 여겨온 부통령 당선자 마크 로스는 그들을 일거에 제거할 호기로 여기고 야비한 공격을 감행합니다.

 

미치 랩 시리즈일곱 번째 작품인 반역행위는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출간된 미치 랩 시리즈이기도 합니다. 2015년 이후 더는 소식이 없으니 후속작 출간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아 너무 아쉬울 뿐입니다.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3의 선택을 제외하고 대부분 작품에서 미치 랩의 주요 미션은 중동 테러리스트들과의 대결이었지만, ‘반역행위는 미국 대통령 선거를 배경으로 더럽고 비열한 정치적 음모와 폭탄테러 사건에 맞서는 랩의 활약을 그립니다. 초반에 독자에게 폭탄테러 사건의 범인과 배후는 물론 동기까지 다 밝혀지기 때문에 범인은 누구?”보다는 랩이 어떻게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 자신과 케네디 국장, 그리고 CIA에 몰아닥친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할 것인가가 관심을 끌게 됩니다. 물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 한 테러사건의 배후를 어떤 방식으로 통쾌하게 처단할 것인가도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미치 랩 시리즈의 주요 모티브 중 하나가 야비한 정치인들의 공격으로 위기에 빠진 랩과 케네디 국장의 반격인데, ‘반역행위는 그동안 CIA를 비호해온 헤이즈 대통령이 재선 출마를 포기한 상태에서 새 정부가 들어서는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두 사람의 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지경에 이릅니다. 무엇보다 새 대통령 취임을 1주일 앞둔 상태라는 시간제한 설정 때문에 긴장감과 초조함은 극도에 달합니다.

하지만 위기에 대처하는 랩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느긋하고 여유 있습니다. 랩의 궁극적인 목표는 당연히 테러범의 배후와 동기를 알아내는 것이지만, 그 전에 랩은 자신의 폭력적이고 불법적인수사방식을 비난하고 그걸 핑계 삼아 CIA를 공격하는 정치권과 언론을 제대로 엿 먹이기 위한 흥미진진한 계획을 세웁니다. 랩의 속내를 알 수 없는 케네디 국장은 거의 홀로 십자포화를 맞으며 큰 위기에 빠지지만 끝까지 랩을 믿고 기다립니다.

 

대선을 둘러싼 폭탄테러의 진상은 정교하고 잔혹하지만 이야기의 큰 선은 제법 단순해서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심플한 인상을 줬습니다. 또 분량도 상대적으로 짧았는데, 그래서인지 스토리와 무관한 부연 설명들이 꽤 많아서 군데군데 지루함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야비한 적들을 무자비하게 응징하는 통쾌함은 여전해서 랩과 케네디 국장의 매력이 여느 작품 못잖게 빛을 발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검색을 해보니 놀랍게도 미치 랩 시리즈는 아직까지 미국에서 계속 출간 중이었습니다. 빈스 플린은 2013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모두 13편의 시리즈를 내놓았는데, 이후로 Kyle Mills2015년부터 매년 한 편씩 미치 랩 시리즈를 출간했고, 2021년 현재 스무 번째 작품인 ‘Enemy at the Gates’가 나와 있는 상태였습니다. 미국에서 2006년에 출간된 반역행위에서 각각 39살과 45살인 미치 랩과 케네디 국장이 최소 50대 중반~60대 초반은 됐을 것 같은데, 과연 어떤 모습들로 활약하고 있을지 너무 궁금할 따름입니다.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적어도 빈스 플린이 집필한 나머지 6편이라도 한국에 소개되는 것인데, 요원하다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언젠가 다시 한 번 미치 랩을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을 쉽게 포기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 그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채우고 싶은 마음에 미치 랩 시리즈는 아니지만 빈스 플린의 데뷔작인 임기종료를 조만간 읽을 생각인데, 희미하게나마 미치 랩의 그림자를 맛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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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총이 빠르다 - 마이크 해머 시리즈 2 밀리언셀러 클럽 31
미키 스필레인 지음, 박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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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일을 마치고 심야식당에서 빨간 머리의 매춘부를 만난 마이크 해머는 잠깐의 대화를 통해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곤 진심을 담아 새 삶을 권유합니다. 그런데 다음 날 그녀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해머는 이름이라도 알고 싶은 마음에 그녀 주변을 조사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죽음이 사고가 아니며, 그녀가 지닌 뭔가를 쫓는 자들이 있음을 눈치 챕니다. 작은 단서에서부터 출발하여 차근차근 그녀의 과거를 훑어가던 해머는 숱한 위기를 넘긴 끝에 그녀의 죽음의 배후에 매춘조직과 권력층 간의 부패한 커넥션이 있다는 걸 확신합니다. 절친인 뉴욕 강력계 반장 팻 체임버스와 공조 수사를 벌이긴 하지만 해머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힌 채 의도적으로 경찰을 배제하곤 악당들을 향해 거침없이 45구경 권총을 발사합니다.

 

내 총이 빠르다법보다 주먹을! 재판보다 직접 처단!”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난폭한 정의의 탐정 마이크 해머의 두 번째 활약을 그린 작품입니다. 뒤표지 카피에 의하면 하드보일드의 살아있는 신화로 이 시리즈를 소개하고 있는데, 일반적인 하드보일드 스타일에 대한 정의가 감정을 극도로 절제하고 차갑고 건조한 문체로 사실만을 기술하는 것임을 감안하면 실은 이 시리즈의 주인공 마이크 해머는 오히려 하드보일드의 전설인 필립 말로와는 상당히 대척점에 서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미키 스플레인의 문장 역시 대체로 차갑고 건조하긴 해도 결정적인 순간, 즉 해머가 폭발하는 대목에서는 그야말로 온갖 분노의 감정을 총동원하여 격하기 이를 데 없는 폭주를 감행하는데, 그러고 보면 작가나 주인공 모두 필립 말로 스타일과는 사뭇 다른 차원의 하드보일드를 구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리즈 첫 편인 내가 심판한다의 원제가 ‘I, The Jury’, 내가 심판이고 배심원이고 판사.”라는 노골적인 선언을 담고 있듯 해머는 자신이 한 번 꽂힌 사건에 관한 한 일부러 경찰을 따돌려가면서까지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도 겉모습은 매춘부였지만 숙녀의 우아함을 지녔던 빨간 머리 여자의 죽음에 분노한 해머는 상대해야 할 적이 거대하고 부패한 권력층과 매춘조직의 커넥션이란 걸 깨달은 뒤로 필요에 따라 뉴욕 경찰의 강력계 반장인 팻 체임버스에게 도움을 요청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난폭한 영웅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340여 페이지 내내 그만의 심판을 거침없이 휘두릅니다.

 

해머의 첫 번째 미덕은 45구경 권총으로 대변되는 그의 감정적이고 폭력적인 대응이지만, 그는 유능한 사립탐정답게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상당한 추리력도 지니고 있습니다. 사소한 단서조차 절대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 집중력도 대단합니다. 동시에 한 작품 안에서 숱한 여성들과 농도 짙은 로맨스를 펼치는 마초적인 기질도 어김없이 발산하는데, 이 시리즈가 1947년에 시작되어 1950년대에 전성기를 맞은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전작인 내가 심판이다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복수심과 함께 부패를 향한 공적인 분노와 정의감이 뒤섞여 있는 내 총이 빠르다(로맨스 장면을 제외하곤) 거의 쉴 틈 없이 달려가는 폭주기관차처럼 전개되는 전형적인 액션 스릴러입니다. 한순간도 눈을 떼기 힘든 매력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간혹 중요한 대목에서 애매모호한 문장들이 등장하는 바람에 뭐가 어떻게 됐다는 거지?”라는 의아함을 자아낼 때가 있습니다. 원작의 문제인지 번역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점을 제외하곤 흥분지수를 고도로 유지할 수 있는 오락물의 힘을 골고루 갖추고 있습니다.

20세기 중반을 무대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마이크 해머는 지금 당장 드라마로 만들어도 똘끼 충만한 매력적인 탐정으로 각광받을 수 있는 인물입니다. 모두 13편의 작품이 출간됐지만 한국에는 초기 세 편만 소개되고 말았는데, 언젠가 레트로 열풍이 분다면 다시 한 번 재조명될 수 있는 명품 캐릭터가 돼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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