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미니 - 전면개정판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
M. J. 알리지 지음, 전행선 옮김 / 북플라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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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햄프셔 주의 남부에 위치한 사우샘프턴 중앙경찰서 강력범죄수사팀 수사반장 헬렌 그레이스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살인사건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범인은 연인 혹은 직장동료 등 두 사람을 납치하여 인적 없는 곳에 감금한 뒤 총알 한 개가 든 총과 함께 한 사람을 죽여야 나머지 한 사람이 살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남깁니다. 자신들의 배설물과 분비물에 포위당한 채 공포와 배고픔에 시달리던 그들은 결국 살인이 벌어진 뒤에야 범인의 끔찍한 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죽은 자의 억울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살아남은 자 역시 죄책감과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삶 자체가 완전히 망가지고 맙니다. 납치범의 범행 동기는 물론 어떤 식으로 희생자를 선택했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는 헬렌과 수사팀은 큰 혼란에 빠집니다.

 

영국에서 2014년에 발표된 이니 미니는 한국에 2015년에 출간됐다가 2021년에 개정판으로 다시 나온 작품입니다.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의 첫 편인데, 실은 작가인 M. J. 알리지의 이름은 물론 시리즈 이름조차 생소해서 읽을까 말까 꽤 주저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이렇게 흥미진진한 작품이 왜 스릴러 독자들의 입소문을 타지 못했는지(제가 그 소문을 못 들었을 수도 있지만) 궁금해진 게 사실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 이니 미니는 미국의 동요 “eeny, meeny, miny, moe!”에서 따온 것인데 우리 식으로 번역하면 어느 것을 고를까요? 알아맞혀 보세요!” 정도입니다. 두 사람을 납치한 뒤 선택을 강요하는 범인의 기괴한 행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제목인데, 납치된 사람들은 연인, 직장동료, 가족들이라 자신이 살기 위해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상황을 절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지만 길게는 2주일 넘게 공포와 배고픔에 사로잡히면서 그들은 결국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막다른 벽에 몰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발견되면서 헬렌 그레이스와 그녀의 동료들이 수사에 나서게 됩니다.

납치, 감금, 살인 강요로 이어지는 범죄 패턴은 동일하지만 피해자들의 마지막 선택(정말 상대를 죽일까? 누가 누구를 죽일까? 어떻게 죽일까?)은 모두 제각각이라 연이어 비슷한 사건들이 벌어져도 그들의 최후가 어떻게 그려질지 쉽게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또 경찰 역시 아무런 단서도 없는 가운데 다만 피해자들이 결코 무작위로 선택된 게 아니라고 여기는 헬렌의 추측 외에는 딱히 정해진 수사방향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어서 독자로선 초반 내내 헬렌과 수사팀이 느끼는 혼란과 무기력함에 고스란히 이입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사건 못잖게 눈길을 끄는 건 주인공 헬렌 그레이스의 캐릭터입니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으며 일 중독자에 아이 갖는 일에는 관심조차도 없었다. 발전기처럼 일했고, 거의 혼자서 부서 내의 사건 해결률을 높여놓았다.”는 표현대로 헬렌은 최연소 여성 수사반장이란 타이틀에 어울리는 최고의 형사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겐 누구에게도 내보인 적 없는 내밀한 비밀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악몽과 비극으로 인해 진짜 자기 모습을 꽁꽁 감춘 채 완벽한 형사라는 갑옷으로 중무장한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건 오직 한 순간, SM클럽에서 채찍에 몸을 내맡긴 채 무자비한 상처를 낼 때뿐입니다. 변태적 성욕을 채우려는 다른 손님들과 달리 헬렌은 오직 자신을 자책하고 죄책감을 잊지 않기 위해, 또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더욱 거센 채찍질을 요구합니다. 그저 궁금할 뿐이던 그녀의 오랜 악몽과 비극은 막판에야 비로소 독자들에게 소개됩니다.

 

조연들 역시 특별한 사연들을 갖고 있어서 적잖은 분량이 그들의 심리를 묘사하는데 할애됩니다. 유능한 형사지만 이혼 후 알코올 중독에 빠진 마크, 헬렌을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아 맹렬히 노력하면서도 임신을 갈망하는 찰리, 어릴 적 황산테러로 얼굴 반쪽이 망가진 타블로이드 기자 에밀리아 등이 그들입니다.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는 가운데 난해한 표현 대신 쉽지만 절절한 문장들로 그려진 등장인물들의 심리는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입니다. 클라이맥스로 치달을수록 적잖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거나 큰 마음의 상처를 입는 비극적인 상황들이 더욱 강렬하게 읽히는 건 이런 디테일한 심리 묘사 덕분입니다.

 

한국에는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가 단 세 편만 소개됐지만(‘죽음을 보는 재능은 스탠드얼론입니다.), 영국에선 모두 10편의 장편과 2편의 단편이 출간됐습니다. 올해 북플라자에서 이니 미니의 개정판을 낸 걸 보면 나머지 작품들의 출간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매력 넘치는 시리즈가 빠짐없이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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