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 스티븐 킹 걸작선 1
스티븐 킹 지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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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살 캐리 화이트는 학교 샤워실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뒤늦은 초경을 겪습니다. 벌거벗은 채 자신의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의 의미조차 알 수 없어 충격에 빠진 캐리를 향해 친구들은 생리대와 탐폰을 던지며 야비하고 잔인한 공격을 퍼붓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3살 이후 잠복해있던 캐리의 염력이 발현됩니다. 광기에 가까운 기독교 원리주의자로서 딸의 모든 것을 통제해온 어머니 마거릿은 여자가 된 캐리가 육체에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더욱 거세게 몰아붙이고 이 역시 캐리의 가공할 염력을 일깨우는 촉매제가 됩니다. 그리고 그 염력은 졸업예정자들의 꿈의 무대인 무도회에서 피비린내 진동하는 대참극을 일으킵니다.

 

이 작품 전까지 읽은 스티븐 킹의 작품은 모두 14편입니다. 그가 발표한 소설과 중단편집이 모두 74편이니 겨우 1/5 정도 읽은 셈이지만, 어쨌든 나름 스티븐 킹을 꽤 좋아한다고 자부할 정도는 되는 실적입니다. 하지만 그의 공식적인 첫 작품 캐리를 읽지 못한 탓에 늘 숙제 하나를 빼먹은 듯한 아쉬움을 느껴왔는데, 드디어 그 숙제를 마무리하게 됐습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캐리는 스티븐 킹의 첫 공식작품인데도 불구하고 호러 킹으로서의 그의 매력과 미덕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문제작입니다. 호러 코드는 염력’, 즉 정신력으로 물체를 이동하거나 물체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능력인데, 유전되긴 했어도 잠재적 능력에 불과했던 캐리의 염력을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것은 극도의 스트레스와 분노입니다. 염력 유전자는 캐리의 인생에서 모두 세 번에 걸쳐 폭발합니다. 이웃집과의 갈등이 극단에 이르렀던 3살 때 우박과 돌덩이를 불러들였고, 16살에 겪은 끔찍한 초경과 그것이 초래한 주위의 잔인한 공격은 잠복해있던 염력을 부활시켰으며, 잠시나마 세상과 화해하려던 순간 마지막 폭발을 일으킵니다.

 

이야기는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500명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한 19795월을 전후로 한 이야기가 메인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사건 발생 1~2년 후 캐리의 염력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과 대참사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인터뷰 등 참고자료들이 간간이 끼어드는 형식입니다.

재미있는 건 극과 극을 달리는 학자들의 논쟁입니다. 누군가는 학문적 관점에서 염력의 유전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누군가는 2의 캐리는 시간문제라며 조기 유전자 검사를 통해 위험한 아이들을 완전히 격리시켜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두 주장 모두 염력이란 실제 존재하는 힘이며 특히 유전되는 현상임을 전제로 깔고 있습니다. 이런 설정은 캐리의 염력과 그것이 일으킨 대참사를 명백한 현실의 사건으로 포장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픽션이란 점을 잊게 만듭니다. 더불어, ‘또 한 명의 캐리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에필로그는 책을 덮는 순간까지 서늘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게 만듭니다.

 

읽는 내내 마치 직접 눈으로 보듯 사방에 난무하는 피의 향연을 느낄 수 있는데, 캐리의 염력의 부활을 알린 생리혈, 온갖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 대참사의 도화선이 된 엄청난 양의 돼지피 등 시각적인 공포를 고조시키는 온갖 종류의 피가 수시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를 보고 싶어진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이 피의 향연이 책 이상의 공포심을 자극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1979년으로 설정된 점도 흥미로웠는데, 출간 시점인 1974년을 기준으로 보면 일종의 미래 소설인 셈이기 때문입니다. 첫 출간작을 내놓게 된 스티븐 킹에게 유전되는 염력이란 설정은 현재 시점을 배경으로 삼기엔 다소 부담스러웠기 때문일까요?

 

스티븐 킹에게 홀딱 빠져들 정도의 광팬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이 별난 간식처럼 구미를 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다는 건 확실히 인정합니다. ‘캐리는 그의 공식 첫 작품이란 점 때문에 더욱 더 별난 간식처럼 느껴졌는데, 막판의 불가지론같은 일부 대목만 제외한다면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팽팽한 긴장감과 호러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캐리의 염력 자체도 흥미롭지만 자신의 삶을 파탄에 이르게 만든 어머니와 친구들과 마을을 통렬하게 날려버리는 복수 코드는 호러와는 별개의 쾌감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스티븐 킹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난감한 독자라면 중단편집인 별도 없는 한밤에를 강력히 추천합니다. 다분히 개인적인 취향에 의한 추천이지만 재미와 호러를 겸비한 최고의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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