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자의 일기
엘리 그리피스 지음, 박현주 옮김 / 나무옆의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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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남부 서식스의 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며 빅토리아 시대 고딕소설 작가 R. M. 홀랜드의 전기를 집필 중인 40대 여성 클레어 캐시디는 어느 날 친한 동료 교사 엘라가 무참하게 살해됐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담당형사인 하빈더 카우어에게 조사를 받은 클레어는 얼마 전 교사 연수에서 엘라와 충돌했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일기장을 폈다가 깜짝 놀랍니다. 누군가 그날의 일기 밑에 소름 끼치는 메모를 남겨놓았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 메모의 필체가 살해된 엘라 곁에서 발견된 (범인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포스트잇의 필체와 똑같다는 점입니다. 이후 연이어 클레어 주위의 인물들이 공격을 받자 하빈더는 안 그래도 못 마땅히 여겼던 클레어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정통 영국 미스터리와 고딕 스릴러의 조합은 개인적으론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 장르입니다. 제목과 표지 역시 개인적인 취향과 거리가 먼 이 작품의 성격을 대변하고 있었는데, 100페이지까지만 가보자, 라며 어렵게 첫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젊은 시절 읽은 단편 낯선 사람에 반한 뒤 R. M. 홀랜드의 일생과 비극적인 가족사에 관심을 갖게 된 클레어는 현재 그의 전기를 집필중입니다. 마침 그녀가 근무하는 고등학교 탈가스 하이의 별관이 과거 그의 저택이었고, 그곳엔 그의 서재가 고스란히 보존돼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유령 목격담이 끊이지 않았던 그 건물은 클레어에겐 마치 성지와도 같은 곳입니다. 그야말로 고딕의 정취가 클레어 주위를 감싸고 있는 셈입니다.

한편, 클레어 주위에서 연이어 벌어지는 사건들은 명백히 현실의 일이지만 왠지 R. M. 홀랜드의 단편 낯선 사람을 연상시키는 괴이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피살자 곁에서 발견된 포스트잇에 적힌 지옥은 비었다.”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의 유명한 구절이자 동시에 R. M. 홀랜드의 단편 낯선 사람의 중요한 인용구이기도 합니다. 또 사후에 새겨진 시신의 양손바닥의 자상은 마치 성흔(聖痕)과도 같아 보여서 수사진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사건의 중심부에 놓인 클레어, 인도계 영국인인 담당형사 하빈더, 그리고 클레어의 15살 딸 조지아 등 세 여성이 한 챕터씩 번갈아 화자를 맡습니다. 피해자인 듯 가해자인 듯 애매해 보이는 클레어는 사건 정보 전달과 함께 고딕 스릴러로서의 이 작품의 정체성을 독자에게 수시로 각인시키는 인물입니다. 반면, 첫눈에 클레어가 못마땅해진 하빈더는 일련의 사건들이 클레어의 일기장과 밀접하게 연관된 게 확실해지자 다소 편견에 사로잡힌 수사를 벌이지만 끝내 미스터리의 마지막 퍼즐을 풀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역할을 맡습니다. 비밀리에 미스터리 작가의 꿈을 키우던 조지아는 본의 아니게 엄마 클레어가 연루된 사건에 휘말리지만 침착하게 대처하며 자신만의 성장을 이루는 인물입니다.

 

(애초 ‘100페이지 계획을 넘어선 지점이지만) 1/3쯤 됐을 때 중도포기를 진지하게 고민한 게 사실입니다. 우려했던 대로 정통 영국 미스터리와 고딕 스릴러의 조합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고, R. M. 홀랜드가 맡은 과거의 고딕과 영어교사 클레어가 맡은 현재의 고딕이라는 투 트랙 설계는 어딘가 억지로 갖다 붙인 느낌이 강했습니다. 특히 이런저런 사족들(고딕 분위기를 고양시키기 위한 묘사들, 군살처럼 느껴진 가족-과거-주변 인물들에 대한 부연설명들)이 차지한 과도한 분량은 지루함만 더했을 뿐 조금도 흥미롭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더욱 아쉬웠던 건 작가가 나름 열심히 구축한 영국 미스터리+고딕 스릴러라는 밑바탕에 비해 허무할 정도로 단순했던 범인의 정체와 동기입니다. 따지고 보면 굳이 빅토리아 시대 고딕소설가를 소환할 이유도 없었고, 클레어로 하여금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고딕 분위기를 고조시킬 필요도 없어 보였습니다. 외피는 거대했지만 실상 그 안의 알맹이는 너무 빈약했다고 할까요? 다른 독자들의 서평에서도 이런 지적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비혼 여성형사, 이민자, 성 소수자로 설정된 형사 하빈더 카우어를 주인공으로 한 후속작이 이미 출간됐다고 합니다. ‘하빈더 카우어 시리즈가 앞으로도 계속 고딕 스릴러를 추구할지는 알 수 없지만, 혹시 그렇다면 독특한 매력을 지닌 형사 하빈더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한국에선 아직 낯설지만 다수의 시리즈를 출간했을 정도로 꽤 깊은 내공을 지닌 작가인 만큼 고딕이 아닌 하빈더 카우어 시리즈라면 한번쯤은 재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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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에게 생긴 일
이네스 바야르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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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파리 중심가의 은행에서 자산 관리자로 일하는 마리는 남부럽지 않은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는 중입니다. 여성으로서, 아내로서, 직장인으로서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도 안정된 기반을 갖췄기 때문입니다. 그런 즈음 남편 로랑과 상의하여 아기를 갖기로 한 마리는 더없이 행복한 미래를 설계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런 마리의 꿈은 하룻밤 만에 산산조각 납니다. 직장 상사의 차안에서 끔찍한 방식으로 성폭행당한 마리는 그날 이후 바닥없는 지옥으로 추락하지만 끝내 자신이 당한 일을 은폐하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에겐 잃을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Le Malheur du bas’입니다. 직역하면 다소 낯 뜨거운 느낌이 드는 아랫도리의 불행입니다. 이야기는 표면적으론 성폭행 피해자의 끔찍한 삶을 그리고 있지만 실제론 그 이상의 서사, 즉 주변인들의 2차 가해, 남성 혹은 그들 중심의 사회가 여성을 성적 도구로 바라보고 규정하는 방식, 또 여성이 스스로를 자각하는 방식 등 잔혹하고 묵직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덕분에 다 읽은 후엔 낯 뜨겁게만 여겨졌던 제목이 더없이 슬프고 처연하고 분노를 자아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습니다.

 

250여 페이지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열 배도 넘는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 챕터에서 이미 마리의 마지막이 공개돼서 딱히 반전에 대한 기대도 가질 수 없었고, 중반쯤엔 힘들고 고통스러운 책 읽기를 포기하고픈 생각이 여러 번 들어 서평 같은 건 절대 쓰고 싶지 않았지만, 일종의 보고서이자 경고장인 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를 조금이라도 알리고 싶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마리의 이야기를 복기하며 서평을 써보기로 했습니다.

 

보고서로서의 이 작품의 가치는 한 인간의 추락은 가해자의 폭행과 희생자의 죽음이라는 인과성만으로 간명하게 설명되고 요약될 수 없다. 이 작품은 그 인과 관계 사이에 감추어진 몸과 마음의 흔적을 낱낱이 파헤쳐 사실적이고 아프게 그린 불행한 상처의 보고서다.”라는 옮긴이의 말에 적확하게 함축돼있습니다.

참혹한 사건들을 상세히 다룬 뉴스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사실 관계를 서술한 몇 줄의 기사 외엔 피해자가 겪은 상처와 악몽에 대해 알 방법이 없습니다. ‘마리에게 생긴 일은 그 빈 여백, 즉 성폭행을 당한 마리가 어떤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었는지, 또 누구보다 가까운 가족들의 본의 아닌 2차 가해로 인해 어떤 절망감을 겪었는지,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마리를 철저히 파멸시켰는지를 지독할 정도로 사실적이고 디테일하게 그립니다. 성별을 떠나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읽기를 바라는 건 어디에서도 피해자의 고통을 정면으로 다룬 이런 보고서를 만나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강간당한 것이 만천하에 알려지는 날, 마리는 더 이상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침묵에 대해 심판과 비난을 받고, 수모를 겪을 것이다. (중략) 빌어먹을 진실로 인해 그 모든 기억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고 더러워지고 찢기는 것을 마리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는 죽음이 더 아름답다고 마리는 생각한다.” (p238, 247)

 

추락하는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으며 (누구나) 거기에 귀 기울일 의무가 있다.”(‘옮긴이의 말)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일종의 경고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폭행 이후 마리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지고 몸과 마음 모두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져버립니다. 문제는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 그 누구도 마리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마리의 딜레마는 누군가 자신의 상처를 알아봐주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이 딜레마로 인해 밤마다 자신의 몸을 원하는 남편의 욕망이나 자신에게 웃음과 환호만 보내는 가족들의 밝은 표정은 마리에겐 잔혹한 2차 가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대목은 피해 사실을 은폐해놓고 어떻게 그들이 먼저 알아봐주기를 바라는가?”라고 되물을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성폭행 자체가 피해자 입장에서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범죄임을 감안하면, “추락에 귀 기울일 의무가 있다.”는 메시지는 누구라도 반드시 새겨두어야 할 합당한 경고라는 생각입니다.

 

결국 여자는 구멍일 뿐이다. 물렁물렁한 살갗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멍. 죄 많고 축축한 그 사막 한복판으로 남자가, 마치 신이 그렇게 하듯, 자기 길을 뚫고 지나간다.” (p167)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큰 충격을 준 문장인데, 어쩌면 이 두 줄의 문장이야말로 진짜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성폭행은 더러운 욕망을 품은 개인의 범죄지만, 동시에 여성을 성적 도구로만 바라볼 뿐인 남성 중심 사회가 낳은 구조적 폐단이기도 하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강렬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마리는 자신의 상처를 알아보지 못한 채 그저 몸을 탐하는 데 급급한 남편을 통해 세상이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새삼 깨닫습니다. 관계를 거부당한 뒤 변태적인 포르노로 욕망을 채우는 남편을 지켜보며 사실 그가 원했던 건 마리가 아니라 구멍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을 성폭행한 직장 상사와 남편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이 이 사회가 멸시하는 모든 것의 표본처럼 느껴진다. 나약하고 비겁하고 뚱뚱하며, 제 아이를 좋아하지 않고, 언제든 가족을 내동댕이치기만을 꿈꾸며 성 생활에 소극적이고, 동적이지 않고, 업무에서도 뒤처질 뿐 아니라 효율적이지도 않은, 이미 늙어 버린 여자.” (p129)

 

이렇게 서평이 길어진 것은 그만큼 마리의 이야기가 저를 화나게 했기 때문입니다. 또 역설적이게도 제가 남자라서 마리의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스스로를 증오하고 혐오한 나머지 멸시의 표본으로까지 여기게 된 마리를 지켜보며 분노와 자괴감과 안타까움이 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감정을 공유하기를 바랐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책읽기가 되겠지만 가슴 아픈 보고서이자 누구나 귀 기울여야 할 경고장인 마리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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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상처 스토리콜렉터 13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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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 후반에서 90대 초반에 이르는 고령층이 연이어 잔혹한 처형 방식에 의해 살해됩니다. 부와 명예를 거머쥔 유대인, 고급 요양시설에 머물던 노파, 지하실에 나치의 기념물을 소장한 노인 등 희생자들 간에 공통점을 찾기가 어려워 수사에 난항을 겪던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현장에 남겨진 ‘16145’라는 숫자의 의미도 알 수 없어 곤혹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러던 중 프랑크푸르트의 최고 부유층이자 사회 기여도가 높아 존경을 받는 86세의 여인 베라 칼텐제가 희생자들과 밀접한 관계라는 점이 드러나면서 수사에 진척을 보입니다. 그런 와중에 칼텐제 집안과 연관된 한 남자와 그 내연녀가 살해되고 칼텐제의 장남 엘라르트가 용의자로 떠오르면서 사건은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합니다.

 

깊은 상처’(Tiefe Wunden)라는 제목에 걸맞게 무려 60여년에 걸친 증오와 복수, 위선과 위장을 다룬 작품입니다. 2차 대전 막바지, 나치의 추락과 러시아의 진격으로 대혼란에 빠진 동프로이센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 이후 60여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가해자는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은닉한 채 거짓된 모습으로 세상을 평온하게 살아온 반면, 피해자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지 않으며 악몽과도 같은 과거를 잊기 위해 발버둥 쳐왔습니다. 하지만 우연과 필연이 엇갈린 운명 같은 만남들이 이뤄지고, 60여 년 전의 진실과 조우한 그 누군가가 깊은 상처를 되갚아 줄 기회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살육이 시작됩니다.

 

홀로코스트와 나치라는 묵직한 역사적 코드들이 동원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한 다큐 스타일의 소설은 아닙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던 개인들의 비극에 초점이 맞춰진 덕분에 역사적 코드들의 부담감을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물론 오랜 과거와 현재가 한데 얽힌 사건의 특성 상 피아와 보덴슈타인의 수사는 꽤 애를 먹습니다. 범행 동기나 피해자들의 공통점 등 사건 자체도 모호하지만, 피해자들과 접점이 있는 베라 칼텐제와 그녀의 가족들에게서 풍기는 위험한 분위기 역시 피아와 보덴슈타인을 계속 난감하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수사를 진행할수록 베라 칼텐제와 그녀의 가족들이 사건의 열쇠라는 직감이 강해지지만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단서와 물증은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칼텐제 집안 주위를 맴도는 다분히 의심스러운 인물들 해고된 베라의 전 비서, 칼텐제 가족들에게 돈을 뜯어내는 남자, 칼텐제 저택을 수리하다가 소송전을 벌인 건축가 등 까지 가세한데다, 그들 중 일부가 범죄 피해자가 되자 수사는 말 그대로 오리무중에 빠집니다.

 

사건 못잖게 흥미를 끄는 대목은 호프하임 경찰서에 새로 부임한 수사과장 니콜라 엥겔의 존재입니다. 과거 보덴슈타인과 인연과 악연을 거듭했던 그녀의 등장은 피아와 보덴슈타인이 속한 강력11팀을 초긴장상태로 몰아갑니다. 특히 보덴슈타인을 향한 악의를 숨기지 않는 그녀의 언행은 피아에게는 궁금증을, 보덴슈타인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격분을 일으킵니다. 이들의 관계는 이후 작품에서도 계속 팽팽한 긴장감을 일으키곤 하는데, 오랜만에 그들의 첫 만남을 다시 읽어 보니 예상외의 흥미진진함과 함께 이후의 전개에 대한 기대감도 맛볼 수 있었습니다.

 

타우누스 시리즈 다시 읽기를 통해 새삼 느낀 점이지만, 넬레 노이하우스는 일단 출전선수를 엄청나게 많이 등장시키고, 그만큼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한 관계를 설정하는데서 쾌감을 느끼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특히 깊은 상처60여년의 간극을 두고 과거와 현재에 적잖은 인물들이 등장해서 100페이지도 채 되기 전에 인물관계도를 그리면서 읽어야 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야기가 제자리를 맴돌거나 출구 없는 미로처럼 느껴지곤 했는데, 물론 복잡하고 어지러운 것들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조금씩 선명해지고 마지막엔 깔끔하게 정리되긴 하지만, 스타일이 안 맞는 독자라면 다소 두통을 겪거나 적응을 포기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깊은 상처의 뒤를 잇는 작품은 타우누스 시리즈가운데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된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입니다.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이지만 대중성이나 완성도 면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작품이라 가장 먼저 소개된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도 타우누스 시리즈에 홀딱 빠진 계기가 된 작품이라 거의 10년 만의 다시 읽기가 신간보다 더 기대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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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 플레이어 그녀
브누아 필리퐁 지음, 장소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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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성과 선정성의 적절한 조합, 엄청난 속도감, 개성 강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들, 그리고 프랑스 특유의 절묘하게 비틀린 문장과 블랙 유머 등 온갖 재미 요소들이 골고루 잘 배합된 작품입니다. ‘포커 판을 무대로 한 스릴러라는 설정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 수도 있지만, 이제껏 본 적 없는 독특한 세 주인공이 총과 폭력과 기막힌 카드 속임수를 앞세워 악당들을 제압하거나 가차 없이 복수하는 장면들은 프랑스 작품 맞아?”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오락성과 재미와 긴장감을 동시에 선사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세 주인공에게 각각 끔찍하거나 비극적인 과거사와 트라우마를 부여함으로써 화려하고 통쾌한 액션 스릴러에 적절한 균형추를 매달아놓습니다. 30대 초반인 주인공 막신은 권위적이고 탐욕스런 아버지로 인해 10대 시절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입었고, 그 트라우마는 고통스런 자해 없이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녀의 심신을 망쳐놓았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도망친 이후 16년 동안 막신은 복수를 위해 자신이 연마해야 할 모든 것들을 철저히 몸과 마음에 익혔고, 이제 인생을 건 복수를 도와줄 협력자를 찾아 나섭니다.

 

막신이 선택한 협력자는 작크.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뒤 아버지의 혹독한 훈련에 의해 포커의 고수가 된 그는 기술적으로 뛰어난 속임수 솜씨를 갖고 있지만 상대를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심리적 속임수에 더 능합니다. 거하게 한 판을 치르고 나면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여자를 찾곤 하지만 그는 절대로 돈을 주고 여자를 사지 않습니다. 클럽이나 길거리에서 자신과 뜻이 맞는(?) 여자와 합의 하에 관계를 맺습니다. 그 관계엔 감정 따윈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가혹한 훈련으로 인해 감정 자체를 거세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평생 처음으로 불꽃 튀는 감정의 폭발을 경험하게 된 상대가 바로 막신입니다.

세 번째 주인공인 발루는 작크와 콤비로 포커 판을 누비는 거구의 흑인입니다. 어려서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뒤 수시로 자살충동에 시달리지만 작크와의 만남 이후 포커를 통해 그 충동을 억누를 수 있게 됩니다. 포커 외에 그에게 정신적 안정을 제공하는 것은 이른바 원정 처벌, 일부러 늦은 밤 유흥가를 찾아가선 여자에게 성폭력을 가하는 남자들을 무자비하게 제압하는 일입니다. 그만의 독특한 정의 구현 방식이라고 할까요?

 

이야기의 골자는 포커 판을 전전하며 젊음을 탕진하던 작크가 막신의 복수극에 끼어든 뒤 롤러코스터 같은 소용돌이에 휘말린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액션 스릴러 설정이지만, 세 주인공의 트라우마와 심리묘사가 절묘하게 곁들여지면서 이야기는 역동성과 묵직함을 오가는 흥미로운 양상을 띱니다. 무의미한 성욕 발산 외엔 어디에서도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포커의 고수작크, 자살충동과 원정처벌이라는 극단적인 심리적 동요를 겪는 발루, 그리고 악몽을 잊기 위해 끊임없이 자해를 저지르면서도 복수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막신은 작가의 리얼하고 디테일한 심리묘사를 통해 생생하고 뜨거운 캐릭터로 발전합니다. ‘포커 플레이어 그녀가 언뜻 가벼워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오락물의 미덕을 갖춘 건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복수극 못잖게 눈길을 끈 건 무례한 마초들을 향한 사이다 같은 응징인데, 포커 판 자체가 남자들의 세계이자 술집이나 지하실 등 음습한 공간에서 벌어지다 보니 그곳에 홀연히 나타난 막신의 존재는 호기심 이상의 관심을 자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가는 그녀의 환상적인 기술에 대해 존경심과 부끄러움을 갖는 대신 마초들 대부분 예외 없이야비하고 음란한 공격을 가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16년 동안 복수를 위한 모든 기술을 연마한 막신에게 그따위 무례한 수컷들은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막신과 원 팀이 된 작크와 발루 역시 사이다 같은 응징에 기꺼이 참여하여 쾌감을 더욱 고조시킵니다.

 

작가의 전작인 루거 총을 든 할머니를 읽지 않은 건 (미스 마플이나 폴리팩스 부인과 마찬가지로) ‘할머니 주인공이 취향에 잘 안 맞기도 했고, 표지 역시 조금은 비호감에 가까운 선입견을 갖게 했기 때문인데, ‘포커 플레이어 그녀의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바로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가 브누아 필리퐁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매력덩어리 캐릭터들과 오락 이상의 재미와 통렬한 카타르시스를 겸비한 그의 신작 소식은 언제라도 환영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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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 스티븐 킹 걸작선 1
스티븐 킹 지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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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살 캐리 화이트는 학교 샤워실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뒤늦은 초경을 겪습니다. 벌거벗은 채 자신의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의 의미조차 알 수 없어 충격에 빠진 캐리를 향해 친구들은 생리대와 탐폰을 던지며 야비하고 잔인한 공격을 퍼붓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3살 이후 잠복해있던 캐리의 염력이 발현됩니다. 광기에 가까운 기독교 원리주의자로서 딸의 모든 것을 통제해온 어머니 마거릿은 여자가 된 캐리가 육체에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더욱 거세게 몰아붙이고 이 역시 캐리의 가공할 염력을 일깨우는 촉매제가 됩니다. 그리고 그 염력은 졸업예정자들의 꿈의 무대인 무도회에서 피비린내 진동하는 대참극을 일으킵니다.

 

이 작품 전까지 읽은 스티븐 킹의 작품은 모두 14편입니다. 그가 발표한 소설과 중단편집이 모두 74편이니 겨우 1/5 정도 읽은 셈이지만, 어쨌든 나름 스티븐 킹을 꽤 좋아한다고 자부할 정도는 되는 실적입니다. 하지만 그의 공식적인 첫 작품 캐리를 읽지 못한 탓에 늘 숙제 하나를 빼먹은 듯한 아쉬움을 느껴왔는데, 드디어 그 숙제를 마무리하게 됐습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캐리는 스티븐 킹의 첫 공식작품인데도 불구하고 호러 킹으로서의 그의 매력과 미덕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문제작입니다. 호러 코드는 염력’, 즉 정신력으로 물체를 이동하거나 물체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능력인데, 유전되긴 했어도 잠재적 능력에 불과했던 캐리의 염력을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것은 극도의 스트레스와 분노입니다. 염력 유전자는 캐리의 인생에서 모두 세 번에 걸쳐 폭발합니다. 이웃집과의 갈등이 극단에 이르렀던 3살 때 우박과 돌덩이를 불러들였고, 16살에 겪은 끔찍한 초경과 그것이 초래한 주위의 잔인한 공격은 잠복해있던 염력을 부활시켰으며, 잠시나마 세상과 화해하려던 순간 마지막 폭발을 일으킵니다.

 

이야기는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500명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한 19795월을 전후로 한 이야기가 메인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사건 발생 1~2년 후 캐리의 염력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과 대참사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인터뷰 등 참고자료들이 간간이 끼어드는 형식입니다.

재미있는 건 극과 극을 달리는 학자들의 논쟁입니다. 누군가는 학문적 관점에서 염력의 유전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누군가는 2의 캐리는 시간문제라며 조기 유전자 검사를 통해 위험한 아이들을 완전히 격리시켜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두 주장 모두 염력이란 실제 존재하는 힘이며 특히 유전되는 현상임을 전제로 깔고 있습니다. 이런 설정은 캐리의 염력과 그것이 일으킨 대참사를 명백한 현실의 사건으로 포장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픽션이란 점을 잊게 만듭니다. 더불어, ‘또 한 명의 캐리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에필로그는 책을 덮는 순간까지 서늘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게 만듭니다.

 

읽는 내내 마치 직접 눈으로 보듯 사방에 난무하는 피의 향연을 느낄 수 있는데, 캐리의 염력의 부활을 알린 생리혈, 온갖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 대참사의 도화선이 된 엄청난 양의 돼지피 등 시각적인 공포를 고조시키는 온갖 종류의 피가 수시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를 보고 싶어진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이 피의 향연이 책 이상의 공포심을 자극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1979년으로 설정된 점도 흥미로웠는데, 출간 시점인 1974년을 기준으로 보면 일종의 미래 소설인 셈이기 때문입니다. 첫 출간작을 내놓게 된 스티븐 킹에게 유전되는 염력이란 설정은 현재 시점을 배경으로 삼기엔 다소 부담스러웠기 때문일까요?

 

스티븐 킹에게 홀딱 빠져들 정도의 광팬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이 별난 간식처럼 구미를 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다는 건 확실히 인정합니다. ‘캐리는 그의 공식 첫 작품이란 점 때문에 더욱 더 별난 간식처럼 느껴졌는데, 막판의 불가지론같은 일부 대목만 제외한다면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팽팽한 긴장감과 호러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캐리의 염력 자체도 흥미롭지만 자신의 삶을 파탄에 이르게 만든 어머니와 친구들과 마을을 통렬하게 날려버리는 복수 코드는 호러와는 별개의 쾌감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스티븐 킹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난감한 독자라면 중단편집인 별도 없는 한밤에를 강력히 추천합니다. 다분히 개인적인 취향에 의한 추천이지만 재미와 호러를 겸비한 최고의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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