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상처 스토리콜렉터 13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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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 후반에서 90대 초반에 이르는 고령층이 연이어 잔혹한 처형 방식에 의해 살해됩니다. 부와 명예를 거머쥔 유대인, 고급 요양시설에 머물던 노파, 지하실에 나치의 기념물을 소장한 노인 등 희생자들 간에 공통점을 찾기가 어려워 수사에 난항을 겪던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현장에 남겨진 ‘16145’라는 숫자의 의미도 알 수 없어 곤혹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러던 중 프랑크푸르트의 최고 부유층이자 사회 기여도가 높아 존경을 받는 86세의 여인 베라 칼텐제가 희생자들과 밀접한 관계라는 점이 드러나면서 수사에 진척을 보입니다. 그런 와중에 칼텐제 집안과 연관된 한 남자와 그 내연녀가 살해되고 칼텐제의 장남 엘라르트가 용의자로 떠오르면서 사건은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합니다.

 

깊은 상처’(Tiefe Wunden)라는 제목에 걸맞게 무려 60여년에 걸친 증오와 복수, 위선과 위장을 다룬 작품입니다. 2차 대전 막바지, 나치의 추락과 러시아의 진격으로 대혼란에 빠진 동프로이센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 이후 60여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가해자는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은닉한 채 거짓된 모습으로 세상을 평온하게 살아온 반면, 피해자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지 않으며 악몽과도 같은 과거를 잊기 위해 발버둥 쳐왔습니다. 하지만 우연과 필연이 엇갈린 운명 같은 만남들이 이뤄지고, 60여 년 전의 진실과 조우한 그 누군가가 깊은 상처를 되갚아 줄 기회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살육이 시작됩니다.

 

홀로코스트와 나치라는 묵직한 역사적 코드들이 동원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한 다큐 스타일의 소설은 아닙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던 개인들의 비극에 초점이 맞춰진 덕분에 역사적 코드들의 부담감을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물론 오랜 과거와 현재가 한데 얽힌 사건의 특성 상 피아와 보덴슈타인의 수사는 꽤 애를 먹습니다. 범행 동기나 피해자들의 공통점 등 사건 자체도 모호하지만, 피해자들과 접점이 있는 베라 칼텐제와 그녀의 가족들에게서 풍기는 위험한 분위기 역시 피아와 보덴슈타인을 계속 난감하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수사를 진행할수록 베라 칼텐제와 그녀의 가족들이 사건의 열쇠라는 직감이 강해지지만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단서와 물증은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칼텐제 집안 주위를 맴도는 다분히 의심스러운 인물들 해고된 베라의 전 비서, 칼텐제 가족들에게 돈을 뜯어내는 남자, 칼텐제 저택을 수리하다가 소송전을 벌인 건축가 등 까지 가세한데다, 그들 중 일부가 범죄 피해자가 되자 수사는 말 그대로 오리무중에 빠집니다.

 

사건 못잖게 흥미를 끄는 대목은 호프하임 경찰서에 새로 부임한 수사과장 니콜라 엥겔의 존재입니다. 과거 보덴슈타인과 인연과 악연을 거듭했던 그녀의 등장은 피아와 보덴슈타인이 속한 강력11팀을 초긴장상태로 몰아갑니다. 특히 보덴슈타인을 향한 악의를 숨기지 않는 그녀의 언행은 피아에게는 궁금증을, 보덴슈타인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격분을 일으킵니다. 이들의 관계는 이후 작품에서도 계속 팽팽한 긴장감을 일으키곤 하는데, 오랜만에 그들의 첫 만남을 다시 읽어 보니 예상외의 흥미진진함과 함께 이후의 전개에 대한 기대감도 맛볼 수 있었습니다.

 

타우누스 시리즈 다시 읽기를 통해 새삼 느낀 점이지만, 넬레 노이하우스는 일단 출전선수를 엄청나게 많이 등장시키고, 그만큼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한 관계를 설정하는데서 쾌감을 느끼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특히 깊은 상처60여년의 간극을 두고 과거와 현재에 적잖은 인물들이 등장해서 100페이지도 채 되기 전에 인물관계도를 그리면서 읽어야 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야기가 제자리를 맴돌거나 출구 없는 미로처럼 느껴지곤 했는데, 물론 복잡하고 어지러운 것들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조금씩 선명해지고 마지막엔 깔끔하게 정리되긴 하지만, 스타일이 안 맞는 독자라면 다소 두통을 겪거나 적응을 포기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깊은 상처의 뒤를 잇는 작품은 타우누스 시리즈가운데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된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입니다.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이지만 대중성이나 완성도 면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작품이라 가장 먼저 소개된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도 타우누스 시리즈에 홀딱 빠진 계기가 된 작품이라 거의 10년 만의 다시 읽기가 신간보다 더 기대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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