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에게 생긴 일
이네스 바야르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21년 9월
평점 :
절판


파리 중심가의 은행에서 자산 관리자로 일하는 마리는 남부럽지 않은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는 중입니다. 여성으로서, 아내로서, 직장인으로서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도 안정된 기반을 갖췄기 때문입니다. 그런 즈음 남편 로랑과 상의하여 아기를 갖기로 한 마리는 더없이 행복한 미래를 설계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런 마리의 꿈은 하룻밤 만에 산산조각 납니다. 직장 상사의 차안에서 끔찍한 방식으로 성폭행당한 마리는 그날 이후 바닥없는 지옥으로 추락하지만 끝내 자신이 당한 일을 은폐하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에겐 잃을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Le Malheur du bas’입니다. 직역하면 다소 낯 뜨거운 느낌이 드는 아랫도리의 불행입니다. 이야기는 표면적으론 성폭행 피해자의 끔찍한 삶을 그리고 있지만 실제론 그 이상의 서사, 즉 주변인들의 2차 가해, 남성 혹은 그들 중심의 사회가 여성을 성적 도구로 바라보고 규정하는 방식, 또 여성이 스스로를 자각하는 방식 등 잔혹하고 묵직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덕분에 다 읽은 후엔 낯 뜨겁게만 여겨졌던 제목이 더없이 슬프고 처연하고 분노를 자아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습니다.

 

250여 페이지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열 배도 넘는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 챕터에서 이미 마리의 마지막이 공개돼서 딱히 반전에 대한 기대도 가질 수 없었고, 중반쯤엔 힘들고 고통스러운 책 읽기를 포기하고픈 생각이 여러 번 들어 서평 같은 건 절대 쓰고 싶지 않았지만, 일종의 보고서이자 경고장인 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를 조금이라도 알리고 싶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마리의 이야기를 복기하며 서평을 써보기로 했습니다.

 

보고서로서의 이 작품의 가치는 한 인간의 추락은 가해자의 폭행과 희생자의 죽음이라는 인과성만으로 간명하게 설명되고 요약될 수 없다. 이 작품은 그 인과 관계 사이에 감추어진 몸과 마음의 흔적을 낱낱이 파헤쳐 사실적이고 아프게 그린 불행한 상처의 보고서다.”라는 옮긴이의 말에 적확하게 함축돼있습니다.

참혹한 사건들을 상세히 다룬 뉴스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사실 관계를 서술한 몇 줄의 기사 외엔 피해자가 겪은 상처와 악몽에 대해 알 방법이 없습니다. ‘마리에게 생긴 일은 그 빈 여백, 즉 성폭행을 당한 마리가 어떤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었는지, 또 누구보다 가까운 가족들의 본의 아닌 2차 가해로 인해 어떤 절망감을 겪었는지,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마리를 철저히 파멸시켰는지를 지독할 정도로 사실적이고 디테일하게 그립니다. 성별을 떠나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읽기를 바라는 건 어디에서도 피해자의 고통을 정면으로 다룬 이런 보고서를 만나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강간당한 것이 만천하에 알려지는 날, 마리는 더 이상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침묵에 대해 심판과 비난을 받고, 수모를 겪을 것이다. (중략) 빌어먹을 진실로 인해 그 모든 기억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고 더러워지고 찢기는 것을 마리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는 죽음이 더 아름답다고 마리는 생각한다.” (p238, 247)

 

추락하는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으며 (누구나) 거기에 귀 기울일 의무가 있다.”(‘옮긴이의 말)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일종의 경고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폭행 이후 마리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지고 몸과 마음 모두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져버립니다. 문제는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 그 누구도 마리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마리의 딜레마는 누군가 자신의 상처를 알아봐주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이 딜레마로 인해 밤마다 자신의 몸을 원하는 남편의 욕망이나 자신에게 웃음과 환호만 보내는 가족들의 밝은 표정은 마리에겐 잔혹한 2차 가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대목은 피해 사실을 은폐해놓고 어떻게 그들이 먼저 알아봐주기를 바라는가?”라고 되물을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성폭행 자체가 피해자 입장에서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범죄임을 감안하면, “추락에 귀 기울일 의무가 있다.”는 메시지는 누구라도 반드시 새겨두어야 할 합당한 경고라는 생각입니다.

 

결국 여자는 구멍일 뿐이다. 물렁물렁한 살갗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멍. 죄 많고 축축한 그 사막 한복판으로 남자가, 마치 신이 그렇게 하듯, 자기 길을 뚫고 지나간다.” (p167)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큰 충격을 준 문장인데, 어쩌면 이 두 줄의 문장이야말로 진짜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성폭행은 더러운 욕망을 품은 개인의 범죄지만, 동시에 여성을 성적 도구로만 바라볼 뿐인 남성 중심 사회가 낳은 구조적 폐단이기도 하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강렬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마리는 자신의 상처를 알아보지 못한 채 그저 몸을 탐하는 데 급급한 남편을 통해 세상이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새삼 깨닫습니다. 관계를 거부당한 뒤 변태적인 포르노로 욕망을 채우는 남편을 지켜보며 사실 그가 원했던 건 마리가 아니라 구멍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을 성폭행한 직장 상사와 남편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이 이 사회가 멸시하는 모든 것의 표본처럼 느껴진다. 나약하고 비겁하고 뚱뚱하며, 제 아이를 좋아하지 않고, 언제든 가족을 내동댕이치기만을 꿈꾸며 성 생활에 소극적이고, 동적이지 않고, 업무에서도 뒤처질 뿐 아니라 효율적이지도 않은, 이미 늙어 버린 여자.” (p129)

 

이렇게 서평이 길어진 것은 그만큼 마리의 이야기가 저를 화나게 했기 때문입니다. 또 역설적이게도 제가 남자라서 마리의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스스로를 증오하고 혐오한 나머지 멸시의 표본으로까지 여기게 된 마리를 지켜보며 분노와 자괴감과 안타까움이 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감정을 공유하기를 바랐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책읽기가 되겠지만 가슴 아픈 보고서이자 누구나 귀 기울여야 할 경고장인 마리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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