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 플레이어 그녀
브누아 필리퐁 지음, 장소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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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성과 선정성의 적절한 조합, 엄청난 속도감, 개성 강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들, 그리고 프랑스 특유의 절묘하게 비틀린 문장과 블랙 유머 등 온갖 재미 요소들이 골고루 잘 배합된 작품입니다. ‘포커 판을 무대로 한 스릴러라는 설정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 수도 있지만, 이제껏 본 적 없는 독특한 세 주인공이 총과 폭력과 기막힌 카드 속임수를 앞세워 악당들을 제압하거나 가차 없이 복수하는 장면들은 프랑스 작품 맞아?”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오락성과 재미와 긴장감을 동시에 선사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세 주인공에게 각각 끔찍하거나 비극적인 과거사와 트라우마를 부여함으로써 화려하고 통쾌한 액션 스릴러에 적절한 균형추를 매달아놓습니다. 30대 초반인 주인공 막신은 권위적이고 탐욕스런 아버지로 인해 10대 시절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입었고, 그 트라우마는 고통스런 자해 없이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녀의 심신을 망쳐놓았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도망친 이후 16년 동안 막신은 복수를 위해 자신이 연마해야 할 모든 것들을 철저히 몸과 마음에 익혔고, 이제 인생을 건 복수를 도와줄 협력자를 찾아 나섭니다.

 

막신이 선택한 협력자는 작크.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뒤 아버지의 혹독한 훈련에 의해 포커의 고수가 된 그는 기술적으로 뛰어난 속임수 솜씨를 갖고 있지만 상대를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심리적 속임수에 더 능합니다. 거하게 한 판을 치르고 나면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여자를 찾곤 하지만 그는 절대로 돈을 주고 여자를 사지 않습니다. 클럽이나 길거리에서 자신과 뜻이 맞는(?) 여자와 합의 하에 관계를 맺습니다. 그 관계엔 감정 따윈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가혹한 훈련으로 인해 감정 자체를 거세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평생 처음으로 불꽃 튀는 감정의 폭발을 경험하게 된 상대가 바로 막신입니다.

세 번째 주인공인 발루는 작크와 콤비로 포커 판을 누비는 거구의 흑인입니다. 어려서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뒤 수시로 자살충동에 시달리지만 작크와의 만남 이후 포커를 통해 그 충동을 억누를 수 있게 됩니다. 포커 외에 그에게 정신적 안정을 제공하는 것은 이른바 원정 처벌, 일부러 늦은 밤 유흥가를 찾아가선 여자에게 성폭력을 가하는 남자들을 무자비하게 제압하는 일입니다. 그만의 독특한 정의 구현 방식이라고 할까요?

 

이야기의 골자는 포커 판을 전전하며 젊음을 탕진하던 작크가 막신의 복수극에 끼어든 뒤 롤러코스터 같은 소용돌이에 휘말린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액션 스릴러 설정이지만, 세 주인공의 트라우마와 심리묘사가 절묘하게 곁들여지면서 이야기는 역동성과 묵직함을 오가는 흥미로운 양상을 띱니다. 무의미한 성욕 발산 외엔 어디에서도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포커의 고수작크, 자살충동과 원정처벌이라는 극단적인 심리적 동요를 겪는 발루, 그리고 악몽을 잊기 위해 끊임없이 자해를 저지르면서도 복수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막신은 작가의 리얼하고 디테일한 심리묘사를 통해 생생하고 뜨거운 캐릭터로 발전합니다. ‘포커 플레이어 그녀가 언뜻 가벼워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오락물의 미덕을 갖춘 건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복수극 못잖게 눈길을 끈 건 무례한 마초들을 향한 사이다 같은 응징인데, 포커 판 자체가 남자들의 세계이자 술집이나 지하실 등 음습한 공간에서 벌어지다 보니 그곳에 홀연히 나타난 막신의 존재는 호기심 이상의 관심을 자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가는 그녀의 환상적인 기술에 대해 존경심과 부끄러움을 갖는 대신 마초들 대부분 예외 없이야비하고 음란한 공격을 가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16년 동안 복수를 위한 모든 기술을 연마한 막신에게 그따위 무례한 수컷들은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막신과 원 팀이 된 작크와 발루 역시 사이다 같은 응징에 기꺼이 참여하여 쾌감을 더욱 고조시킵니다.

 

작가의 전작인 루거 총을 든 할머니를 읽지 않은 건 (미스 마플이나 폴리팩스 부인과 마찬가지로) ‘할머니 주인공이 취향에 잘 안 맞기도 했고, 표지 역시 조금은 비호감에 가까운 선입견을 갖게 했기 때문인데, ‘포커 플레이어 그녀의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바로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가 브누아 필리퐁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매력덩어리 캐릭터들과 오락 이상의 재미와 통렬한 카타르시스를 겸비한 그의 신작 소식은 언제라도 환영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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