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 독자
막스 세크 지음, 한정아 옮김 / 청미래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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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헬싱키의 고급 주택가에서 베스트셀러 작가 로저 코포넨의 아내 마리아의 사체가 발견됩니다. 검은 드레스와 검은 매니큐어를 바른 채 발견된 그녀는 조커처럼 기괴하게 웃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현장 수사관들을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더더욱 놀라운 건 범행수법이 로저의 베스트셀러인 마녀사냥에 묘사된 것과 거의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이후 책 내용을 모방한 살인사건이 연이어 벌어지지만 헬싱키 경찰은 그저 우왕좌왕할 뿐입니다. 담당 형사인 제시카 니에미는 중세 마녀사냥을 연상시키는 살해수법, 일부러 정보를 흘리는 듯한 범인의 기이한 행태, 흑발의 젊은 여성이란 것 외엔 공통점이 없는 희생자 등 난해하기 짝이 없는 사건들 속에서 명백히 의심스러운 점을 발견하지만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 당혹감에 빠지고 맙니다.

 

북유럽 스릴러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핀란드 스릴러는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어서 특별히 더 관심을 가진 작품입니다. 산타클로스의 고향에 걸맞게 핀란드는 눈으로 뒤덮인 한겨울 풍경 외엔 달리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었는데, ‘모방 독자는 그 이미지 가운데 차갑고 어두운 면만 뚝 떼어내 옮겨놓은 듯 폭설, 얼음바다, 강풍 등 스산한 분위기로 가득 찬 작품입니다.

 

마녀사냥’ 3부작으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로저 코포넨의 아내 마리아를 시작으로 검은 머리의 젊은 여성들이 책 속에 묘사된 수법 그대로(혹은 비슷하게) 연이어 살해당하고, 현장에서 발견된 시신과 단서들은 하나 같이 비현실적인 기괴함 혹은 신비주의나 사탄주의의 악취를 풍기고 있어서 담당 형사 제시카 니에미를 비롯한 수사진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시신들은 (대부분) 똑같은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독살, 화형, 익사, 압사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살해돼서 도무지 범인의 동기나 희생자 선정 방식을 종잡을 수 없게 만듭니다.

사건과 함께 나란히 전개되는 이야기는 주인공 제시카의 비극적인 가족사와 15년 전에 그녀가 베네치아에서 겪은 끔찍한 악몽에 관한 것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애증 섞인 기억,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도저히 마음의 상처를 달랠 수 없었던 유년기와 청소년기, 그리고 상실의 자리를 메우고자 향했던 베네치아에서의 4개월간의 악몽 등 제시카는 유능한 강력계 형사라는 외피 속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깊고 고통스러운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속 수법을 모방한 잔혹한 연쇄살인, 중세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형이상학적 코드들(마녀사냥, 신비주의, 사탄숭배, 정신이상 등), 그리고 매력적이지만 몸과 마음이 상처로 가득한 주인공 등 눈길을 사로잡는 요소들이 포진돼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박한 평점을 준 것은 몇몇 이유 때문입니다.

우선 가장 큰 것은 막판에 밝혀진 범인의 동기입니다. 다분히 북유럽 스릴러다운 설정이긴 하지만 어느 한 곳 공감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범인의 마지막 메시지는 기괴함 외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질적인 북유럽의 문화적 충격이라도 만끽했다면 그나마 조금은 보람이 있었을 텐데 그 역시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다음으론 주인공 제시카의 캐릭터인데, 작가는 초반부터 그녀는 무척 고통스러운 과거를 지녔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밑도 끝도 없이 반복적으로 묘사되던 제시카의 고통은 뒤늦게 그녀가 6살에 겪은 가족의 해체와 15년 전에 겪은 베네치아에서의 악몽을 통해 부연설명됩니다. 제시카의 과거가 적잖은 분량을 차지한 걸 보면 그녀의 고통이 현재 벌어진 사건과 관련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에도 그녀의 고통은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연쇄살인사건 스토리와 분리된 듯 따로국밥처럼 읽힌 게 사실입니다. 없어선 안 될 설정이지만 너무 과도한 분량과 비중을 차지한 나머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납득하기 힘든 범인의 동기와 더 납득하기 힘든 주인공의 캐릭터가 접점을 이루는 클라이맥스와 엔딩이 다소 허무하게 보인 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옮긴이의 말에서 이 작품을 극찬한 번역가와 인터넷서점 서평란에 별 5개를 준 많은 독자들처럼 취향만 잘 맞는다면 모방 독자는 사건 자체나 제시카의 캐릭터, 범인의 기괴한 범행동기 등 모든 면에서 충분히 열광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소수의견일 가능성이 무척 높지만) 개인적으론 핀란드의 스산하고 지독한 한겨울의 풍경 외에는 딱히 인상적인 대목을 찾기 힘든 작품이었습니다. 가혹한 기후와 자연환경이 지배하는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에서는 이런 소재와 설정이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도, 또 대박을 위한 필수조건일 수도 있겠지만 왠지 저 같은 성향의 한국 독자에게 어필하기에는 산타클로스만큼이나 현실감이 부족해 보인다는 게 저의 지극히 주관적인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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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돌아오라 부를 때
찰리 돈리 지음, 안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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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는 시카고경찰서 특수조사팀 소속이지만 실은 프리랜서나 다름없는 범죄 재구성 전문가로리 무어. 번아웃과 우울증 때문에 6개월 넘게 잠수를 타던 그녀는 갑작스레 사망한 변호사 아버지가 남긴 업무를 떠맡게 되는데, 그 가운데 로리를 당혹스럽게 만든 건 가석방을 코앞에 둔 일명 도적에 관한 것입니다. 40년 전 연쇄납치살인마로 지목됐지만 시신도 없고 단서도 없이 정황증거만으로 60년 형을 선고받았던 도적의 가석방은 언론마저 주목하는 사안인데, 로리로서는 아버지가 왜 그 오랜 시간동안 도적같은 자를 변호하며 적잖은 돈을 받아온 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도적의 과거 자료 속에 등장하는 미지의 여인 때문에 로리는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에 빠집니다. 40년 전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인터넷과 과학수사 없이 거의 완벽한 범죄의 재구성을 이뤄내 사건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찰리 돈리가 창조한 독특한 커플 주인공 로리 무어와 레인 필립스는 이미 수어사이드 하우스’(20211)를 통해 한국 독자와 만난 적이 있습니다. (원작 출간순서로는 어둠이 돌아오라 부를 때가 먼저입니다.) 10년째 연인이지만 결혼 따윈 생각하지 않는 두 사람은 각각 최고의 범죄 재구성 전문가, 최고의 법정-범죄심리학자로 공인받은 인물들입니다. 특히 메인 주인공인 로리 무어의 캐릭터는 워낙 독특해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어린 시절에 겪은 지독한 자폐, 강박, 편집증은 30대 중후반에 이른 지금까지도 그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며 악수 같은 간단한 스킨십조차 거부하는 그녀는 언제나 자신만의 갑옷 차림 - 두꺼운 뿔테안경, 이마까지 내려쓴 비니, 턱 밑까지 단추를 채운 회색 코트, 전투적 분위기를 내뿜는 컴뱃 부츠 으로 세상과 마주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불행했던 유년의 상처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게 엄청난 집중력과 정보 분석력, 그리고 사건을 재구성해 진실을 캐내는 힘의 원천이 돼줬습니다. 전직 FBI 프로파일러이자 범죄심리학자인 연인 레인과의 협업 외엔 오롯이 홀로 모든 작업을 진행하는 로리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보기에는 산발적이고 상관없는 것들을 연결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카고경찰서 살인전담반장 론 데이비슨이 그 누구의 간섭도 거부하는 천방지축로리를 내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품는 이유는 바로 이런 발군의 재능과 이미 수차례 입증된 뛰어난 실적 때문입니다.

 

어둠이 돌아오라 부를 때는 여러 면에서 수어사이드 하우스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각기 다른 사연을 지닌 비극들이 우연처럼 또는 운명적으로 한꺼번에 충돌하며 사건들을 빚어낸다는 점, 또 등장인물, 시공간, 사건 모두 다소 복잡하게 설정돼있어서 독자에게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특히 어지간한 스릴러 작가라면 못 해도 600페이지 안팎의 분량을 쏟아내고도 남을 소재와 서사를 400페이지 미만의 분량에 욱여넣은 탓에이야기는 단 한 줄도 설렁설렁 넘길 수 없게끔 정교하고 빽빽하게 구축돼있습니다. 물론 그만큼 스릴감도 대단하고 재미나 반전 역시 매력이 철철 넘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1979년 시카고를 공포에 빠뜨린 20대 여성 연쇄실종사건에 집착하는 자폐증 환자 앤절러의 이야기와 함께 40년 후인 2019, 살인범 도적의 가석방 절차를 떠맡게 된 로리의 이야기가 교차로 전개됩니다. 뭐든 한 번 꽂히면 통제불능 수준에 빠지고 마는 집착 덕분에 연쇄실종사건의 결정적 단서를 확보하는 앤젤러의 이야기가 심리-호러-범죄 스릴러를 골고루 겸비한 서사라면, 아버지가 남긴 자료를 바탕으로 40년 전의 진실을 추적하는 로리의 이야기는 범죄의 재구성이라는 미스터리의 힘을 발산합니다. 과연 앤절라는 40년 전 제대로 된 진실을 파헤친 것인지, 그렇다면 성실한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왜 도적을 감싸온 것인지, ‘도적은 정말 가석방될 만큼 죄를 뉘우친 것인지 등이 로리에게 주어진 감당하기 어려운 숙제들입니다.

 

짧게는 1~2페이지, 길어도 10페이지 남짓하게 짧게 끊어진 챕터들은 안 그래도 빠른 속도감을 몇 배는 더 가속시켰는데, 덕분에 화장실 갈 틈도 없이 한 번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론 수어사이드 하우스보다 재미와 힘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라 느껴졌는데, 특히 여러 주인공 중 한 자리 정도를 차지하는데 불과해서 그 존재감이 미미했던 수어사이드 하우스와 달리 거의 원맨쇼에 가까운 폭주를 보여준 로리는 그녀 자신의 캐릭터뿐 아니라 작품 전체를 빛나게 한 일등공신이라는 생각입니다.

 

2021년에만 한국에 두 편의 작품이 소개된 찰리 돈리는 이제 막 중견으로 발돋움하려는 단계의 작가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존을 검색해보면 ‘Summit Lake’, ‘The Girl Who Was Taken’, ‘Don't Believe It’, ‘Twenty Years Later’ 등의 작품이 나오는데, 대부분 로리와 레인이 등장하진 않는 것 같지만, 그와 관계없이 가능하다면 원작 출간순서대로, 그게 어렵다면 뒤죽박죽이라도 좋으니 2022년에도 그의 작품을 꼭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찰리 돈리의 매력적인 스릴러라면 언제든지 환영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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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의 무덤 모중석 스릴러 클럽 50
로버트 두고니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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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워싱턴 주의 소도시 시더 그로브에서 18살 세라가 실종된 직후 인근에 사는 성범죄 전과자 에드먼드가 체포됩니다. 세라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에드먼드는 정황증거만으로 1급 살인죄와 무기징역을 선고받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어느 날, 세라의 유골이 발견되자 동생의 실종 이후 한시도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시애틀경찰국 강력계 형사 트레이시 크로스화이트는 그동안 자신이 품어왔던 의심이 사실이라고 확신하며 주위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라의 죽음의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20년 전 빈약했던 정황증거와 석연치 않은 법정공방 끝에 에드먼드의 유죄를 이끌어낸 건 다름 아닌 트레이시 자매의 아버지, 시더 그로브의 보안관, 그리고 검사와 변호사 등이었는데, 트레이시의 눈에는 그들이 뭔가를 감추고 있으며 어쩌면 진범은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겨왔기 때문입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 내 동생의 무덤은 다채로운 장르가 잘 버무려진 스릴러입니다. 20년 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치열한 미스터리+법정 스릴러이자 시애틀경찰국 최초의 여성 강력계 형사의 거침없는 활약을 그린 형사물이며, 동생을 잃고 가족이 붕괴된 뒤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려온 평범한 한 여성의 비극을 그린 가족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세라의 죽음의 진실을 찾으려는 트레이시의 여정은 가시밭길 그 자체입니다. 무엇보다 그녀의 첫 과제가 20년 전 아버지와 보안관을 비롯한 모든 사법기관이 범인으로 지목한 잔혹한 성범죄 전과자 에드먼드가 무죄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는 점 때문인데, 그로 인해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 시더 그로브 사람들은 트레이시에게 차갑고 냉정한 시선만 보낼 뿐이며, 당시 수사를 맡았던 노회한 보안관 캘러웨이는 노골적으로 트레이시의 행보를 막아섭니다. 더불어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트레이시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시애틀경찰국 수사국장의 압박까지 더해져 트레이시의 운신의 폭은 극도로 불리한 지경에 처합니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트레이시의 지원군이 돼준 건 어린 시절 친구이자 지금은 변호사가 된 댄 올리리입니다. 그녀의 의심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댄은 당시 에드먼드를 유죄로 몰아간 자들의 행동과 법정에서 거론된 증거들을 재조사한 뒤 공식적인 재심 절차에 돌입합니다.

 

동생의 죽음의 진실을 찾기 위해 아버지를 비롯하여 자신과 친밀했던 사람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또 진범을 찾기 위해 잔혹한 성범죄 전과자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만에 하나, 성범죄 전과자만 풀어준 채 아무런 진실도 얻지 못할 수 있다는 최악의 가능성 등 피를 말리는 재조사에 있어서 트레이시에게 긍정적인 요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트레이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20년 전의 진실을 향해 오로지 돌직구처럼 달려들 뿐입니다. 때론 운이 따르기도 하지만 대부분 예리한 추리와 성실한 발품으로 성과를 얻어내는 트레이시의 행보는 독자의 눈길을 한시도 다른 곳으로 향하지 못하게 만드는 매력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모든 것이 밝혀지는 중후반부의 반전의 대목은 전혀 새로운 전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놀라움과 함께 마음 한쪽을 서늘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반전은 트레이시가 오랫동안 참아왔던 격한 감정을 일시에 터지게 만들고 맙니다.

 

이런 구도 덕분에 독자는 마지막 장까지 숨 가쁘게 가속만 반복하는 롤러코스터에 탄 기분을 만끽하게 되는데, 범죄스릴러와 법정스릴러가 절묘하게 결합된 이야기는 한때 그 분야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존 그리샴을 떠올리게 했고, 그중에서도 (줄거리는 가물가물하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펠리컨 브리프의뢰인의 감흥을 기억나게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이 2014년에 출간된 점, 또 이후 현지에서 트레이시 크로스화이트 시리즈8편까지 나온 점을 감안하면 왜 이제야 한국에 소개됐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다행인 건 (개인적인 바람이기도 하지만) 시애틀경찰국 최초의 여성 강력계 형사로서 마초들 틈바구니에서도 절대 기죽지 않는 열혈 캐릭터 트레이시의 맹활약을 접할 기회가 많이 남아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대도시 시애틀을 무대로 강력범죄와 치열한 전쟁을 벌일 트레이시의 모습이 더 기대되는데, 그 기대대로 머잖아 후속작들이 연이어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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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키스 스토리콜렉터 98
아나 그루에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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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피오르 해안에 자리한 소도시 크리스티안순에서 IT기업 인턴사원의 피살체가 발견됩니다. 치밀한 계획과 지독한 증오심이 엿보이는 사건이지만 수사과장 플레밍 토르프는 좀처럼 단서를 잡지 못해 답답할 뿐입니다. 같은 시간, 한때 연적이었지만 여전히 절친으로 지내고 있는 플레밍을 도와 외국인 여성노동자 살인사건을 해결하여 대머리 탐정이란 별명과 유명세까지 얻은 광고 카피라이터 단 소메르달은 딸 라우라의 부탁으로 결혼사기를 당한 50대 여교사 우르술라를 만납니다.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정식 의뢰를 받아 사립탐정으로서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문제는 단이 구해온 결혼사기꾼의 지문이 플레밍이 맡은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지문과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플레밍은 어쩌면 외국인 여성노동자 살인사건 때처럼 단 때문에 또다시 자신과 경찰이 곤란한 지경에 빠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힙니다.

 

유다의 키스2020년 봄에 출간된 이름 없는 여자들의 뒤를 잇는 단 소메르달 시리즈두 번째 작품입니다. 전혀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아나 그루에가 덴마크 작가란 점 때문에, 즉 차갑고 잔혹한 북유럽 스릴러를 맛볼 수 있다는 기대 하나 때문에 선택했던 작품인데, 고백하자면, 아무 정보도 없이 읽다가 두 주인공의 캐릭터를 파악한 시점에서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기대했던 북유럽 스릴러의 톤과는 전혀 다른 코지 미스터리가 전개됐기 때문입니다.

단과 플레밍은 오랜 절친이지만 단의 아내 마리아네는 결혼 전까지만 해도 플레밍의 여친이었고, 이 사실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둘 사이에 앙금 아닌 앙금처럼 존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플레밍이 마리아네의 뺨에 키스를 할 때면 단의 혈압은 급격하게 상승합니다. 물론 둘 사이엔 아무 일도 없지만 말입니다. 이런 두 사람이 살인사건을 놓고 협업과 갈등을 벌이며 진실을 파헤치는 이야기가 이 시리즈의 핵심입니다.

 

이름 없는 여자들에서 두 사람은 팽팽한 갈등 끝에 각자 수사를 진행한 뒤 자신들이 획득한 정보와 추리를 공유하기로 타협한 바 있지만, ‘유다의 키스에서는 거의 단이 주도권을 쥔 채 수사과장 플레밍과 경찰을 곤혹스럽게 할 정도로 저돌적인 수사를 펼쳐나갑니다. 살짝 다혈질이지만 연륜을 자랑하는 플레밍은 자칫 사건을 망치고 범인을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는 단의 광폭행보에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본업인 광고 카피라이터만큼이나 뛰어난 수사관으로서의 을 지닌 단의 성과에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지경을 여러 차례 겪게 됩니다.

 

플레밍이 담당한 살인사건과 단이 조사하는 결혼사기사건이 우연히도 지문이라는 접점을 갖게 되면서 이야기는 코지 미스터리를 벗어나 심각한 수준으로 격상됩니다. 단이 쫓는 결혼사기꾼의 행각은 피해 여성이 한둘이 아님이 밝혀지고 그 수법도 지능적이고 정교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단순사기로 볼 수 없는 중대범죄로 규정됩니다. 또 결혼사기꾼과 살해된 IT기업 인턴사원의 배경에 엄격한 규율을 지닌 종교단체가 있음을 알아낸 단과 플레밍은 애초 예상과 달리 사건이 꽤 복잡하게 꼬여있으며 비극적인 가족사까지 연루된 사실을 깨닫습니다.

 

흥미롭게 읽었지만 별 1개를 뺀 유일한 이유 중 하나는 주인공 단의 공명심과 이기심때문입니다. 직접 찾아낸 단서와 정보가 아깝기도 하지만 처음 정식으로 의뢰받은 내 사건이란 인식 탓에 단은 어떻게든 경찰을 배제하고 자신이 피날레를 장식하고 싶은 나머지 무리한 행동을 반복합니다. 주인공이라고 해도 호기심과 욕심에 사로잡혀 수사를 망칠 수도 있는 행보를 멈추지 않는 단의 모습은 때론 민폐 캐릭터로 보일 정도로 불편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래선지 이름 없는 여자들과 달리 사건을 해결한 단에게 박수를 보낼 수만은 없었는데, 독자마다 생각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그의 공명심과 이기심때문에 비호감의 인상이 강하게 남고 말았습니다. 또 아마추어인 단의 수사에 행운이 과도하게 많이 따른 점과 막판에 밝혀진 결혼사기범의 범행 동기가 다소 억지스럽게 설명된 점 역시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설정들이라 별점을 삭감하게 된 이유입니다.

 

이 시리즈가 7편이나 출간됐고 TV시리즈로 제작되어 세 번째 시즌을 앞둔 점만 봐도 캐릭터와 스토리의 힘이 대단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는데, ‘유다의 키스는 코지 미스터리의 매력과 스릴러의 미덕이 잘 믹스된 서사도 만족스러웠고, 매끄러운 전개와 간결하고 생기 넘치는 문장들도 전작 못잖게 눈길을 끈 작품입니다. 앞서 언급한 몇몇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단 소메르달 시리즈를 한국에서 계속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유일한 바람이라면 부디 단이 더는 공명심에 사로잡혀 민폐까지 끼치며 독주하는 일만은 자제해줬으면 하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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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종료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
빈스 플린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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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스 대통령의 재선을 좌지우지할 예산안 의결을 앞두고 최측근인 비서실장 스투 개럿과 국가안보보좌관 마이크 낸스는 찬성표를 확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의원들을 압박합니다. 이상주의를 꿈꾸던 하원의원 마이클 오루크는 미국을 파탄에 빠지게 할 예산안을 지켜보며 워싱턴 정가의 탐욕과 위선에 환멸을 느낍니다. 의결일 당일,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예정된 승리에 도취돼 흥분하지만 이른 새벽에 벌어진 원로 정치인 세 명의 암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암살범들은 예산안의 전면수정과 개혁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언론을 통해 발표합니다. 오루크는 살해된 정치인들이 하나같이 기득권과 사익을 위해 농단을 부려온 자들이라 일말의 동정심도 들지 않지만, 왠지 이 충격적인 암살사건이 자신이 1년 전 만났던 누군가와 연관돼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임기종료CIA 비밀암살요원의 활약을 그린 미치 랩 시리즈의 작가 빈스 플린의 데뷔작입니다. 미치 랩이 등장하진 않지만 미치 랩 시리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어서, 개인적으론 시리즈 프리퀄을 읽는 듯한 기분 좋은 책읽기가 됐습니다. 정의로운 이상주의 정치가인 하원의원 마이클 오루크는 미치 랩 시리즈에서는 단역급 카메오 정도로만 간간이 등장할 뿐이지만, 주인공을 맡은 임기종료에서는 대단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맹활약합니다. 또한 전직 네이비실(Navy SEAL)이자 미치 랩의 영원한 동료인 스콧 콜먼을 비롯하여 CIA 국장 토머스 스탠스필드, 대 테러센터 본부장 아이린 케네디, FBI 특수요원 스킵 맥마흔, 대통령 경호요원 잭 워치 등 낯익은 인물들의 초기 모습은 그저 반가울 따름이었습니다.

 

예산안 의결을 놓고 벌어지는 정치적 갈등은 한국에서도 낯익은 모습이지만 그것이 노회한 정치인들을 향한 대량 암살로까지 번지는 설정은 다소 고개가 갸웃거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산안 의결이 현직 대통령의 재선을 가늠할 수 있는 예비선거의 성격을 띠고 있고, 예산안 자체가 탐욕스런 정치인들의 야합의 결과이며 장차 미국을 파산으로까지 이끌 수 있는 위험천만한 덫이라는 설정 때문에 큰 위화감 없이 초반부 시퀀스를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갈등의 주체들은 크게 넷입니다. 예산안 수정과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하며 연이어 암살을 자행하는 범인들, 암살범들의 메시지에 동의하면서도 살인과 폭력이 옳은 방법인지 고민에 빠지는 하원의원 오루크, 암살범들을 쫓는 FBICIA, 그리고 예산안 통과를 목전에 뒀다가 암살범들 때문에 궁지에 몰리자 위험한 음모를 꾸미는 대통령의 측근들이 그들입니다.

주로 중동 테러리스트를 주적으로 삼은 미치 랩 시리즈와 달리 내부의 적, 즉 사익과 기득권에 눈먼 탐욕스런 정치인들이 악당으로 등장하는 가운데, 민주적 절차인 투표를 통해 개혁을 이뤄야 한다는 논리와 폭력 역시 개혁을 위한 한 가지 방법이라는 논리가 팽팽하게 맞섭니다. 이 당혹스런 상황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하원의원 오루크는 숱한 고민과 갈등 끝에 전직 해병대로서의 능력을 발휘하며 야합과 이기심이 판치는 워싱턴 정가와의 전면전을 결심합니다.

 

위선으로 가득 찬 비열한 정치인들을 응징하는 스토리는 중동 테러리스트를 상대로 한 액션 스릴러 이상의 쾌감과 흥분을 발산합니다. 비록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이 합리화되는 대목은 편하게 읽히지 않았지만, ‘미치 랩 시리즈에서 이미 그 진가를 맛봤던 빈스 플린 특유의 과격한 주장과 논리는 충분히 독자를 설득하고도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사실적이고 디테일한 캐릭터의 힘이 그 주장과 논리를 탄탄히 밑받침하고 있는데, 악당들은 얄미울 정도로 똑똑한데다 몇 대 날려주고 싶을 정도로 야비했고, 암살범들의 고도의 전략과 작전수행능력은 몇 번이나 박수를 보내주고 싶을 만큼 뛰어났으며, 이상주의를 꿈꿨던 초보 정치인이 숱한 위기를 넘기면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대목들은 단순한 영웅서사 이상의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딱 한 가지, 0.5개를 빼게 만들었던 아쉬움은 다소 과해 보였던 분량입니다. 데뷔작이라 욕심을 부려서 그런지 지나치게 디테일한 묘사들이 곳곳에서 템포를 처지게 만들었는데 그런 장면들이 쌓이다 보니 평균 450~550 페이지 정도였던 미치 랩 시리즈보다 훨씬 긴 650 페이지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물론 하루 안에 너끈히 마칠 수 있을 만큼 흥미진진했지만 아주 사소한 옥의 티처럼 여겨진 게 사실입니다.

 

순서대로라면 가장 먼저 읽었어야 할 임기종료지만, 개인적으론 오히려 미치 랩 시리즈를 마친 뒤에 읽은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비록 미치 랩은 등장하지 않지만 이런 게 프리퀄의 재미!”라는 걸 잔뜩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새삼 한국에 출간되지 않은 미치 랩 시리즈가 더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적어도 빈스 플린이 생전에 직접 집필했던 작품(‘The Last Man’, 2012, ‘미치 랩 시리즈’ 13)까지만이라도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참고로 미국에서 2015년에 출간된 ‘The Survivor’부터 2021년 작 ‘Enemy at the Gates’까지는 Kyle Mills에 의해 집필된 미치 랩 시리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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