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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돌아오라 부를 때
찰리 돈리 지음, 안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11월
평점 :
공식적으로는 시카고경찰서 특수조사팀 소속이지만 실은 프리랜서나 다름없는 ‘범죄 재구성 전문가’ 로리 무어. 번아웃과 우울증 때문에 6개월 넘게 잠수를 타던 그녀는 갑작스레 사망한 변호사 아버지가 남긴 업무를 떠맡게 되는데, 그 가운데 로리를 당혹스럽게 만든 건 가석방을 코앞에 둔 일명 ‘도적’에 관한 것입니다. 40년 전 연쇄납치살인마로 지목됐지만 시신도 없고 단서도 없이 정황증거만으로 60년 형을 선고받았던 ‘도적’의 가석방은 언론마저 주목하는 사안인데, 로리로서는 아버지가 왜 그 오랜 시간동안 ‘도적’ 같은 자를 변호하며 적잖은 돈을 받아온 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도적’의 과거 자료 속에 등장하는 미지의 여인 때문에 로리는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에 빠집니다. 40년 전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인터넷과 과학수사 없이 거의 완벽한 범죄의 재구성을 이뤄내 사건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찰리 돈리가 창조한 독특한 커플 주인공 로리 무어와 레인 필립스는 이미 ‘수어사이드 하우스’(2021년 1월)를 통해 한국 독자와 만난 적이 있습니다. (원작 출간순서로는 ‘어둠이 돌아오라 부를 때’가 먼저입니다.) 10년째 연인이지만 결혼 따윈 생각하지 않는 두 사람은 각각 최고의 범죄 재구성 전문가, 최고의 법정-범죄심리학자로 공인받은 인물들입니다. 특히 메인 주인공인 로리 무어의 캐릭터는 워낙 독특해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어린 시절에 겪은 지독한 자폐, 강박, 편집증은 30대 중후반에 이른 지금까지도 그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며 악수 같은 간단한 스킨십조차 거부하는 그녀는 언제나 자신만의 갑옷 차림 - 두꺼운 뿔테안경, 이마까지 내려쓴 비니, 턱 밑까지 단추를 채운 회색 코트, 전투적 분위기를 내뿜는 컴뱃 부츠 – 으로 세상과 마주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불행했던 유년의 상처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게 엄청난 집중력과 정보 분석력, 그리고 사건을 재구성해 진실을 캐내는 힘의 원천이 돼줬습니다. 전직 FBI 프로파일러이자 범죄심리학자인 연인 레인과의 협업 외엔 오롯이 홀로 모든 작업을 진행하는 로리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보기에는 산발적이고 상관없는 것들을 연결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카고경찰서 살인전담반장 론 데이비슨이 그 누구의 간섭도 거부하는 ‘천방지축’ 로리를 내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품는 이유는 바로 이런 발군의 재능과 이미 수차례 입증된 뛰어난 실적 때문입니다.
‘어둠이 돌아오라 부를 때’는 여러 면에서 ‘수어사이드 하우스’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각기 다른 사연을 지닌 비극들이 우연처럼 또는 운명적으로 한꺼번에 충돌하며 사건들을 빚어낸다는 점, 또 등장인물, 시공간, 사건 모두 다소 복잡하게 설정돼있어서 독자에게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특히 어지간한 스릴러 작가라면 못 해도 600페이지 안팎의 분량을 쏟아내고도 남을 소재와 서사를 400페이지 미만의 분량에 ‘욱여넣은 탓에’ 이야기는 단 한 줄도 설렁설렁 넘길 수 없게끔 정교하고 빽빽하게 구축돼있습니다. 물론 그만큼 스릴감도 대단하고 재미나 반전 역시 매력이 철철 넘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1979년 시카고를 공포에 빠뜨린 20대 여성 연쇄실종사건에 집착하는 자폐증 환자 앤절러의 이야기와 함께 40년 후인 2019년, 살인범 ‘도적’의 가석방 절차를 떠맡게 된 로리의 이야기가 교차로 전개됩니다. 뭐든 한 번 꽂히면 통제불능 수준에 빠지고 마는 집착 덕분에 연쇄실종사건의 결정적 단서를 확보하는 앤젤러의 이야기가 심리-호러-범죄 스릴러를 골고루 겸비한 서사라면, 아버지가 남긴 자료를 바탕으로 40년 전의 진실을 추적하는 로리의 이야기는 ‘범죄의 재구성’이라는 미스터리의 힘을 발산합니다. 과연 앤절라는 40년 전 제대로 된 진실을 파헤친 것인지, 그렇다면 성실한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왜 ‘도적’을 감싸온 것인지, ‘도적’은 정말 가석방될 만큼 죄를 뉘우친 것인지 등이 로리에게 주어진 감당하기 어려운 숙제들입니다.
짧게는 1~2페이지, 길어도 10페이지 남짓하게 짧게 끊어진 챕터들은 안 그래도 빠른 속도감을 몇 배는 더 가속시켰는데, 덕분에 화장실 갈 틈도 없이 한 번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론 ‘수어사이드 하우스’보다 재미와 힘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라 느껴졌는데, 특히 여러 주인공 중 한 자리 정도를 차지하는데 불과해서 그 존재감이 미미했던 ‘수어사이드 하우스’와 달리 거의 원맨쇼에 가까운 폭주를 보여준 로리는 그녀 자신의 캐릭터뿐 아니라 작품 전체를 빛나게 한 일등공신이라는 생각입니다.
2021년에만 한국에 두 편의 작품이 소개된 찰리 돈리는 이제 막 중견으로 발돋움하려는 단계의 작가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존을 검색해보면 ‘Summit Lake’, ‘The Girl Who Was Taken’, ‘Don't Believe It’, ‘Twenty Years Later’ 등의 작품이 나오는데, 대부분 로리와 레인이 등장하진 않는 것 같지만, 그와 관계없이 가능하다면 원작 출간순서대로, 그게 어렵다면 뒤죽박죽이라도 좋으니 2022년에도 그의 작품을 꼭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찰리 돈리의 매력적인 스릴러라면 언제든지 환영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