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 독자
막스 세크 지음, 한정아 옮김 / 청미래 / 2021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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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헬싱키의 고급 주택가에서 베스트셀러 작가 로저 코포넨의 아내 마리아의 사체가 발견됩니다. 검은 드레스와 검은 매니큐어를 바른 채 발견된 그녀는 조커처럼 기괴하게 웃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현장 수사관들을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더더욱 놀라운 건 범행수법이 로저의 베스트셀러인 마녀사냥에 묘사된 것과 거의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이후 책 내용을 모방한 살인사건이 연이어 벌어지지만 헬싱키 경찰은 그저 우왕좌왕할 뿐입니다. 담당 형사인 제시카 니에미는 중세 마녀사냥을 연상시키는 살해수법, 일부러 정보를 흘리는 듯한 범인의 기이한 행태, 흑발의 젊은 여성이란 것 외엔 공통점이 없는 희생자 등 난해하기 짝이 없는 사건들 속에서 명백히 의심스러운 점을 발견하지만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 당혹감에 빠지고 맙니다.

 

북유럽 스릴러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핀란드 스릴러는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어서 특별히 더 관심을 가진 작품입니다. 산타클로스의 고향에 걸맞게 핀란드는 눈으로 뒤덮인 한겨울 풍경 외엔 달리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었는데, ‘모방 독자는 그 이미지 가운데 차갑고 어두운 면만 뚝 떼어내 옮겨놓은 듯 폭설, 얼음바다, 강풍 등 스산한 분위기로 가득 찬 작품입니다.

 

마녀사냥’ 3부작으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로저 코포넨의 아내 마리아를 시작으로 검은 머리의 젊은 여성들이 책 속에 묘사된 수법 그대로(혹은 비슷하게) 연이어 살해당하고, 현장에서 발견된 시신과 단서들은 하나 같이 비현실적인 기괴함 혹은 신비주의나 사탄주의의 악취를 풍기고 있어서 담당 형사 제시카 니에미를 비롯한 수사진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시신들은 (대부분) 똑같은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독살, 화형, 익사, 압사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살해돼서 도무지 범인의 동기나 희생자 선정 방식을 종잡을 수 없게 만듭니다.

사건과 함께 나란히 전개되는 이야기는 주인공 제시카의 비극적인 가족사와 15년 전에 그녀가 베네치아에서 겪은 끔찍한 악몽에 관한 것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애증 섞인 기억,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도저히 마음의 상처를 달랠 수 없었던 유년기와 청소년기, 그리고 상실의 자리를 메우고자 향했던 베네치아에서의 4개월간의 악몽 등 제시카는 유능한 강력계 형사라는 외피 속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깊고 고통스러운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속 수법을 모방한 잔혹한 연쇄살인, 중세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형이상학적 코드들(마녀사냥, 신비주의, 사탄숭배, 정신이상 등), 그리고 매력적이지만 몸과 마음이 상처로 가득한 주인공 등 눈길을 사로잡는 요소들이 포진돼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박한 평점을 준 것은 몇몇 이유 때문입니다.

우선 가장 큰 것은 막판에 밝혀진 범인의 동기입니다. 다분히 북유럽 스릴러다운 설정이긴 하지만 어느 한 곳 공감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범인의 마지막 메시지는 기괴함 외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질적인 북유럽의 문화적 충격이라도 만끽했다면 그나마 조금은 보람이 있었을 텐데 그 역시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다음으론 주인공 제시카의 캐릭터인데, 작가는 초반부터 그녀는 무척 고통스러운 과거를 지녔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밑도 끝도 없이 반복적으로 묘사되던 제시카의 고통은 뒤늦게 그녀가 6살에 겪은 가족의 해체와 15년 전에 겪은 베네치아에서의 악몽을 통해 부연설명됩니다. 제시카의 과거가 적잖은 분량을 차지한 걸 보면 그녀의 고통이 현재 벌어진 사건과 관련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에도 그녀의 고통은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연쇄살인사건 스토리와 분리된 듯 따로국밥처럼 읽힌 게 사실입니다. 없어선 안 될 설정이지만 너무 과도한 분량과 비중을 차지한 나머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납득하기 힘든 범인의 동기와 더 납득하기 힘든 주인공의 캐릭터가 접점을 이루는 클라이맥스와 엔딩이 다소 허무하게 보인 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옮긴이의 말에서 이 작품을 극찬한 번역가와 인터넷서점 서평란에 별 5개를 준 많은 독자들처럼 취향만 잘 맞는다면 모방 독자는 사건 자체나 제시카의 캐릭터, 범인의 기괴한 범행동기 등 모든 면에서 충분히 열광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소수의견일 가능성이 무척 높지만) 개인적으론 핀란드의 스산하고 지독한 한겨울의 풍경 외에는 딱히 인상적인 대목을 찾기 힘든 작품이었습니다. 가혹한 기후와 자연환경이 지배하는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에서는 이런 소재와 설정이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도, 또 대박을 위한 필수조건일 수도 있겠지만 왠지 저 같은 성향의 한국 독자에게 어필하기에는 산타클로스만큼이나 현실감이 부족해 보인다는 게 저의 지극히 주관적인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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