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종료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
빈스 플린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스티븐스 대통령의 재선을 좌지우지할 예산안 의결을 앞두고 최측근인 비서실장 스투 개럿과 국가안보보좌관 마이크 낸스는 찬성표를 확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의원들을 압박합니다. 이상주의를 꿈꾸던 하원의원 마이클 오루크는 미국을 파탄에 빠지게 할 예산안을 지켜보며 워싱턴 정가의 탐욕과 위선에 환멸을 느낍니다. 의결일 당일,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예정된 승리에 도취돼 흥분하지만 이른 새벽에 벌어진 원로 정치인 세 명의 암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암살범들은 예산안의 전면수정과 개혁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언론을 통해 발표합니다. 오루크는 살해된 정치인들이 하나같이 기득권과 사익을 위해 농단을 부려온 자들이라 일말의 동정심도 들지 않지만, 왠지 이 충격적인 암살사건이 자신이 1년 전 만났던 누군가와 연관돼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임기종료CIA 비밀암살요원의 활약을 그린 미치 랩 시리즈의 작가 빈스 플린의 데뷔작입니다. 미치 랩이 등장하진 않지만 미치 랩 시리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어서, 개인적으론 시리즈 프리퀄을 읽는 듯한 기분 좋은 책읽기가 됐습니다. 정의로운 이상주의 정치가인 하원의원 마이클 오루크는 미치 랩 시리즈에서는 단역급 카메오 정도로만 간간이 등장할 뿐이지만, 주인공을 맡은 임기종료에서는 대단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맹활약합니다. 또한 전직 네이비실(Navy SEAL)이자 미치 랩의 영원한 동료인 스콧 콜먼을 비롯하여 CIA 국장 토머스 스탠스필드, 대 테러센터 본부장 아이린 케네디, FBI 특수요원 스킵 맥마흔, 대통령 경호요원 잭 워치 등 낯익은 인물들의 초기 모습은 그저 반가울 따름이었습니다.

 

예산안 의결을 놓고 벌어지는 정치적 갈등은 한국에서도 낯익은 모습이지만 그것이 노회한 정치인들을 향한 대량 암살로까지 번지는 설정은 다소 고개가 갸웃거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산안 의결이 현직 대통령의 재선을 가늠할 수 있는 예비선거의 성격을 띠고 있고, 예산안 자체가 탐욕스런 정치인들의 야합의 결과이며 장차 미국을 파산으로까지 이끌 수 있는 위험천만한 덫이라는 설정 때문에 큰 위화감 없이 초반부 시퀀스를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갈등의 주체들은 크게 넷입니다. 예산안 수정과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하며 연이어 암살을 자행하는 범인들, 암살범들의 메시지에 동의하면서도 살인과 폭력이 옳은 방법인지 고민에 빠지는 하원의원 오루크, 암살범들을 쫓는 FBICIA, 그리고 예산안 통과를 목전에 뒀다가 암살범들 때문에 궁지에 몰리자 위험한 음모를 꾸미는 대통령의 측근들이 그들입니다.

주로 중동 테러리스트를 주적으로 삼은 미치 랩 시리즈와 달리 내부의 적, 즉 사익과 기득권에 눈먼 탐욕스런 정치인들이 악당으로 등장하는 가운데, 민주적 절차인 투표를 통해 개혁을 이뤄야 한다는 논리와 폭력 역시 개혁을 위한 한 가지 방법이라는 논리가 팽팽하게 맞섭니다. 이 당혹스런 상황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하원의원 오루크는 숱한 고민과 갈등 끝에 전직 해병대로서의 능력을 발휘하며 야합과 이기심이 판치는 워싱턴 정가와의 전면전을 결심합니다.

 

위선으로 가득 찬 비열한 정치인들을 응징하는 스토리는 중동 테러리스트를 상대로 한 액션 스릴러 이상의 쾌감과 흥분을 발산합니다. 비록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이 합리화되는 대목은 편하게 읽히지 않았지만, ‘미치 랩 시리즈에서 이미 그 진가를 맛봤던 빈스 플린 특유의 과격한 주장과 논리는 충분히 독자를 설득하고도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사실적이고 디테일한 캐릭터의 힘이 그 주장과 논리를 탄탄히 밑받침하고 있는데, 악당들은 얄미울 정도로 똑똑한데다 몇 대 날려주고 싶을 정도로 야비했고, 암살범들의 고도의 전략과 작전수행능력은 몇 번이나 박수를 보내주고 싶을 만큼 뛰어났으며, 이상주의를 꿈꿨던 초보 정치인이 숱한 위기를 넘기면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대목들은 단순한 영웅서사 이상의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딱 한 가지, 0.5개를 빼게 만들었던 아쉬움은 다소 과해 보였던 분량입니다. 데뷔작이라 욕심을 부려서 그런지 지나치게 디테일한 묘사들이 곳곳에서 템포를 처지게 만들었는데 그런 장면들이 쌓이다 보니 평균 450~550 페이지 정도였던 미치 랩 시리즈보다 훨씬 긴 650 페이지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물론 하루 안에 너끈히 마칠 수 있을 만큼 흥미진진했지만 아주 사소한 옥의 티처럼 여겨진 게 사실입니다.

 

순서대로라면 가장 먼저 읽었어야 할 임기종료지만, 개인적으론 오히려 미치 랩 시리즈를 마친 뒤에 읽은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비록 미치 랩은 등장하지 않지만 이런 게 프리퀄의 재미!”라는 걸 잔뜩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새삼 한국에 출간되지 않은 미치 랩 시리즈가 더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적어도 빈스 플린이 생전에 직접 집필했던 작품(‘The Last Man’, 2012, ‘미치 랩 시리즈’ 13)까지만이라도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참고로 미국에서 2015년에 출간된 ‘The Survivor’부터 2021년 작 ‘Enemy at the Gates’까지는 Kyle Mills에 의해 집필된 미치 랩 시리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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