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카타 돈코츠 라멘즈
키사키 치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어렵게 취업한 회사가 알고 보니 살인청부회사라는 걸 알게 된 사이토는 6개월의 훈련을 마치고 도쿄 본사에 투입되지만 큰 실수를 저질러 후쿠오카 지점으로 좌천됩니다. 그 무렵 후쿠오카는 시장 선거를 앞두고 킬러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지고 있던 시점. 3선을 노리는 현직 시장은 암흑가와의 긴밀한 유착관계를 통해 권력 기반을 다져왔고 이번 선거 역시 당선이 유력한 상황이었지만, 개망나니 아들 때문에 골치가 아픕니다. 시장에게 직속 고용된 킬러들은 선거 경호에 아들 문제까지 해결하느라 초죽음이 되는데, 이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지면서 괴짜 탐정, 어리바리한 신참 킬러, 킬러를 죽이는 킬러, 조직과 정면대결을 선언한 중국계 킬러 등 여러 인물들이 얽혀들면서 사방팔방에 피와 살이 난무하는 참상이 벌어집니다.

 

하카타 돈코츠 라멘즈는 먹방 콘텐츠 같은 제목에다 라노벨 스타일의 표지 때문에 애초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작품인데, 우연히 살인청부업자 이야기란 걸 알게 돼서 뒤늦게 찾아 읽게 됐습니다. 일본에서는 2014년부터 2021년까지 무려 10(외전 격의 단편집과 콜라보 작품은 제외)이 출간됐지만 한국엔 4(2018)까지 출간되곤 더 이상 소식이 없는데, 그래도 나름 화제성도 엿보였고, 특히 살인청부업자 이야기라면 좋아하는 소재 중 하나라서 기대감을 갖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5년 전에 후쿠오카의 하카타에 머물면서 1주일 정도 규슈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그래선지 후쿠오카 인구의 3%가 킬러라는 설정에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작가는 저자 후기를 통해 팩트가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이 작품 속의 후쿠오카는 본토 업자는 물론 해외에서 유입된 폭력조직과 살인청부업자가 경쟁적으로 살인을 벌이는 무시무시한 공간으로 설정돼있습니다.

 

킬러들의 대결과 합종연횡을 그리다 보니 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시장에게 직속 고용된 4인조 킬러, 인신매매를 주업으로 하는 중국계 신흥 조직,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모토에 따라 활동하는 복수대행업자, 그리고 어눌해 보이지만 뛰어난 정보망과 지략을 갖춘 괴짜 탐정 반바와 전혀 소질이 보이지 않는 허당 신참 킬러 사이토가 그들입니다.

서로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던 그들은 몇몇 사건이 우연과 필연을 통해 이어지면서 정면대결을 벌이게 되는데, 이 대목에서 후쿠오카의 킬러라면 누구나 들어본 적 있는 도시전설과도 같은 코로시야코로시야’(屋殺)가 등장합니다. “악행을 지나치게 저지른 킬러는 그가 처단한다.”는 소문과 함께 니와카사무라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는 탈을 쓰고 장검을 휘두르는 천하무적 킬러인데, 정작 그를 제대로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어서 더 신비감을 고조시킵니다.

 

킬러 이야기라는 속성 탓에 너무나도 쉽고 가볍게 사람들이 죽어나가서 현실감도 떨어지고 불편함이 느껴질 때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소설입니다. 각자 뚜렷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도 매력적이고, 사건도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데 충실하게 설정돼있는데, 가장 눈길을 끈 건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던 적잖은 킬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사건들을 통해 한 자리에 모이게 만든 짜임새 있는 구성입니다. 라노벨 스타일의 쉽고 단순한 문장들 때문에 전체적으로 가벼워 보일 수도 있지만 나름 빈틈없이 촘촘하게 설계된 이야기는 마지막까지 독자의 흥미를 고조시켜줍니다. 그리고 깊이 고민할 것도 없이 확실하고 통쾌하게 악을 응징하는 엔딩은 비록 주인공들 대부분이 킬러 혹은 폭력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자들이라 해도 짜릿한 쾌감을 남겨줘서 오락물로서의 미덕을 십분 발휘하고 있습니다.

 

킬러들의 이야기면서 왜 제목이 하카타 돈코츠 라멘즈일까, 궁금했는데, 그 사연은 마지막에 공개됩니다. 살인에 얽힌 위험천만한 인물들이 소박한 원 팀이 된다는 설정은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들을 기대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미끼입니다. 가끔 킬링 타임용 오락물이 생각날 때면 남은 시리즈들을 읽어볼 생각인데, OTT에 올라와있는 애니메이션 역시 기회가 되면 꼭 찾아보려고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남친의 유언장
신카와 호타테 지음, 권하영 옮김 / 북플라자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거대 제약회사의 후계자인 모리카와 에이지가 내 전 재산을 나를 죽인 범인에게 줄 것!”이라는 기묘한 유언장을 남긴 채 30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독감으로 인한 병사(病死)로 확정됐지만 회사는 유언에 따라 범인 선출전을 벌일 수밖에 없습니다. 수십억 엔이 걸린 만큼 노숙자부터 샐러리맨에 이르기까지 너도 나도 범인임을 자처하고 나서자 언론마저 관심을 갖기에 이릅니다. “돈이 최고!”라는 신조를 가진 변호사 켄모치 레이코는 학창시절 에이지와 잠깐 사귄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에이지의 친구인 시노다를 앞세워 그의 대리인 자격으로 범인 선출전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일은 갈수록 꼬이고 유언장이 사라지는가 하면 의문의 살인사건까지 벌어지자 레이코는 작심하고 에이지의 죽음의 비밀을 캐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죽인 자에게 전 재산을 주겠다는 요절한 제약회사 후계자의 유언도 파격적이지만, “돈에 미친 여자 변호사의 유산 상속 미스터리라는 홍보카피대로 이 작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28살의 뛰어난 변호사 켄모치 레이코입니다. 남친의 프로포즈 반지가 고작 40만 엔짜리라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고 걷어차는가 하면, 초대형 로펌에서 동기들 가운데 최고의 대우를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보너스 삭감을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여기곤 거침없이 사표를 집어던지기도 합니다.

 

그런 그녀가 황당해 보일 뿐인 범인 선출전에 나선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학창시절 잠시나마 에이지와 사귄 적이 있다는 인연이고, 또 하나는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에이지의 재산이 훨씬 많으며 범인으로 선출된다면 평생을 놀고먹어도 남을 만한 엄청난 성공보수를 챙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거대 제약회사가 범인 선출전을 강행하는 진짜 이유가 에이지의 유언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남긴 재산의 향방에 따라 회사 내 경영권 다툼이 좌지우지된다는 사실을 눈치 챈 레이코는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전략으로 범인 선출전에서 우위를 점합니다.

하지만 일이 묘하게 돌아가면서 레이코는 본의 아니게 에이지의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에이지의 죽음이 자살 혹은 타살일 가능성까지 제기됐고, 경영권 다툼을 벌이는 회사 사람들은 물론 에이지가 머물던 별장 인근의 인물들, 그가 사귀었던 전 여친들까지 가세하면서 유산상속전은 그야말로 복마전으로 변질됐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도 많고, 에이지의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도 전부 제각각이고, 거기다가 살인, 불륜, 야합, 출생의 비밀 등 통속극에 나올 법한 소재들이 총동원되어 이야기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전개됩니다. 에이지가 남긴 유언 자체도 황당하고, 주인공이 돈에 미친 젊은 변호사라는 설정도 기승전결 따윈 무시한 B급 코미디 설정 같아서 초반부터 계속 위화감이 들었던 게 사실인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이야기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계속 이리저리 꺾이다 보니 마치 엄청난 속도의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듯 어질어질할 따름이었습니다.

하지만 불편하고 어지러운 느낌만큼이나 도대체 어떻게 결론이 날까?”라는 기대감도 함께 들었는데, 레이코가 밝혀낸 유언장의 진실과 살인사건 미스터리는 반쯤은 박수를 보낼 만큼 깔끔하고 신통했지만, 반쯤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게 사실입니다. 어쩌면 상속, 지분, 세금 같은 용어들만 나오면 갑자기 까막눈이 되는 저의 무지함이 원인일 수도 있지만 에이지의 유언장에 담긴 진실을 모자람 없이 확실히 이해하지 못한 건 아마 저만의 경험은 아닐 거란 생각입니다. 도쿄대 법대 출신의 전직 변호사인 작가가 나름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하려 했지만 저 같은 독자에겐 역시 무리였다고 할까요?

 

이 작품은 미스터리의 미덕 외에도 돈에 미친 여자 변호사레이코가 제대로 된 변호사로 변모하는 일종의 성장소설의 매력도 갖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희대의 악녀 같지만, 실은 레이코는 변호사로서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몰랐던 탓에 엉뚱하게 돈을 추구하는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같은 인물입니다. 그런 레이코가 유산상속전을 거치며 여러 사람과 갈등하고 협력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자신이 가야할 길을 찾아낸 셈인데, 그 변신의 계기가 다소 억지스럽고 계몽적이긴 했지만 어쨌든 주인공의 성장이라는 테마도 잘 소화해낸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살짝 4차원의 향기도 나는 이 작품이 영상으로 만들어진다면 정공법보다는 B급 코믹 미스터리에 더 어울려 보이는데, 혹시라도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된다면 놓치지 않고 꼭 볼 생각입니다. 다만, 진지한 미스터리물로 각색된다면 잠시 고민하게 될 것 같긴 하지만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얼 페이스
치넨 미키토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돈만 밝히는 괴팍한 천재로 소문난 성형외과 의사 히이라기 다카유키. 마취과 의사이자 대학원생으로 히이라기 클리닉에서 일하게 된 아사기리 아스카는 럭비공 같은 히이라기의 괴벽도 괴벽이지만 아름다움을 위해 몸에 칼을 대는 성형 자체에 대한 반감도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말 못할 사정을 가진 환자들의 속내를 정확히 파악한 뒤 천재적인 실력으로 완벽한 성형을 이뤄내는 히이라기를 지켜보며 아스카는 복잡한 심정이 됩니다. 어느 날, 4년 전 미제로 남은 성형미인 연쇄살인사건과 동일한 수법의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형사들이 히이라기를 찾아오자 아스카는 깜짝 놀랍니다. 더구나 프리랜서 언론인까지 히이라기에 대한 정보를 캐기 위해 접근해오자 아스카는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론 4년 전 사건과 히이라기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가면병동’, ‘시한병동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치넨 미키토의 작품입니다. 병원에서 벌어지는 인질극과 납치극을 다룬 가면병동시한병동은 현직 의사인 작가의 지식과 장르물의 미덕이 골고루 배합된 작품들로 가이도 다케루의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에 맞먹는 웰 메이드 메디컬 미스터리였는데, ‘리얼 페이스역시 그에 못잖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미스터리 4년 전 성형미인 연쇄살인사건의 진상과 히이라기 다카유키의 비밀 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까지 작가는 여러 환자의 사례를 통해 성형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는 괴팍한 천재 히이라기와 돌직구 마취의사 아스카 사이의 충돌을 그립니다. 성형이란 그저 아름다움에만 집착하는 게 아니라 환자의 마음을 구해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 정신외과라고 주장하는 히이라기는 겉으론 돈만 밝히는 듯 보여도 환자의 사정에 진정성이 없으면 가차 없이 수술을 거부하는 독특한 인물입니다. 아내의 얼굴을 전처와 똑같이 바꿔 달라는 재벌, 신분을 바꾸기 위해 다른 얼굴을 요구하는 야쿠자, 성형수술을 거듭한 끝에 엉망이 돼버린 연예인 등 거만하고 유별난 환자들 앞에서 히이라기는 자신만의 성형 철학을 조금도 굽히지 않습니다. 물론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의 수술비를 요구하면서 말입니다.

반면, 안 그래도 성형 자체에 반감을 갖고 있던 아스카는 히이라기의 기행에 깜짝 놀라면서도 그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이 뭔지 조금씩 알아가면서 성형의 이면에 자리한 새로운 세계에 호기심을 갖게 됩니다. 합기도 유단자인 아스카는 고용주인 히이라기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태도를 보이려고 하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기도 하고, 단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맞서는 돌직구 캐릭터인데, 이 작품에서 미스터리 서사를 빼버린다면 히이라기와 아스카의 이야기는 메디컬 코미디라고 해도 좋을 만큼 유쾌하고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프롤로그와 세 차례에 걸친 막간챕터의 화자는 성형미인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입니다. 경찰은 4년 전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종적을 감춘 인물이 최근 다시 살인을 저질렀다고 보지만, 독자 입장에선 프롤로그막간을 읽어도 이 범인이 누구인지 쉽게 속단할 수 없습니다. 본의 아니게 사건에 휘말린 아스카는 단독으로 4년 전 사건과 히이라기의 비밀을 조사하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는데, 그 사실마저도 마지막 장에 이를 데까지 몇 차례의 반전을 겪기 때문에 독자와 아스카 모두 사건이 마무리될 때까지 절대 긴장감을 놓을 수 없습니다.

 

0.5개를 빼게 만든 딱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클라이맥스에서 느껴진 억지스러움입니다. 범인의 심리와 행동을 100% 정확하게 예상한 주인공은 마치 천리안 또는 관심법(觀心法)의 능력자처럼 보였는데, 예상과 한 치만 다르게 범인이 행동했더라면 모든 게 엉망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현실감도 부족해 보였고 다소 과한 억지처럼 느껴진 것도 사실입니다. 반전을 위한 설정이긴 했지만 왠지 고육지책처럼 보였다고 할까요?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본 사람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정신외과로서의 성형에 관한 이야기와 연쇄살인 미스터리가 절묘하게 조합된 데다, 병원 시트콤의 주인공 같은 히이라기와 아스카의 매력적인 캐릭터까지 가세하면서 무거움과 가벼움을 롤러코스터처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현직 의사만이 제대로 그려낼 수 있는 병원 관련 묘사들은 직접 보는 듯 생생했고, 전작들처럼 마지막까지 독자를 몰아치는 거듭된 반전도 대단했습니다. 개인적으론 히이라기-아스카 콤비가 등장하는 시리즈물이 욕심나기도 하지만, 메디컬 코미디라면 모를까 메디컬 미스터리로 확장될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 같아 그저 아쉬울 뿐입니다. 라노벨 풍의 작품들과 동물의 몸에 깃든 저승사자 이야기를 제외하면 아직 못 읽은 치넨 미키토의 작품이 두어 편 되는데, ‘리얼 페이스덕분에 조만간 허겁지겁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 마호로 역 시리즈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쿄 교외의 소도시 마호로에서 다다 심부름집을 운영하는 다다 게이스케는 어느 날 고교 동창 교텐 하루히코와 우연히 만난 뒤 내키지 않는 동업을 시작합니다. 개 산책, 정원 청소, 문짝 수리 등 네가 하면 되잖아!” 싶은 의뢰가 대부분이지만 지역 밀착형 심부름센터로서 무엇이든 맡겨주세요!”라는 경영 방침을 가진 다다 심부름집엔 가지각색의 의뢰인이 찾아옵니다. 혼자 일하는 데 익숙했던 다다는 친하기는커녕 학창시절 심각하게 미워했던 교텐과 함께 불편한 동거를 이어가는데, 거기엔 나름의 사연이 있습니다. 또 둘 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깊고 오래된 상처를 갖고 있지만 결코 서로에게 내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1년 동안 이런저런 의뢰를 함께 수행하면서 조금씩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게 됩니다.

 

미우라 시온은 따뜻하고 잔잔한 이야기를 주로 구사하기 때문에 독하고 잔인한 장르물을 좋아하는 저와는 거리가 먼 작가여야 당연하지만, 일본서점대상 수상작인 배를 엮다에 반한 뒤로 마사&’, ‘그 집에 사는 네 여자등 틈나는 대로 종종 만나오곤 했습니다. 모두 세 편으로 구성된 마호로 역 시리즈는 여러 번 제목을 들어본데다 미우라 시온의 작품이라 언젠간 꼭 읽어야지 생각해왔지만, 뒤늦게 개정판이 나오고야 읽을 기회를 잡게 됐습니다.

 

다다 심부름집에 들어오는 의뢰만 보면 가볍고 코믹한 톤의 이야기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행복과 구원에 대해 이야기’, ‘두 사람의 오묘하고 유쾌한 동거라는 홍보 카피 역시 이 작품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다와 교텐의 의뢰인들은 사소하지만 귀찮은 일거리를 들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야기 역시 팽팽한 긴장감이나 대단한 반전이 깃든 미스터리를 품고 있진 않습니다. 하지만 다다와 교텐의 동거는 유쾌하다기보다는 어딘가 묘한 불편함이 더 강하게 느껴지고, 그들의 행복과 구원은 절대 평화롭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다다와 교텐은 고교 3년 동안 같은 반이었지만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습니다. 다다 입장에선 실어증에 걸린 듯 말문을 닫았던 교텐이 못마땅했고, 교텐에게 다다는 존재감 자체가 희미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둘 사이엔 아무도 모르는 내밀한 사연이 있었고, 그 때문에 다다는 심부름집 소파를 제멋대로 차지한 교텐을 쉽게 내치지 못합니다. 다만, 두 사람은 서로의 현재의 상처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저 둘 다 이혼했고, 자식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는다는 정도만 알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10여 년 전의 고교시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돼있는 건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 두 사람이 타인들의 의뢰를 함께 수행하면서 조금씩 상대의 상처를 감지하기 시작하고, 끝내 그 상처의 실체를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생각이 너무나도 달라 몇 번의 충돌 끝에 두 사람은 파국을 맞이하기도 하지만, 뒤늦게 상대가 자신에게 행복과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귀찮고 사소한 일처럼 보였던 의뢰는 간혹 의외의 상황을 촉발시키곤 합니다. 살인, 마약, 폭력, 출생의 비밀 등 예기치 못한 사태들이 끼어들면서 다다와 교텐은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할 때가 있는데, 그 덕분에 마호로 경찰서 형사의 집요한 관심을 사기도 합니다. 또 마호로 역 뒷골목의 매춘부, 새파랗게 젊은 조폭 보스, 부모가 없으면 좋겠다는 당돌한 초등학생, 살인을 저지른 친구를 비호하는 여고생 등 강렬한 캐릭터의 조연들이 등장하여 이야기가 느슨해질 만하면 때맞춰 긴장감을 일으키곤 합니다. 물론 이들은 알게 모르게 다다와 교텐 사이의 멀고도 깊은 골을 조금씩 좁혀주는 역할을 맡는데, 이 매력적인 조연들이 이어지는 시리즈 후속편에서도 그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미우라 시온의 작품이니만큼 씁쓸한 비극으로 마무리되지 않을 거란 건 익히 예상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다다와 교텐이 자신의 행복과 구원을 깨닫는, 그래서 상처는 언젠가 회복된다.”는 걸 받아들이는 과정이 다소 쉽고 안이해 보였던 건 무척 아쉬웠습니다. 나름 큰 고비와 갈등을 겪은 뒤에 얻은 깨달음이긴 하지만, 그 고비와 갈등이 조금만 더 세고 길게 그려졌더라면 다다와 교텐의 해피엔딩이 훨씬 더 짙은 여운을 남겨줬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은 나오키상을 수상했고, 후속작인 마호로 역 번지 없는 땅TV드라마로, ‘마호로 역 광시곡은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극성(劇性)만 놓고 보면 후속작들이 더 강렬하다는 반증일 수도 있는데, 기대보다 약간은 밋밋하게 읽힌 시리즈 첫 편 때문인지 언제쯤 다다와 교텐의 다음 이야기를 읽게 될지는 장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직 읽지 못한 미우라 시온의 작품은 늘 관심권 안에 두고 지켜보겠지만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죄의 여름
후카미도리 노와키 지음, 추지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차 대전 직후인 19457, 패전 이후 연합군과 소련의 통치 하에 놓인 독일 베를린에서 유력인사 크리스토프가 독극물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해당 지역을 관할하던 소련군은 전쟁 중 크리스토프에게 은신처를 제공받았던 17살 소녀 아우구스테 니켈을 용의자로 검거합니다. 알리바이도 확실하고 살해동기도 찾을 수 없었지만 소련군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으며 그녀에게 또 다른 용의자 에리히의 거처를 알아내라는 이상한 지시를 내립니다. 그는 살해된 크리스토프가 입양했던 친조카로 어릴 적 알 수 없는 이유로 도망을 쳐 다른 사람의 양자가 된 인물입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끔찍한 참화가 그치지 않는 베를린에서 에리히를 찾기 위한 아우구스테의 이틀간의 여정은 지옥 그 자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2017년 출간된 전쟁터의 요리사들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난 후카미도리 노와키의 작품입니다. 일본작가의 작품인데도 둘 다 일본인은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데다 2차 대전을 배경으로 삼은 전쟁 미스터리라는 점도 눈길을 끌지만, 글쓴이가 그 시대를 경험했던 노회한 중진이 아니라 30대 여성이란 점 때문에 더더욱 놀라게 됩니다.

 

전쟁터의 요리사들가혹한 전장에서 조리병들이 선사하는 일상 미스터리였다면 무죄의 여름은 전쟁이 빚어낼 수 있는 온갖 비극을 정면으로 그려낸 묵직하고 심도 깊은 작품입니다. 미스터리로 분류되긴 해도 역사소설에 더 가깝게 읽힐 정도로 작가는 2차 대전 전후의 독일의 광기 어린 혼란상을 디테일하게 그립니다. 1차 대전 패전 후의 갈등, 히틀러와 나치의 발흥,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전쟁과 인종청소, 그리고 나치의 폭압에서 벗어났지만 패전 후 연합군과 소련군의 만행에 시달리는 베를린의 참상을 생생한 영상처럼 만날 수 있습니다.

 

사상범으로 몰린 끝에 죽음에 이른 아버지와 독극물로 자결한 어머니,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리다가 허무하게 세상을 뜬 동생 등 아우구스테에게 전쟁은 잔혹한 시련을 안겨줬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도 폭력, 차별, 희롱, 생활고 등 그녀의 비극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 와중에도 어릴 때부터 공부한 영어 덕분에 미군 식당에서 가까스로 일자리를 얻지만 이내 크리스토프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되어 또다시 지옥불과도 같은 날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야기의 뼈대는 소련군의 지시를 받고 배우 출신 도둑인 카프카와 함께 유력 용의자 에리히를 찾아 나선 아우구스테의 이틀간의 여정입니다. 폐허로 변한 도시들과 절망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끔찍했지만 야차 같은 점령군은 물론 혼란을 틈타 날뛰는 떼강도, 나치의 만행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등 아우구스테 앞에 나타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전쟁 이상의 공포를 안겨주며 수시로 목숨을 위협합니다. 이틀의 여정이 마무리될 무렵, 아우구스테는 절체절명의 위기와 함께 크리스토프 살인사건의 잔혹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막판 반전을 품은 살인사건 미스터리이긴 해도 앞서 언급한대로 무죄의 여름은 전쟁 전후 독일의 혼란과 그 당시를 살아가야 했던 여러 개인들의 비극이 더욱 강조된 역사소설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미스터리 자체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분량도 만만치 않은데다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세밀하고 반복적인 전쟁 서사가 다소 버겁거나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테의 고통스러운 이틀간의 여정이 마무리될 무렵엔 작가가 의도한 전쟁 미스터리의 참맛을 만끽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작가가 특별히 요청했다는 한국어판의 서문 - “(일본 역시) 독일과 마찬가지로 침략과 학살을 자행했던 나라임을 기억하라는 뜻도 이 글에 담았습니다.” - 의 묵직한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습니다.

 

쉽게 읽어내기 힘든 이야기지만 그래서 반드시 마지막 장까지 읽어야만 될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에 대한 욕심을 조금만 덜어내고 아우구스테의 여정을 끝까지 지켜본다면 기대 이상의 여운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지옥이 돼버린 소녀 아우구스테의 절규가 절절하게 피부에 와 닿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적이여, 이 도시를 불태워. 내게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을 빼앗은 이 나라를 태우고, 모두를 죽음으로 내몬 나를 그 불길로 태워 없애줘.” (p516~5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