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친의 유언장
신카와 호타테 지음, 권하영 옮김 / 북플라자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거대 제약회사의 후계자인 모리카와 에이지가 내 전 재산을 나를 죽인 범인에게 줄 것!”이라는 기묘한 유언장을 남긴 채 30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독감으로 인한 병사(病死)로 확정됐지만 회사는 유언에 따라 범인 선출전을 벌일 수밖에 없습니다. 수십억 엔이 걸린 만큼 노숙자부터 샐러리맨에 이르기까지 너도 나도 범인임을 자처하고 나서자 언론마저 관심을 갖기에 이릅니다. “돈이 최고!”라는 신조를 가진 변호사 켄모치 레이코는 학창시절 에이지와 잠깐 사귄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에이지의 친구인 시노다를 앞세워 그의 대리인 자격으로 범인 선출전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일은 갈수록 꼬이고 유언장이 사라지는가 하면 의문의 살인사건까지 벌어지자 레이코는 작심하고 에이지의 죽음의 비밀을 캐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죽인 자에게 전 재산을 주겠다는 요절한 제약회사 후계자의 유언도 파격적이지만, “돈에 미친 여자 변호사의 유산 상속 미스터리라는 홍보카피대로 이 작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28살의 뛰어난 변호사 켄모치 레이코입니다. 남친의 프로포즈 반지가 고작 40만 엔짜리라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고 걷어차는가 하면, 초대형 로펌에서 동기들 가운데 최고의 대우를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보너스 삭감을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여기곤 거침없이 사표를 집어던지기도 합니다.

 

그런 그녀가 황당해 보일 뿐인 범인 선출전에 나선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학창시절 잠시나마 에이지와 사귄 적이 있다는 인연이고, 또 하나는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에이지의 재산이 훨씬 많으며 범인으로 선출된다면 평생을 놀고먹어도 남을 만한 엄청난 성공보수를 챙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거대 제약회사가 범인 선출전을 강행하는 진짜 이유가 에이지의 유언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남긴 재산의 향방에 따라 회사 내 경영권 다툼이 좌지우지된다는 사실을 눈치 챈 레이코는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전략으로 범인 선출전에서 우위를 점합니다.

하지만 일이 묘하게 돌아가면서 레이코는 본의 아니게 에이지의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에이지의 죽음이 자살 혹은 타살일 가능성까지 제기됐고, 경영권 다툼을 벌이는 회사 사람들은 물론 에이지가 머물던 별장 인근의 인물들, 그가 사귀었던 전 여친들까지 가세하면서 유산상속전은 그야말로 복마전으로 변질됐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도 많고, 에이지의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도 전부 제각각이고, 거기다가 살인, 불륜, 야합, 출생의 비밀 등 통속극에 나올 법한 소재들이 총동원되어 이야기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전개됩니다. 에이지가 남긴 유언 자체도 황당하고, 주인공이 돈에 미친 젊은 변호사라는 설정도 기승전결 따윈 무시한 B급 코미디 설정 같아서 초반부터 계속 위화감이 들었던 게 사실인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이야기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계속 이리저리 꺾이다 보니 마치 엄청난 속도의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듯 어질어질할 따름이었습니다.

하지만 불편하고 어지러운 느낌만큼이나 도대체 어떻게 결론이 날까?”라는 기대감도 함께 들었는데, 레이코가 밝혀낸 유언장의 진실과 살인사건 미스터리는 반쯤은 박수를 보낼 만큼 깔끔하고 신통했지만, 반쯤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게 사실입니다. 어쩌면 상속, 지분, 세금 같은 용어들만 나오면 갑자기 까막눈이 되는 저의 무지함이 원인일 수도 있지만 에이지의 유언장에 담긴 진실을 모자람 없이 확실히 이해하지 못한 건 아마 저만의 경험은 아닐 거란 생각입니다. 도쿄대 법대 출신의 전직 변호사인 작가가 나름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하려 했지만 저 같은 독자에겐 역시 무리였다고 할까요?

 

이 작품은 미스터리의 미덕 외에도 돈에 미친 여자 변호사레이코가 제대로 된 변호사로 변모하는 일종의 성장소설의 매력도 갖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희대의 악녀 같지만, 실은 레이코는 변호사로서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몰랐던 탓에 엉뚱하게 돈을 추구하는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같은 인물입니다. 그런 레이코가 유산상속전을 거치며 여러 사람과 갈등하고 협력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자신이 가야할 길을 찾아낸 셈인데, 그 변신의 계기가 다소 억지스럽고 계몽적이긴 했지만 어쨌든 주인공의 성장이라는 테마도 잘 소화해낸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살짝 4차원의 향기도 나는 이 작품이 영상으로 만들어진다면 정공법보다는 B급 코믹 미스터리에 더 어울려 보이는데, 혹시라도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된다면 놓치지 않고 꼭 볼 생각입니다. 다만, 진지한 미스터리물로 각색된다면 잠시 고민하게 될 것 같긴 하지만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