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의 여름
후카미도리 노와키 지음, 추지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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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직후인 19457, 패전 이후 연합군과 소련의 통치 하에 놓인 독일 베를린에서 유력인사 크리스토프가 독극물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해당 지역을 관할하던 소련군은 전쟁 중 크리스토프에게 은신처를 제공받았던 17살 소녀 아우구스테 니켈을 용의자로 검거합니다. 알리바이도 확실하고 살해동기도 찾을 수 없었지만 소련군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으며 그녀에게 또 다른 용의자 에리히의 거처를 알아내라는 이상한 지시를 내립니다. 그는 살해된 크리스토프가 입양했던 친조카로 어릴 적 알 수 없는 이유로 도망을 쳐 다른 사람의 양자가 된 인물입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끔찍한 참화가 그치지 않는 베를린에서 에리히를 찾기 위한 아우구스테의 이틀간의 여정은 지옥 그 자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2017년 출간된 전쟁터의 요리사들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난 후카미도리 노와키의 작품입니다. 일본작가의 작품인데도 둘 다 일본인은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데다 2차 대전을 배경으로 삼은 전쟁 미스터리라는 점도 눈길을 끌지만, 글쓴이가 그 시대를 경험했던 노회한 중진이 아니라 30대 여성이란 점 때문에 더더욱 놀라게 됩니다.

 

전쟁터의 요리사들가혹한 전장에서 조리병들이 선사하는 일상 미스터리였다면 무죄의 여름은 전쟁이 빚어낼 수 있는 온갖 비극을 정면으로 그려낸 묵직하고 심도 깊은 작품입니다. 미스터리로 분류되긴 해도 역사소설에 더 가깝게 읽힐 정도로 작가는 2차 대전 전후의 독일의 광기 어린 혼란상을 디테일하게 그립니다. 1차 대전 패전 후의 갈등, 히틀러와 나치의 발흥,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전쟁과 인종청소, 그리고 나치의 폭압에서 벗어났지만 패전 후 연합군과 소련군의 만행에 시달리는 베를린의 참상을 생생한 영상처럼 만날 수 있습니다.

 

사상범으로 몰린 끝에 죽음에 이른 아버지와 독극물로 자결한 어머니,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리다가 허무하게 세상을 뜬 동생 등 아우구스테에게 전쟁은 잔혹한 시련을 안겨줬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도 폭력, 차별, 희롱, 생활고 등 그녀의 비극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 와중에도 어릴 때부터 공부한 영어 덕분에 미군 식당에서 가까스로 일자리를 얻지만 이내 크리스토프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되어 또다시 지옥불과도 같은 날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야기의 뼈대는 소련군의 지시를 받고 배우 출신 도둑인 카프카와 함께 유력 용의자 에리히를 찾아 나선 아우구스테의 이틀간의 여정입니다. 폐허로 변한 도시들과 절망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끔찍했지만 야차 같은 점령군은 물론 혼란을 틈타 날뛰는 떼강도, 나치의 만행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등 아우구스테 앞에 나타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전쟁 이상의 공포를 안겨주며 수시로 목숨을 위협합니다. 이틀의 여정이 마무리될 무렵, 아우구스테는 절체절명의 위기와 함께 크리스토프 살인사건의 잔혹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막판 반전을 품은 살인사건 미스터리이긴 해도 앞서 언급한대로 무죄의 여름은 전쟁 전후 독일의 혼란과 그 당시를 살아가야 했던 여러 개인들의 비극이 더욱 강조된 역사소설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미스터리 자체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분량도 만만치 않은데다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세밀하고 반복적인 전쟁 서사가 다소 버겁거나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테의 고통스러운 이틀간의 여정이 마무리될 무렵엔 작가가 의도한 전쟁 미스터리의 참맛을 만끽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작가가 특별히 요청했다는 한국어판의 서문 - “(일본 역시) 독일과 마찬가지로 침략과 학살을 자행했던 나라임을 기억하라는 뜻도 이 글에 담았습니다.” - 의 묵직한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습니다.

 

쉽게 읽어내기 힘든 이야기지만 그래서 반드시 마지막 장까지 읽어야만 될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에 대한 욕심을 조금만 덜어내고 아우구스테의 여정을 끝까지 지켜본다면 기대 이상의 여운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지옥이 돼버린 소녀 아우구스테의 절규가 절절하게 피부에 와 닿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적이여, 이 도시를 불태워. 내게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을 빼앗은 이 나라를 태우고, 모두를 죽음으로 내몬 나를 그 불길로 태워 없애줘.” (p516~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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