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박물관 붉은 박물관 시리즈 1
오야마 세이이치로 지음, 한수진 옮김 / 리드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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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시청 수사1과의 데라다 사토시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 탓에 하루아침에 좌천되고 맙니다. 그의 새 근무지는 이른바 붉은 박물관으로 불리는 경시청 부속 범죄자료관’. 미결 또는 종결된 형사사건의 증거품과 수사 서류를 보관하는 그곳은 관장 한 명과 관원 한 명이 전부인 한직 중의 한직입니다. 전임자들 대부분이 얼마 못 버티고 경찰 옷을 벗었다는 그곳에서 사토시는 언젠가 수사1과로 복귀할 각오를 다지지만, 4차원을 뛰어넘는 박물관장 히이로 사에코 덕분에 예상치도 못한 특별한 수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과거의 수사 자료에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을 느끼면 재수사!”를 선언하는 사에코가 처음엔 망상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에게 천재적인 추리능력이 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경시청 부속 범죄자료관을 무대 삼아 미결 혹은 종결된 형사사건의 증거품과 수사 서류를 통해 오랜 시간 묻혀있던 진실을 알아내거나 잘못 알려졌던 진상을 바로잡는다는 설정 자체도 흥미롭지만, ‘붉은 박물관의 진짜 미덕은 본격 미스터리와 다양한 트릭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특히 모든 단서를 독자와 공유한 상태에서 생각지도 못한 반전과 결말을 이끌어내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작가에게 여러 번 놀라게 됩니다. 오랜만에 맛본 본격과 트릭의 향연은 고전의 풍미까지 품고 있어서 더욱 진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 작품의 미덕을 몇 배는 더 흥미롭게 만드는 건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려워 보이지만 묘한 콤비 플레이를 선보이는 두 주인공입니다. 모든 수사관이 꿈꾸는 경시청 수사1과의 멤버가 됐지만 어이없는 실수 때문에 좌천의 쓴맛을 본 데라다 사토시는 사실 뛰어난 수사관으로 보기는 어려운 인물입니다. 오히려 아직 성장이 많이 필요한 초보의 티가 폴폴 풍기는데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수사를 이끄는 박물관장히이로 사에코와 잘 어울리는 것은 무척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창백한 피부와 그에 대조되는 검은 머리카락.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데다 웃는다라는 기능이 결여된 듯한 인형처럼 차가운 얼굴. 심지어 의사소통 능력마저 심각하게 부족.”이라는, 이세계 인물에 가까운 사에코의 캐릭터는 그녀의 비범한 추리능력만큼이나 독특한 개성을 자랑합니다. 경찰로서 뛰어난 스펙과 계급까지 지녔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8년째 박물관에서 근무한다는 사실도 사토시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사에코에게는 붉은 박물관에 대한 확실한 철학이 있습니다.

 

나는 이 붉은 박물관이 법망을 피해 도망치는 범인을 막아내는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궁에 빠진 사건의 증거품이 여기 오면 나는 그 사건을 한 번 더 검토하지.” (p51)

 

실제로 사에코는 새로 도착한 증거품과 수사 서류를 대할 때면 눈빛이 반짝반짝 빛납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위화감이 느껴지면 주저하지 않고 재수사!”를 선언합니다. 하지만 독자도 사토시도 사에코가 위화감을 느낀 이유를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에코가 지시하는 수사 방향도 도무지 맥락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모든 증거와 서류가 눈앞에 있는데도 뭐가 이상한 건지, 왜 이상한 건지 좀처럼 사에코를 따라가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막판에 사에코가 진상을 밝히는 대목에 이르고 나면 그제야 비로소 위화감의 정체와 이해 불가능했던 맥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사토시뿐 아니라 독자 역시 어떻게 그런 발상이 가능하지?”라는 의문과 감탄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수록된 다섯 편 모두 독특한 설정과 의외의 엔딩을 품고 있어서 마치 본격과 트릭의 뷔페를 맛보는 듯한 쾌감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수록작 중 몇 편은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책에서 느낀 매력이 얼마나 잘 녹아들었는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별 0.5개를 뺀 건 사에코의 비범한 능력이 종종 과도한 비약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괴짜 천재미타라이 기요시가 활약하는 시마다 소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꼈던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무리한 비약만큼은 아니지만, 사에코의 비범함이 살짝 현실감을 넘어서곤 했던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붉은 박물관이후 두 달 만에 후속작인 기억 속의 유괴도 한국에 소개됐습니다. 다시 한 번 본격과 트릭의 정수를 맛볼 수 있게 돼서 반갑기도 하지만, ‘붉은 박물관막판에 떡밥처럼 뿌려진 사에코의 과거 아버지와 관련 있는 듯한 - 가 공개될지도 몰라 더 기대가 됩니다. 조만간 기억 속의 유괴가 제 손에 들어올 텐데 밀린 숙제들이 있긴 하지만 아마도 도착과 함께 첫 장을 펼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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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의 파수꾼 이판사판
신카와 호타테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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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꿈을 접고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에 들어간 29살의 시로쿠마 가에데는 5년차 심사관이자 가라테 유단자라는 탄탄한 스펙을 갖고 있지만 실은 무모하고 운도 없고 한없이 인정만 많은 여린 인물입니다. 담합 사건의 참고인이 자신에게 조사받은 뒤 자살한 일로 자괴감에 빠져있던 시로쿠마에게 새로운 미션과 새로운 파트너가 주어집니다. 도치키현 S시에서 웨딩홀을 운영하는 호텔 세 곳의 담합 행위를 조사하게 된 시로쿠마는 심사관으로서의 다짐을 새롭게 하지만, 자신의 새 파트너가 된 천재고쇼부 쓰토무 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도쿄대 법학부 수석은 물론 하버드 유학까지 다녀와 모든 이의 주목을 받는 고쇼부는 예의는 물론 상대방의 감정 따윈 안중에도 없는 무뢰파이기 때문입니다. 첫 만남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한 두 사람은 조사 현장에서도 시종 충돌을 거듭합니다.

 

북스피어 대표 삼송 김사장 님의 야심작 이판사판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이기도 하지만, ‘공정의 파수꾼은 데뷔작 전남친의 유언장으로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2021) 대상을 수상한 신카와 호타테의 두 번째 작품이라 더 흥미를 갖게 됐습니다. ‘전남친의 유언장자신을 죽인 범인에게 전 재산을 주겠다.”는 파격적인 유언으로 시작된 돈에 미친 여자 변호사의 유산 상속 미스터리라고 정리할 수 있는데, 경쾌하고 롤러코스터 같은 B급 코미디 느낌까지 배어있어서 무척 재미있게 읽은 작품입니다. 그런 신카와 호타테가 일반인에겐 낯설기만 한 공정위 심사관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진정한 정의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다.”고 선언한 터라 전작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이야기가 기대됐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공정위는 뉴스에서만 간혹 접할 수 있을 뿐 일반인에게는 낯선 조직입니다. 하지만 담합, 카르텔, 하청 갑질, 독점 등 불법적이고 불공정한 경쟁을 조사한다는 면에서 보면 경찰이나 검찰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강제적인 수사권도 없고 기소권도 없다 보니 힘도 없고 목소리도 약한 조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신념은 한 무리의 우수한 사람, 강한 사람에게만 맡겨두면 안 되는 것이다. (중략) 도전과 시행착오가 쌓이고 쌓여서 경제가 돌아가고 사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야말로 경쟁이고, 우리 공정위는 경쟁을 수호하는 지킴이.”(p290)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장은 그들의 신념을 수시로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안 그래도 인간적이고 여리기만 한 시로쿠마는 나름의 정의관을 갖고 있는 5년차 중참 심사관이긴 하지만 그런 무기력 때문에 딱히 대단한 사명감 같은 걸 느끼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그런 시로쿠마가 재수 없는 사이코패스 천재고쇼부와 함께 S시의 호텔들이 자행하는 웨딩 카르텔을 무너뜨리면서 제대로 된 심사관으로 성장하는 이야기가 공정의 파수꾼의 핵심 서사입니다.

 

공정위라는 조직도 낯설지만 다루는 사건마저 지방도시의 웨딩 카르텔이라는, 다소 심심하고 소소해 보이는 설정이라 전남친의 유언장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도 잠시 주저할 것 같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로쿠마와 고쇼부는 물론 공정위의 여러 인물들이 펼쳐 보이는 그들만의 정의 구현법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묘한 호소력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어서 연쇄살인범을 잡아낸 뛰어난 형사가 구현한 정의와는 또 다른 매력을 맛보게 해줍니다. 또 뉴스 외에는 그 존재감조차 알 수 없는 공정위라는 곳이 실은 세상을 위해 참 많은 일을 하고 있구나, 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도 덤으로 만끽할 수 있습니다.

 

요즘 통 일드를 안 봐서 잘 몰랐지만 전남친의 유언장공정의 파수꾼모두 후지TV에서 방송됐다는데, 같은 원작자의 작품이 2분기 연속으로 방송된 건 처음 있는 일이랍니다. 두 작품 모두 드라마로 봐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라 조만간 찾아보려고 합니다.

편집자 후기에 따르면 이미 일본에서는 후속작인 공정의 파수꾼-내정의 왕자가 출간됐다고 합니다. 첫 편이 공정위를 소개하기 위한 전초전이었다면 후속작은 스토리와 인간관계도 복잡해지고 악당도 무척 입체적인 캐릭터가 등장한다는데, 이 작품 말미에 규슈 사무소로 전근 가게 된 시로쿠마가 꽤 큰 사건에 휘말릴 것으로 보입니다. 제 취향인 잔혹한 미스터리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시로쿠마의 두 번째 이야기를 기대해보려고 합니다.

 

사족이지만, 인터넷 서점에서는 논스톱 엔터테인먼트 법률 미스터리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론 그냥 공정위 미스터리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엔터테이먼트라는 표현 때문에 이 작품에 대해 선입견을 갖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인데, 잔혹한 사건이나 명탐정이 등장하진 않지만 마냥 오락성만 추구하는 가벼운 작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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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올빼미
누쿠이 도쿠로 지음, 최현영 옮김 / 직선과곡선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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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쿠이 도쿠로는 범죄를 저지른 자와 희생된 자 모두의 심리를 아우르며 독자를 결코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 작가” (‘미소 짓는 사람후반부에 실린 해설)

 

통곡’, ‘난반사’, ‘어리석은 자의 기록’ (구판 제목은 우행록’) 등에 이어 열 번째로 만난 누쿠이 도쿠로의 작품입니다. 3개에서 5개에 이르기까지 다소 굴곡 있는 평점을 주긴 했지만 그 어떤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와도 차별되는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늘 신작 소식을 기다리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독자를 결코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 작가라는 평처럼 그의 작품들은 매번 마지막 장을 덮을 때마다 마음을 무겁게 만들곤 합니다. 사건은 해결되지만 통쾌하거나 속이 시원해지기는커녕 애초 끔찍한 비극의 출발점이 됐던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을 새삼 자각하며 묵직한 여운과 함께 책장을 덮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종이올빼미는 네 편의 단편과 한 편의 중편으로 이뤄진 작품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한 명 죽이면 사형당하는 세계의 이야기이다.”라는 본문 첫 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수록작 모두 사형 대국이 된 일본이라는 공통된 가상의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국제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범죄를 억지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로 사형을 선택했고, 현재는 사형을 반대하면 이상한 종교에 빠졌거나 범죄자를 두둔하는 자로 취급받거나 정의를 반대하는 으로 비난받는 극단적인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형당하지 않기 위해 목숨만 빼고 피해자의 몸과 마음을 완벽하게 망가뜨린 범인(‘보지도 말고, 쓰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지어다’), 살의의 유무와 관계없이 무조건 사형이 선고되는 실태(‘새장 속의 새들’), 자살할 용기가 없는 자들이 국가에 의한 안락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일부러 사람을 죽이는 일이 되풀이되는 어이없는 비극(‘레밍의 무리’) 등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사형제도에 관한 묵직한 고찰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표제작이자 가장 긴 분량의 중편 종이올빼미는 사형제도에 관한 찬반론을 가장 정공법에 가까운 스타일로 다룬 작품으로 살해당한 연인의 감춰진 과거를 훑어가는 주인공의 고통스러운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기구한 사연이라든가 복수와 응징, 용서와 속죄 등 사형제도를 둘러싼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와 감정을 누쿠이 도쿠로 특유의 서사를 통해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동안 사형제도에 관한 논란을 그린 미스터리를 여러 편 읽었지만 사람을 한 명 죽이면 사형당하는 세계라는, 당연한 일 아닌가 싶으면서도 실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가상일뿐인 설정 때문에 종이올빼미는 무척 독특한 여운을 남긴 작품입니다. 한국에서도 사형 대신 가석방 없는 종신형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종이올빼미는 사형제도에 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합니다. 찬반을 막론하고 사형제도를 조금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다섯 편의 중단편이 많은 독자들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사족으로, 누쿠이 도쿠로를 아직 접해보지 못한 독자라면 어리석은 자의 기록’ (구판 제목은 우행록’), ‘통곡’, ‘난반사를 권하고 싶습니다. 어둡고 우울한 이야기지만 재미를 겸비한 그만의 독특한 사회파 미스터리를 만나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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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변호인
야쿠마루 가쿠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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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형사 스즈카가 남편 몰래 만나던 호스트 카노 레이지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됩니다.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 살인사건 변호는 처음인 30살의 모치즈키 린코가 스즈카의 변호인이 됩니다. 같은 법률사무소의 니시가 공동변호인으로 가세했지만 린코는 의뢰인을 함부로 대하곤 하는 니시의 태도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앞뒤가 안 맞는 진술을 거듭하는 스즈카입니다. 결국 린코와 니시는 가해자 스즈카와 피해자 카노의 관계는 물론 그들의 과거에 관해 직접 알아봐야 하는 처지에 이릅니다. 검찰이 계획된 살인을 주장하는 가운데 린코와 니시는 스즈카의 정당방위를 입증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악화될 뿐입니다.

 

2009년 한국에 처음 소개된 천사의 나이프를 읽은 이후 야쿠마루 가쿠의 팬이 되어 그동안 꽤 많은 작품들을 읽어왔습니다. ‘형사 변호인은 한국에 소개된 그의 18번째 작품으로,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첫 작품입니다. 작가 스스로도 많은 준비를 거쳐 내놓은 첫 법정미스터리라고 밝혔지만 형사 변호인은 성격도 가치관도 판이한 두 변호사 린코와 니시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행적을 조사하며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클라이맥스와 엔딩은 법정에서 이뤄지긴 하지만, 독자 입장에선 물과 기름 같으면서도 비슷한 상처를 지닌 린코와 니시가 성실하고 집요하게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 그리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변호사로서 성장하는 과정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법조인 가문에서 성장한 린코는 형사 전문 인권변호사였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피고인의 이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니시는 진실을 위해서라면 피고인에게 불리한 증거나 진술이라도 반드시 공개해야 한다.”라는, 변호사로서는 다소 파격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두 사람 모두 범죄자를 옹호한다는 이유 때문에 세간의 욕을 먹는 형사 변호사지만 지향하는 바는 전혀 다르다는 뜻입니다. 구치소에 갇힌 스즈카를 대하는 태도 역시 180도 다른데, 특히 니시는 변호사라기보다는 취조하는 경찰처럼 스즈카를 몰아붙입니다. 어르고 달래며 진술을 얻어내려는 린코와 달리 니시는 진실을 감추는 듯한 스즈카에게 조금의 동정도 없는 냉정한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팀플레이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는 린코와 니시의 차이점은 미스터리만큼이나 흥미롭게 읽히는 대목입니다.

 

반면 범죄로 인해 가까운 사람을 잃은 적이 있으며 형사 변호사가 되기까지의 지난한 과거를 지녔다는 공통점 때문에 두 사람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상대방의 가치관과 입장을 존중하기도 합니다. 또한 가까운 사람을 해친 범죄자도 변호할 수 있겠는가?”라는 고통스러운 질문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위로하기도 응원하기도 합니다. 이런 매력들 때문에 린코와 니시를 주인공으로 한 법정미스터리 시리즈가 이어지기를 바라게 됐는데, 야쿠마루 가쿠가 후속작을 내줄 지는 좀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작품이 400페이지 안팎인데 반해 형사 변호인500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작품입니다. 법정미스터리지만 막판 법정 장면은 20%에 불과하고 앞의 80%는 린코와 니시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및 과거를 파헤치는데 할애됩니다. 외양은 변호사지만 실은 형사나 다름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탐문하며 정보를 모으는 것이 린코와 니시의 주된 업무입니다. 법정미스터리가 취향이 아닌 독자라도 형사 변호인은 야쿠마루 가쿠 특유의 묵직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사회파 미스터리 서사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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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갇힌 외딴 산장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산장 3부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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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오디션에 합격한 7명의 남녀가 연출가의 지시를 받고 외딴 펜션에 모입니다. 하지만 연출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편지를 통해 “34일 동안 연극의 모든 것을 배우들 스스로 구성해보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특이한 건 펜션을 폭설로 고립된 산장으로 여기라는 것,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금지시킨 점입니다. 또한 뜻밖의 일이 벌어지더라도 연극의 일환으로 받아들이라는 애매한 부언까지 남깁니다. 어리둥절한 채 하룻밤을 보낸 일행은 충격적인 아침을 맞이합니다. 배우 한 명이 사라졌고 그 자리엔 살인을 암시하는 쪽지가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논란 끝에 연극의 일부라고 결론 내렸지만 다음 날 또 한 명이 사라지고 명백한 실제 살인의 단서가 발견되자 일행은 현실인지 연극인지 구분할 수 없는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편의상 붙인 이름이겠지만 이 작품은 하쿠바산장 살인사건’(1986, 구판 제목은 백마산장 살인사건’)가면산장 살인사건’(1990)에 이은 히가시노 게이고 산장 3부작의 한 편입니다. 일본에서 1992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클로즈드 서클’, 즉 밀실살인을 소재로 다루고 있어서 다분히 고전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고립된 산장’, ‘연이어 발견되는 시체’, ‘범인은 일행 중 한 명이라는 전형적인 공식을 따르고 있지만, 이 작품은 펜션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가 실제 벌어진 살인사건인지 연극 연습의 일환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7명의 배우는 물론 독자마저 혼란에 빠뜨린다는 점에서 나름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사건이 벌어진 직후만 해도 모두들 연극 연습이라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두 번째 사건과 함께 명백한 살인 도구가 발견되면서 큰 혼란에 빠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사건이라는 주장과 연극 연습이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면서 펜션에 모인 배우들은 공포에 휩싸입니다. 실제 사건임을 전제로 범행 동기를 캐려는 갑론을박도 벌어지지만 그 어떤 추리도 금세 모순이 드러나고 막다른 벽에 부딪힙니다. 독자 역시 배우들의 혼란을 고스란히 체감하게 되는데 동시에 현실이든 연극이든 그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왠지 김이 샐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을 피할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누구도 예측하기 힘든 독특한 해법과 엔딩을 제시합니다. ‘현실이냐 연극이냐라는 이분법적 추리를 뛰어넘는 엔딩은 독자에 따라 다소 억지스럽게 받아들일 여지가 많은 게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론 고전적이면서도 꽤 참신한 해법으로 보였습니다. ‘누가 범인?’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의외의 진실 덕분에 기분 좋은 정도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랄까요?

요약하자면, 요즘의 독자 눈높이에 어울리는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가끔 특별한 간식이 생각나듯 아날로그 냄새가 폴폴 풍기는 고전을 읽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질 때 집어 들면 딱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새삼 오래 전에 읽은 하쿠바산장 살인사건과 아직 읽지 못한 가면산장 살인사건을 읽고 싶어졌는데, 연이어 읽기보다는 특별한 간식이 생각날 때를 기다려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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