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의 파수꾼 이판사판
신카와 호타테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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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꿈을 접고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에 들어간 29살의 시로쿠마 가에데는 5년차 심사관이자 가라테 유단자라는 탄탄한 스펙을 갖고 있지만 실은 무모하고 운도 없고 한없이 인정만 많은 여린 인물입니다. 담합 사건의 참고인이 자신에게 조사받은 뒤 자살한 일로 자괴감에 빠져있던 시로쿠마에게 새로운 미션과 새로운 파트너가 주어집니다. 도치키현 S시에서 웨딩홀을 운영하는 호텔 세 곳의 담합 행위를 조사하게 된 시로쿠마는 심사관으로서의 다짐을 새롭게 하지만, 자신의 새 파트너가 된 천재고쇼부 쓰토무 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도쿄대 법학부 수석은 물론 하버드 유학까지 다녀와 모든 이의 주목을 받는 고쇼부는 예의는 물론 상대방의 감정 따윈 안중에도 없는 무뢰파이기 때문입니다. 첫 만남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한 두 사람은 조사 현장에서도 시종 충돌을 거듭합니다.

 

북스피어 대표 삼송 김사장 님의 야심작 이판사판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이기도 하지만, ‘공정의 파수꾼은 데뷔작 전남친의 유언장으로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2021) 대상을 수상한 신카와 호타테의 두 번째 작품이라 더 흥미를 갖게 됐습니다. ‘전남친의 유언장자신을 죽인 범인에게 전 재산을 주겠다.”는 파격적인 유언으로 시작된 돈에 미친 여자 변호사의 유산 상속 미스터리라고 정리할 수 있는데, 경쾌하고 롤러코스터 같은 B급 코미디 느낌까지 배어있어서 무척 재미있게 읽은 작품입니다. 그런 신카와 호타테가 일반인에겐 낯설기만 한 공정위 심사관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진정한 정의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다.”고 선언한 터라 전작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이야기가 기대됐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공정위는 뉴스에서만 간혹 접할 수 있을 뿐 일반인에게는 낯선 조직입니다. 하지만 담합, 카르텔, 하청 갑질, 독점 등 불법적이고 불공정한 경쟁을 조사한다는 면에서 보면 경찰이나 검찰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강제적인 수사권도 없고 기소권도 없다 보니 힘도 없고 목소리도 약한 조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신념은 한 무리의 우수한 사람, 강한 사람에게만 맡겨두면 안 되는 것이다. (중략) 도전과 시행착오가 쌓이고 쌓여서 경제가 돌아가고 사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야말로 경쟁이고, 우리 공정위는 경쟁을 수호하는 지킴이.”(p290)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장은 그들의 신념을 수시로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안 그래도 인간적이고 여리기만 한 시로쿠마는 나름의 정의관을 갖고 있는 5년차 중참 심사관이긴 하지만 그런 무기력 때문에 딱히 대단한 사명감 같은 걸 느끼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그런 시로쿠마가 재수 없는 사이코패스 천재고쇼부와 함께 S시의 호텔들이 자행하는 웨딩 카르텔을 무너뜨리면서 제대로 된 심사관으로 성장하는 이야기가 공정의 파수꾼의 핵심 서사입니다.

 

공정위라는 조직도 낯설지만 다루는 사건마저 지방도시의 웨딩 카르텔이라는, 다소 심심하고 소소해 보이는 설정이라 전남친의 유언장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도 잠시 주저할 것 같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로쿠마와 고쇼부는 물론 공정위의 여러 인물들이 펼쳐 보이는 그들만의 정의 구현법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묘한 호소력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어서 연쇄살인범을 잡아낸 뛰어난 형사가 구현한 정의와는 또 다른 매력을 맛보게 해줍니다. 또 뉴스 외에는 그 존재감조차 알 수 없는 공정위라는 곳이 실은 세상을 위해 참 많은 일을 하고 있구나, 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도 덤으로 만끽할 수 있습니다.

 

요즘 통 일드를 안 봐서 잘 몰랐지만 전남친의 유언장공정의 파수꾼모두 후지TV에서 방송됐다는데, 같은 원작자의 작품이 2분기 연속으로 방송된 건 처음 있는 일이랍니다. 두 작품 모두 드라마로 봐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라 조만간 찾아보려고 합니다.

편집자 후기에 따르면 이미 일본에서는 후속작인 공정의 파수꾼-내정의 왕자가 출간됐다고 합니다. 첫 편이 공정위를 소개하기 위한 전초전이었다면 후속작은 스토리와 인간관계도 복잡해지고 악당도 무척 입체적인 캐릭터가 등장한다는데, 이 작품 말미에 규슈 사무소로 전근 가게 된 시로쿠마가 꽤 큰 사건에 휘말릴 것으로 보입니다. 제 취향인 잔혹한 미스터리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시로쿠마의 두 번째 이야기를 기대해보려고 합니다.

 

사족이지만, 인터넷 서점에서는 논스톱 엔터테인먼트 법률 미스터리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론 그냥 공정위 미스터리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엔터테이먼트라는 표현 때문에 이 작품에 대해 선입견을 갖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인데, 잔혹한 사건이나 명탐정이 등장하진 않지만 마냥 오락성만 추구하는 가벼운 작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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