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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ㅣ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0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가끔씩 제목이나 표지만으로도 묘하게 끌리는 작품이 있습니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제목과 표지가 동시에 그런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검색을 해보니 나오키상 후보에도 올랐고 야마모토슈고로 상도 받은 작품이었습니다. 로맨스 판타지라는 장르는 전혀 제 취향과는 관계없는 쪽이었지만, 어쨌든 호기심과 기대를 갖고 첫 번째 수록작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네 개의 중편이 실려 있는데, 사실 장편소설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봄부터 겨울까지 계절마다 한 편씩의 에피소드가 연작처럼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건 마지막 장까지 남녀 주인공의 이름이 소개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남자의 챕터는 “~했다”로, 여자의 챕터는 “~했습니다”로 구분되며, 두 사람의 관계가 대학 클럽 선후배라는 점만 설명됩니다.
이야기 구조는 단순합니다. 선배인 ‘나’는 어느 날 후배인 ‘그녀’에게 반합니다. 하지만 무턱대고 들이대기 보다는 계속 그녀의 시야 안에 들면서 점점 관심을 끄는 작전을 택합니다. ‘나’는 무작정 성(城)의 본체를 공격하는 ‘멍청한 남자’들과 달리 성을 둘러싼 해자를 메우듯 끈질기게 그녀에게 다가가는 쪽을 택합니다. 그리고 거의 1년에 걸쳐 조금씩 그녀의 마음을 얻어내고 맙니다. 단순하고 진부한 짝사랑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작가는 기발한 문장과 특이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개성 넘치는 결과물을 내놓았습니다. 또한 로맨스 판타지라는 장르답게 비현실적인 해프닝들이 곳곳에 설정되어 있는데 그 또한 읽는 재미를 배가시켜 줍니다.
첫 에피소드는 술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녀’는 “미친 듯이 술을 마시고 밤과 어른들의 세계에 빠져들고 싶다.”는 생각에 기야마치와 본토초를 거닐면서 중요한 조연들과 첫 만남을 갖습니다. 그 사이 ‘나’는 ‘그녀’를 뒤쫓다가 생각지도 못한 사건들을 겪게 됩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시모가모 신사에서 열린 헌책 시장에 ‘그녀’가 나타날 것이라는 정보를 얻고, 하루 종일 ‘그녀’의 뒤를 쫓는 ‘나’의 이야기입니다. 이곳에서 ‘나’와 ‘그녀’의 거리가 상당히 좁혀집니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가을 대학축제에서 벌어진 일대 해프닝을 무대로 합니다. 축제의 마지막 날을 요동치게 만든 사건으로 인해 ‘나’와 ‘그녀’는 극적으로 스킨십에 이릅니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교토를 휩쓴 지독한 감기를 소재로 하는데, 우여곡절 끝에 이뤄지는 ‘나’와 ‘그녀’의 해피엔딩 이야기입니다.
읽으면서 문득문득 든 생각은, 원작 자체가 워낙 통통 튀기도 했겠지만, 그것을 전혀 어색하지 않게 옮긴 번역자의 깔끔한 솜씨에 관한 것입니다. 꽤 오래 전, ‘엽기적인 그녀’가 온라인에 처음 등장했을 때 느낄 수 있었던 파격적이고 현란한 문체, 예상 밖으로 구사된 단어들, 촌철살인에 가까운 적절한 비유와 풍자 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번역이 얼마나 지난한 작업이었을지 짐작이 됐습니다.
적재적소에 등장한 조연들도 주인공들의 이야기 못잖게 재미를 줍니다. 도도한 여장부이자 말술 캐릭터 하누키, 텐구(天狗)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유카타 사나이 히구치, 고리대금업자이자 밀주 ‘가짜 전기부랑’의 주인공 이백 할아버지, 비단잉어 사업가이면서 춘화 콜렉터인 도도 등 별나고 특이한 캐릭터들이 분위기 메이커이자 해프닝 메이커로 활약합니다. 특히 가을 축제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여러 조연들은 유쾌한 소동극을 눈앞에서 직접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입체적인 캐릭터들입니다.
다만, 이런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가장 아쉬운 점은, 에피소드가 뒤로 갈수록 로맨스보다는 판타지의 성격이 강해지면서, 조금은 ‘나’의 짝사랑 과정이 비현실적이거나 지루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또, 첫 에피소드인 표제작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느낌이 너무 강해서 뒤에 실린 이야기들이 상대적으로 덜 재미있게 느껴진 탓도 있지만, 특히 마무리 에피소드는 다소 실망스러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아무튼... 미스터리와 스릴러에 파묻혀 지내다가 얼마 전부터 편식을 피하기 위해 가끔씩 라이트한 이야기들을 섞어 읽는 중인데,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나름 충분히 제 역할을 해준 작품이었습니다. 로맨스의 재미를 위해서나, 지친 일상 속에서 휴식 겸 여유를 찾고 싶을 때 언제든지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좋은 텍스트로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