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종신검시관’, ‘64’ 이후 세 번째 만나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작품입니다. ‘종신검시관의 경우 어딘가 의뭉스러워 보이는 중년 탐정이 그려진 표지 때문에 코지 미스터리라는 선입견이 생겨 늦게 읽게 됐다면, ‘얼굴참신한 경찰 여주인공의 탄생이라는 출판사의 소개글 때문에 다소 나이브하고 달달한 이야기가 아닐까, 라는 차별에 가까운 편견 때문에 미뤄온 게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64’를 통해 요코야마 히데오의 대단한 내공을 맛보곤 나머지 작품들을 찾아 읽기로 결심했는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얼굴이 제일 먼저 손에 잡혔습니다.

 

히라노 미즈호는 D현경 본부에 속한 순사(우리로 치면 말단 순경)입니다. ‘얼굴은 미즈호가 경찰 조직 내의 성 차별과 무시를 이겨내고 한 사람의 훌륭한 경찰로 성장해나가는 이야기입니다. 5편의 수록작이 들어있는데, 모두 별개의 사건을 다룬 단편들이지만 연작의 성향이 강해서 장편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애당초 감식반에서 범인의 몽타주를 그리던, 얼굴 그림 여경이던 미즈호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다 홍보실로 좌천된 상태입니다. 수시로 여자는 안 돼!” 소리를 들으면서 가까스로 버티고 있지만, 존재감도 의욕도 찾아볼 수 없는 홍보실의 단순 업무에 거의 폭발 직전입니다. 그러다가 범죄피해자 상담센터에서 전화 응대 업무를 맡기도 하고, 고참의 출산 휴가로 공석이 된 형사부에 임시로 배치받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그림능력을 발휘하여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도 하고, 뛰어난 탐문 실력으로 범인을 잡아내기도 하고, 숨 막히는 추격전 끝에 범인의 총에 맞아 부상을 입기도 합니다. 또 동료에게 상처받기도 하지만, 상처받은 동료를 끌어안기도 합니다.

 

매번 마땅한 공적을 인정받지도 못하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해도 미즈호는 묵묵히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동시에, 미즈호가 진실을 밝혀내는 과정들은 단순히 범인 찾기에 그치지 않고 사건에 얽힌 사람들을 엄하게 응징하기도, 반대로 위로하거나 설득하기도 하면서 모두가 바라는 진정한 경찰의 길을 보여줍니다. 이런 경향은 요코야마 히데오의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데, 잔혹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간이 덜 된 음식처럼 좀 심심하고 밋밋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코야마 히데오의 가장 큰 매력은 (간이 덜 됐더라도) 인간적인 캐릭터와 따뜻한 정서와 사건 미스터리를 적절하게 배합해낸다는 점입니다. 사건의 규모나 잔혹성에만 매몰된 작품의 경우 캐릭터는 힘을 잃고, 이야기는 제 갈 길을 잃고, 결국 책을 덮는 것과 동시에 금세 기억에서 잊히고 맙니다. 반대로 인간적인 캐릭터와 정서만 너무 앞세우다 보면 사건은 단순해질 수밖에 없고 긴장감 역시 떨어지게 됩니다. 장르물로서의 덕목은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요코야마 히데오의 대단한 내공은 캐릭터와 정서와 사건이 균형을 잃지 않는다는 데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종신검시관의 구라이시, ‘64’의 미카미, ‘얼굴의 미즈호는 성격도 다르고, 맡은 일도 다르고, 성과 연령대도 제 각각입니다. 사건 역시 일상 미스터리 수준에서 잔혹한 살인이나 납치극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지만 경찰로서 그들이 지향하는 바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권위도 아니고 직위도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시민들이 기대하는 믿을만한 경찰’, 그 자체일 뿐입니다. 덕분에 단순히 미스터리의 해결 과정뿐 아니라 그들이 성장하고 치유되는 이야기에도 눈길이 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조미료 맛만 강한 자극적인 이야기보다는 심심하더라도 균형감 잡힌 이야기가 더 오래 기억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저 역시 취향은 복잡하고, 잔혹하고, 사이즈 큰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요코야마 히데오 같은 작가를 통해 가끔씩 순화교육을 받는 것도 그에 못지않은 만족감을 느낄 수 있어서 이제는 제2의 취향처럼 여기게 됐습니다. 남아있는 그의 작품들을 얼른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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