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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이틀 ㅣ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 들녘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평소 온화하고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로 많은 후배 경찰에게 존경을 받던 카지 소이치로 W현 경찰청 교육과 계장이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내를 촉탁살인한 후 자수합니다. 경찰청은 현직 경찰의 범죄라는 파장을 최대한 억누르려 하고, 검찰과 언론은 진상을 파악해내려고 동분서주합니다. 가장 큰 미스터리는 카지 소이치로가 아내를 살해한 후 자수하기까지 이틀의 공백입니다. 경찰은 카지 본인의 진술대로 “자살할만한 장소를 찾기 위해서”라고 판단하지만, 검찰과 언론은 의심을 거두지 않고 카지와 W현 경찰청을 추궁합니다. 하지만 카지는 ‘사라진 이틀’에 대해 함구할 뿐이며, 그러는 사이 경찰-검찰-법원-교도소에 이르는 약 3~4개월의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사라진 이틀’의 실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 책의 원제인 ‘半落ち’(한오치)는 용의자가 범행의 일부만 자백한 상태를 가리키는 경찰용어입니다. 일본에서 이 용어의 어감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라진 이틀’이라는 번역 제목이 훨씬 더 책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요코야마 히데오를 좋아하는 이유는 치밀한 구성, 빈틈없는 스토리, 적절한 반전 등 미스터리의 기초가 탄탄하게 잘 갖춰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그를 토대로 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묘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라진 이틀’에는 이야기의 규모에 비해 꽤 많은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각각 한 챕터씩 주인공을 맡아 사건의 흐름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진실 찾기’라는 1차적인 역할 외에도 사건의 이면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하거나, 범인의 심연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 보기도 하고, 때로는 분노하거나, 때로는 자책하고, 때로는 나약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마치 옆에서 살아 숨 쉬는 인물로 느껴질 만큼 리얼한 존재들입니다. 어렵지도 않고, 장황하지도 않은 문장으로 그 많은 캐릭터들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필력 덕분에 읽는 내내 두근거리다가, 짠해지다가, 분노하다가 결국에는 울컥하게 되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게 됐습니다.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화두 중 하나는 카지가 자수하기 직전 붓으로 쓴 ‘人間五十年’이라는 다섯 글자입니다. “인간 오십년, 천상의 하루에 비한다면 덧없는 꿈과 같구나. 한번 생을 얻은 자, 그 누가 멸하지 않으리오.”라는 하이쿠(?) ‘아츠모리’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조금 작위적인 면이 보이지만, 등장인물 상당수가 곧 나이 50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주인공 카지 소이치로(49세)를 비롯하여 카지를 담당한 W현 강력계 지도관 시키 카즈마사(48세), 카지의 진실을 밝히려는 W현 지검 검사 사세 모리오(43세), 카지의 변호사 우에무라 마나부(49세)가 그들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크건 작건 가정적인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결혼 생활 20년을 넘겼고, 자녀들은 한창 반항기를 지나고 있을 무렵입니다. 부모들은 작고했거나, 병환을 앓고 있거나 그 외 여러 가지 트러블의 원인이 될 나이입니다. 그래서인지 아내 살해범 카지 소이치로를 바라보는 동년배의 형사, 검사, 변호사의 시선은 경찰출입기자 나카오, W현 판사 후지바야시 등 30대의 그것과는 확연히 구분됩니다.
요코야마 히데오는 50이라는 나이를 ‘한 인간이 넘어야 할 가장 큰 고비’처럼 묘사합니다. 살아온 삶에 대한 회한과 분노가 동시에 일어나고, 그것이 범죄나 자살로 이어지는, 사춘기보다 수백 배의 폭발력을 지녔다고 봅니다. 더불어, 본문 중에 “최근 몇 년간, 살인범 가운데 49살이 가장 많다”라는 통계도 제시합니다. 어찌 보면 ‘사라진 이틀’은 단순한 미스터리라기보다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내를 제 손으로 죽여야 했던 성실한 49살의 현직 경찰’을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끼리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이야기, 또는 자신의 삶과 행적을 돌아보는 참회록의 비중이 더 큰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전에 대한 기대감이 충족되지 못한 것과 선명하지 못한 마무리 덕분에 왠지 후속편이 있어야 할 것 같은 아쉬움이 들긴 했지만, 요코야마 히데오의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그 정도 아쉬움은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면에서,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린 사회소설에 가깝다.”라는 번역자의 후기는 이 작품의 특징을 함축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올해 들어 가장 많이 읽은 작가가 요코야마 히데오입니다. 진작 읽었어야 할 작품들을 뒤늦게 읽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마치 맛있는 반찬을 아껴놓았다가 마지막에 먹는 기분 좋은 느낌처럼 뒤늦게 몰아 읽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매력은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