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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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해(大渡海)’라는 이름의 꿈의 사전(事典)을 기획한 아라키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정년 이전에 후계자를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그러던 중 영업부에서 근무하던 마지메 미쓰야를 추천받고, 그가 가진 언어에 대한 독특하면서 탁월한 감각을 감지합니다.

대도해(大渡海) 제작진은 교수 출신의 고문인 마쓰모토 선생, 정년 후 외부 스태프로 참여하는 아라키, 그리고 주인공 마지메 외에 철없는 한량 니시오카, 계약사원 사사키, 대도해(大渡海) 제작 13년 차에 합류한 막내 기시베 등입니다. 마지메와 니시오카, 기시베 등이 한 챕터씩 화자가 되어 기획에서 출판까지 15년이 걸린 대도해 제작의 장정을 이야기합니다. 그 속에서 마지메는 편집자로서의 고뇌와 희열, 어른으로의 성장과 연애를 겪습니다. 한때 사전 제작과는 안 맞는다고 툴툴거리던 니시오카는 마지메의 진정성에 감동받고, 계약사원 사사키는 기숙사 사감 같이 무뚝뚝하면서도 늘 편집부의 중심을 잡아줍니다. 아라키와 마쓰모토 선생은 사전에 대한 열정 하나로 살아온 인생 선배의 모습을 보여주고, 패션잡지 팀에 있던 막내 기시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전편집부의 열혈멤버가 되어갑니다.

 

배를 엮다는 일본 소설의 강점인 다양한 소재, 다양한 캐릭터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독특하고 신선한 작품입니다. 겐부쇼보 출판사 사전편집부에서 근무하는 주인공들이 대도해라는 이름의 꿈의 사전을 제작하기 위해 보낸 진정성 가득한 15년의 여정이 느리지만 진하고 깊은 맛을 풍기며 그려집니다. 이미 종이 사전이 디지털 사전에게 그 자리를 내준 지 한참이고, 그래서 새삼 한 편의 사전을 제작하는 이야기가 어떤 감흥을 줄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일본 서점대상 수상작이라는 공식적인 타이틀도 믿음직했고, 처음 만나는 작가지만 주변에서 좋은 평을 들었던 미우라 시온에 대한 기대감도 있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첫 장을 넘겼습니다.

 

이야기 자체는 극성이 그리 강하지도 않고, 긴장감이나 반전 같은 강한 양념도 찾아볼 수 없는 차분한 소품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온 마음을 다 해서 이야기 속의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전편집부라는 다분히 아날로그적인 공간과 그보다 더 아날로그적인 캐릭터들이 내뿜는 힘은 웬만큼 잘 짜인 미스터리보다 더 강한 페이지터너로 작용합니다. 그 중심에는 평범하지만 자신의 일에 모든 것을 거는 진정성이 놓여있습니다.

 

누군가는 뻔하다고, 상투적이라고,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고 보면 우리는 늘 그런 이야기에 감동받고, 울컥하고, 오래 기억하고 싶은 본능을 스스로 일깨우게 됩니다. ‘배를 엮다는 그런 상투성 위에 이제는 책꽂이에서 먼지받이로 방치된 채 언제 다시 사람 손에 의해 펼쳐질지 기약조차 할 수 없는 처지가 된 종이 사전을 얹어놓음으로써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소중한 아날로그적 감성을 자극합니다.

좀더 강하고,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것만 찾아 읽느라 무뎌질 대로 무뎌진 오감을 위해 가끔은 배를 엮다같은 꾸밈없고 티 없는 이야기를 읽는 것도 요즘처럼 불쾌하기 짝이 없는 여름을 지내기에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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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이틀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 들녘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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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온화하고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로 많은 후배 경찰에게 존경을 받던 카지 소이치로 W현 경찰청 교육과 계장이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내를 촉탁살인한 후 자수합니다. 경찰청은 현직 경찰의 범죄라는 파장을 최대한 억누르려 하고, 검찰과 언론은 진상을 파악해내려고 동분서주합니다. 가장 큰 미스터리는 카지 소이치로가 아내를 살해한 후 자수하기까지 이틀의 공백입니다. 경찰은 카지 본인의 진술대로 자살할만한 장소를 찾기 위해서라고 판단하지만, 검찰과 언론은 의심을 거두지 않고 카지와 W현 경찰청을 추궁합니다. 하지만 카지는 사라진 이틀에 대해 함구할 뿐이며, 그러는 사이 경찰-검찰-법원-교도소에 이르는 약 3~4개월의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사라진 이틀의 실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 책의 원제인 半落’(한오치)는 용의자가 범행의 일부만 자백한 상태를 가리키는 경찰용어입니다. 일본에서 이 용어의 어감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라진 이틀이라는 번역 제목이 훨씬 더 책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요코야마 히데오를 좋아하는 이유는 치밀한 구성, 빈틈없는 스토리, 적절한 반전 등 미스터리의 기초가 탄탄하게 잘 갖춰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그를 토대로 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묘사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라진 이틀에는 이야기의 규모에 비해 꽤 많은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각각 한 챕터씩 주인공을 맡아 사건의 흐름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진실 찾기라는 1차적인 역할 외에도 사건의 이면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하거나, 범인의 심연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 보기도 하고, 때로는 분노하거나, 때로는 자책하고, 때로는 나약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마치 옆에서 살아 숨 쉬는 인물로 느껴질 만큼 리얼한 존재들입니다. 어렵지도 않고, 장황하지도 않은 문장으로 그 많은 캐릭터들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필력 덕분에 읽는 내내 두근거리다가, 짠해지다가, 분노하다가 결국에는 울컥하게 되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게 됐습니다.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화두 중 하나는 카지가 자수하기 직전 붓으로 쓴 人間五十年이라는 다섯 글자입니다. “인간 오십년, 천상의 하루에 비한다면 덧없는 꿈과 같구나. 한번 생을 얻은 자, 그 누가 멸하지 않으리오.”라는 하이쿠(?) ‘아츠모리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조금 작위적인 면이 보이지만, 등장인물 상당수가 곧 나이 50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주인공 카지 소이치로(49)를 비롯하여 카지를 담당한 W현 강력계 지도관 시키 카즈마사(48), 카지의 진실을 밝히려는 W현 지검 검사 사세 모리오(43), 카지의 변호사 우에무라 마나부(49)가 그들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크건 작건 가정적인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결혼 생활 20년을 넘겼고, 자녀들은 한창 반항기를 지나고 있을 무렵입니다. 부모들은 작고했거나, 병환을 앓고 있거나 그 외 여러 가지 트러블의 원인이 될 나이입니다. 그래서인지 아내 살해범 카지 소이치로를 바라보는 동년배의 형사, 검사, 변호사의 시선은 경찰출입기자 나카오, W현 판사 후지바야시 등 30대의 그것과는 확연히 구분됩니다.

 

요코야마 히데오는 50이라는 나이를 한 인간이 넘어야 할 가장 큰 고비처럼 묘사합니다. 살아온 삶에 대한 회한과 분노가 동시에 일어나고, 그것이 범죄나 자살로 이어지는, 사춘기보다 수백 배의 폭발력을 지녔다고 봅니다. 더불어, 본문 중에 최근 몇 년간, 살인범 가운데 49살이 가장 많다라는 통계도 제시합니다. 어찌 보면 사라진 이틀은 단순한 미스터리라기보다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내를 제 손으로 죽여야 했던 성실한 49살의 현직 경찰을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끼리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이야기, 또는 자신의 삶과 행적을 돌아보는 참회록의 비중이 더 큰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전에 대한 기대감이 충족되지 못한 것과 선명하지 못한 마무리 덕분에 왠지 후속편이 있어야 할 것 같은 아쉬움이 들긴 했지만, 요코야마 히데오의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그 정도 아쉬움은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면에서,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린 사회소설에 가깝다.”라는 번역자의 후기는 이 작품의 특징을 함축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올해 들어 가장 많이 읽은 작가가 요코야마 히데오입니다. 진작 읽었어야 할 작품들을 뒤늦게 읽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마치 맛있는 반찬을 아껴놓았다가 마지막에 먹는 기분 좋은 느낌처럼 뒤늦게 몰아 읽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매력은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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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의 섬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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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사는 논픽션 작가 카츠라기 시호는 사흘 안에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정리를 부탁해.”라는 말과 함께 시키부에게 집 열쇠를 맡기고 고향으로 떠납니다. 조사 사무소를 운영하는 시키부는 소식이 끊긴 시호의 행방을 수소문 한 끝에 그녀의 고향이 규슈 북서부의 야차도라는 섬임을 알게 됩니다. 야차도는 정통 신사(神社) 체계에 편입되지 못한 채 미신으로 치부된 비운의 흑사(黑祠)가 남아있고, 주민들은 흑사에 모셔진 귀신이 초자연적 힘으로 죄인을 징벌한다고 믿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흑사를 관장하는 지배적 가문이 섬 전체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외지인인 시키부는 철저히 배척 받으며 시호의 행방에 관해 아무 도움도 못 받습니다. 겨우겨우 소소한 정보를 모아갈 무렵, 잔혹하게 살해된 여자의 시체가 발견됩니다. 하지만 주민들은 경찰에 신고하기는커녕 모든 증거를 없앤 채 진노한 신을 위로해야 한다며 풍경(風磬)과 바람개비를 내다 걸 뿐입니다. 혼란에 빠진 시키부는 섬을 지배하는 진료(神領) 가문을 의심하고, 장남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전통 때문에 빈털터리가 되어버린 가문의 아웃사이더들을 통해 섬의 비밀들을 하나씩 알아냅니다. 섬의 어두운 역사가 조금씩 드러나는 가운데, 시키부는 섬 곳곳에서 20년 가까이 적잖은 의문의 살인이 벌어진 사실까지 알아내게 됩니다.

 

제목과 표지에서 느껴지는 무겁고 음울한 분위기가 이야기 전반에 고스란히 배어있는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론 섬이라는 공간을 무척 좋아하지만, 그곳이 밀실로 포장되면 오히려 매력을 덜 느끼는 편인데, ‘흑사의 섬은 밀실이면서도 밀실의 분위기를 강요하지 않아서인지 엉뚱한 트릭에 신경 쓰기보다는 이야기 자체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 읽은 일본 미스터리 가운데 그들의 전통을 소재로 삼은 작품들이 꽤 있어서 더 이상 낯설거나 어렵게 여기지 않는 편이지만, ‘흑사의 섬은 소재 때문인지 조금은 더 깊이가 느껴진 작품입니다. 다만, 그리 상세히 묘사하지 않았어도 될 내용인데도 신사(神社)와 흑사(黑祠), 또 그들이 모시는 신에 대한 지나치게 친절한 설명 덕분에 중간쯤에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지거나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지점들이 있긴 합니다.

 

더불어, 분량에 비해 꽤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몇몇 가문의 가계도를 그려놓고 읽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인지 서평 속에 구체적인 인물이나 사건들을 나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앞뒤 맥락을 다 설명하지 않으면 뜬금없이 들릴 수밖에 없고, 다 설명하려면 그 양도 방대하거니와 스포일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꼭 필요한 부분만 정리하면, 섬을 둘러싼 어두운 과거와 현재, 거미줄처럼 얽힌 섬 주민들 간의 관계, 미신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는 다수와 그것을 편리하게 이용하려는 탐욕스러운 소수, 과거에 벌어진 것과 똑같은 형태로 벌어지는 연쇄 살인 등 페이지를 빠른 속도로 넘기게 만드는 다양한 요소들이 잘 버무려져있는 작품입니다.

 

구도는 단순해 보이지만 디테일에 있어서는 높은 집중력을 요구할 만큼 복잡한 미로나 퍼즐을 닮았습니다. 이런 스타일의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최적의 작품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일본의 전통과 문화를 다룬 미스터리에 이질감을 갖는 독자라면 쉽게 읽힐 작품은 아닙니다.

폐쇄적인 섬에 남아있는 미신숭배 문화는 그 자체로 매력적인 소재지만, 조금만 더 쉽고 간결하게 묘사됐더라면, 그래서 이야기가 오히려 사건 자체에 집중됐더라면 훨씬 더 고급스러운 미스터리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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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짓는 사람
누쿠이 도쿠로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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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딸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니토 도시미는 책이 늘어나 집이 비좁아지는 바람에... 아내와 딸이 사라지면 그만큼 책을 더 둘 수 있을 것 같아서...”라는 범행 동기 때문에 전국을 들끓게 만듭니다. 소설가인 는 관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니토에 관한 르포를 쓰기로 결심합니다. 주변 인물을 탐문하며 살인마 니토의 흔적을 찾아내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니토에 관한 험담을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너 좋고, 능력 있고, 다정다감했다는 호평뿐입니다. 그 무렵, 니토의 아내와 딸이 살해된 곳과 가까운 호수에서 예전 니토의 동료가 백골 사체로 발견되자 다시 한 번 세상은 흥분합니다. 별 다른 성과도 못 내고 의기소침해졌던 는 다시금 힘을 얻어 니토의 과거를 더 깊이 파고들어갑니다. 니토의 학창시절을 차례로 거슬러 올라가던 의 추적은 결국 니토의 유년 시절에서 충격적인 사실과 맞닥뜨립니다.

 

누쿠이 도쿠로는 범죄를 저지른 자와 희생된 자 모두의 심리를 아우르며 독자를 결코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 작가였다. ‘미소 짓는 사람은 아마 그중에서도 최대의 절망감을 안겨 줄지도 모른다.” (‘해설)

 

후반부에 실린 옮긴이의 말이나 해설을 꼼꼼히 읽는 편이 아니지만, ‘미소 짓는 사람은 제 이해력 부족 탓인지 작품이 난해해서인지 해설만 세 번을 거듭 정독해야 했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느낀 얼떨떨함이 최대의 절망감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어쨌든 일반적인 미스터리와는 전혀 다른 엔딩을 내놓고 있는데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심리학이나 철학의 범주에 더 가까운 인상을 남긴 작품이긴 합니다.

 

줄거리만 보면 전형적인 미스터리로 보이지만, ‘니토의 유년 시절의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난 이후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궤적을 그립니다. 무엇보다 내용 대부분이 에 의해 진행된 탐문 기록들로 채워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누쿠이 도쿠로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탐문 그 자체라서 그런 인상을 받게 됩니다. 또한 주인공 는 막판 반전을 겪은 후에야 탐문을 통해 많은 사실을 알게 됐지만, 역으로 많은 사실들이 가려지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는데, 바로 이 한 줄이 누쿠이 도쿠로의 작의란 점은 이 작품의 성격을 잘 대변하는 사실입니다. 어쨌든, 약간은 허무하기도 하고, 약간은 ... 그런 거였군.”이라며 스스로 위로하게 되는, 다른 말로 하면, 난해하지만 다들 명작이라고 칭하는 이야기를 읽은 느낌입니다. 좀 뜨악하긴 해도, 스포일러 없이 소개하려다 보니 이렇게 밖에 정리가 안 됩니다.

 

누쿠이 도쿠로의 작품 중에서도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릴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개인적으론 기존 작품들에 관한 호감 때문인지 조금은 자의적인 호평을 내리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해설까지 정독한 후의 느낌은, 그동안 미스터리를 읽으며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던 점들 - 주인공의 입을 빌어 작가들이 설명했던범죄 혹은 범인에 관한 틀에 박힌 정의들(억지스런 동기, 작위적인 잔혹함, 뻔한 트라우마 등) - 이 실은 얼마나 쉽고 안이하게 설정됐는지, 또 독자로서 그런 것들에 대해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던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는지를 새삼 떠올려 보게 됐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미소 짓는 사람은 누쿠이 도쿠로가 자신을 비롯한 미스터리 작가들에게, 또는 그들의 작품에 등장한 훌륭한 명탐정이나 슈퍼히어로 형사들에게 던지는 질문또는 반문일 수도 있습니다.

 

내용 자체가 쉽지 않다 보니 길지 않은 서평을 쓰는데도 꽤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그나마도 작품의 윤곽조차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애매모호한 서평이 됐지만 도리가 없는 일입니다. 누쿠이 도쿠로의 팬이라면 저처럼 어느 정도 열린 마음으로 그의 진의를 이해하려 애쓰거나 이 작품의 미덕을 찾아보려 노력하겠지만, 평소 그의 어둡고 무거운 문체와 엔딩에 비호감이었던 독자라면 해설 속 표현처럼 최대의 절망감만 느끼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미스터리 독자라면 혹시 안티 누쿠이진영에 있더라도 한번쯤은 읽어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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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랑 세계문학의 숲 32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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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상세한 줄거리가 포함된 서평입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결혼 제도에 반감을 갖고 있던 28살의 가와이 조지는 클럽의 여급으로 일하던 15살 나오미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훌륭한 여자로 키우고 싶다.”는 생각에 클럽에서 빼낸 후 동거를 시작합니다. 가와이는 나오미에게 음악과 영어를 배우게 하고,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등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제공하며 훌륭한 여자의 자질을 갖추게 만듭니다. 하지만 어느 새 주종 관계는 역전되고 맙니다. 저축이 바닥나고 월급이 빠듯해져도 가와이는 극에 달한 나오미의 사치를 다 받아줬고, 또래 남자친구들을 거침없이 집으로 불러들이는 상황도 애써 참아냅니다. 시간이 갈수록 가와이는 점점 나오미의 노예로 추락했고, 결국엔 몸과 마음을 모두 지배당하는 마조히즘에 가까운 늪에 빠집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이력을 보니 네 번이나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고, 일본인 최초로 미국 예술원 명예회원으로 선출됐을 정도로 걸출한 인물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좀 오래된(?) 작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1886년에 태어났으며 이 작품이 1920년대 중반에 쓰였다는 건 첫 페이지를 펼친 뒤에야 알게 됐습니다. ‘일본 탐미주의 문학의 상징이라는 홍보 문구 덕분에 책을 집어 들긴 했지만, 거의 90년이 지난 시점에 세계문학의 숲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새롭게 출간된 이유가 무척 궁금했습니다.

 

한 소녀를 친구로 삼아 그녀가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산다는 것은 정식으로 가정을 꾸리는 것과는 다른 각별한 재미가 있을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가와이 조지의 1인칭 서술로 이뤄진 8년의 기록은 파괴적이고 자유분방한 삶을 누린 팜므 파탈 나오미의 성장기이자, 욕망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잃어가는 가와이의 몰락기입니다. 원제인 痴人에서 痴人은 바보 또는 미치광이라고 해석되는데, 가와이는 두 가지 해석이 동시에 가능한 인물입니다. 그는 서양식 욕조에서 나오미의 몸을 닦아주며 차츰 성장해가는 그녀의 육체에 빠져듭니다. 특히 그녀의 발은 가와이에게는 페티시즘의 대상인데, 그를 바보 또는 미치광이로 만드는 중요한 상징입니다. 노골적인 성적 묘사는 거의 한 줄도 등장하지 않지만, 나오미의 몸 곳곳을 바라보는 가와이의 눈빛은 탐미주의 거장의 작품답게 집요하지만 천천히, 농밀하지만 은근하게 묘사됩니다.

나오미와의 동거가 시작된 뒤 가와이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녀의 언행에 무조건적으로 헌신합니다. 천진난만했던 10대 소녀가 시간이 흐를수록 상스러운 말과 천박한 행세에 찌든 길거리 여자로 변신할 때도, 그리하여 안하무인 여주인처럼 가와이 자신을 깔아뭉개기 시작했을 때도, 또 수많은 남자에게 거리낌없이 몸을 내맡길 때도 가와이는 채 1시간도 지속되지 못할 순간적인 분노만을 느낄 뿐 결국엔 그녀에게 굴복하고 맙니다. 말 그대로 바보이자 미치광이일 수밖에 없는 인물입니다.

 

이 작품의 배경인 1920년대의 도쿄는 서양문물의 빛과 그림자가 어지럽게 뒤엉킨 혼돈의 도시였습니다. 가와이가 나오미에게 가르쳤던 음악과 영어, 나오미가 빠져들었던 화려한 댄스홀, 퇴폐적인 프리섹스와 물질만능주의, 한 여자를 육체적으로 공유하는데 동의한 엘리트들의 문란함 등 욕망이 일그러진 형태로 자유롭게 분출되던 그곳에서 나오미를 훌륭한 여자로 키우겠다며 고군분투했던 가와이의 전근대적이고도 왜곡된 심리는 당시 문화적 충돌이 몰고 온 사회적 혼란을 잘 반영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다만, 작품 자체로만 보면 창녀에 가까운 나오미의 패륜을 수차례 목격하고도 차마 그녀를 버릴 수 없어 번번이 그녀 앞에 무릎을 꿇는 가와이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민폐 캐릭터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또 나오미의 방탕함과 가와이의 초조함 외엔 별다른 이야기가 전개되지 못한 탓에 좀더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상황까지 이어지지 못한 것은 가장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연재됐던 1920년대에는 가와이의 관능적 욕망과 마조히즘이 탐미주의라는 이름 아래 독자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겠지만, 요즘의 독자들에게 어필하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리메이크가 가능한 영상물이나 재해석이 가능한 음악과 달리 문학은 작가 스스로 손대지 않는 이상 그 오리지널리티가 그대로 이어지는 장르인 만큼 1920년대의 작품을 접할 생각이라면 어느 정도의 올드함은 감수해야 되겠지만,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미친 사랑은 그렇게 감수해야 할 올드함이 조금은 많아 보이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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