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의 섬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도쿄에 사는 논픽션 작가 카츠라기 시호는 사흘 안에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정리를 부탁해.”라는 말과 함께 시키부에게 집 열쇠를 맡기고 고향으로 떠납니다. 조사 사무소를 운영하는 시키부는 소식이 끊긴 시호의 행방을 수소문 한 끝에 그녀의 고향이 규슈 북서부의 야차도라는 섬임을 알게 됩니다. 야차도는 정통 신사(神社) 체계에 편입되지 못한 채 미신으로 치부된 비운의 흑사(黑祠)가 남아있고, 주민들은 흑사에 모셔진 귀신이 초자연적 힘으로 죄인을 징벌한다고 믿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흑사를 관장하는 지배적 가문이 섬 전체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외지인인 시키부는 철저히 배척 받으며 시호의 행방에 관해 아무 도움도 못 받습니다. 겨우겨우 소소한 정보를 모아갈 무렵, 잔혹하게 살해된 여자의 시체가 발견됩니다. 하지만 주민들은 경찰에 신고하기는커녕 모든 증거를 없앤 채 진노한 신을 위로해야 한다며 풍경(風磬)과 바람개비를 내다 걸 뿐입니다. 혼란에 빠진 시키부는 섬을 지배하는 진료(神領) 가문을 의심하고, 장남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전통 때문에 빈털터리가 되어버린 가문의 아웃사이더들을 통해 섬의 비밀들을 하나씩 알아냅니다. 섬의 어두운 역사가 조금씩 드러나는 가운데, 시키부는 섬 곳곳에서 20년 가까이 적잖은 의문의 살인이 벌어진 사실까지 알아내게 됩니다.

 

제목과 표지에서 느껴지는 무겁고 음울한 분위기가 이야기 전반에 고스란히 배어있는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론 섬이라는 공간을 무척 좋아하지만, 그곳이 밀실로 포장되면 오히려 매력을 덜 느끼는 편인데, ‘흑사의 섬은 밀실이면서도 밀실의 분위기를 강요하지 않아서인지 엉뚱한 트릭에 신경 쓰기보다는 이야기 자체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 읽은 일본 미스터리 가운데 그들의 전통을 소재로 삼은 작품들이 꽤 있어서 더 이상 낯설거나 어렵게 여기지 않는 편이지만, ‘흑사의 섬은 소재 때문인지 조금은 더 깊이가 느껴진 작품입니다. 다만, 그리 상세히 묘사하지 않았어도 될 내용인데도 신사(神社)와 흑사(黑祠), 또 그들이 모시는 신에 대한 지나치게 친절한 설명 덕분에 중간쯤에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지거나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지점들이 있긴 합니다.

 

더불어, 분량에 비해 꽤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몇몇 가문의 가계도를 그려놓고 읽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인지 서평 속에 구체적인 인물이나 사건들을 나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앞뒤 맥락을 다 설명하지 않으면 뜬금없이 들릴 수밖에 없고, 다 설명하려면 그 양도 방대하거니와 스포일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꼭 필요한 부분만 정리하면, 섬을 둘러싼 어두운 과거와 현재, 거미줄처럼 얽힌 섬 주민들 간의 관계, 미신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는 다수와 그것을 편리하게 이용하려는 탐욕스러운 소수, 과거에 벌어진 것과 똑같은 형태로 벌어지는 연쇄 살인 등 페이지를 빠른 속도로 넘기게 만드는 다양한 요소들이 잘 버무려져있는 작품입니다.

 

구도는 단순해 보이지만 디테일에 있어서는 높은 집중력을 요구할 만큼 복잡한 미로나 퍼즐을 닮았습니다. 이런 스타일의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최적의 작품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일본의 전통과 문화를 다룬 미스터리에 이질감을 갖는 독자라면 쉽게 읽힐 작품은 아닙니다.

폐쇄적인 섬에 남아있는 미신숭배 문화는 그 자체로 매력적인 소재지만, 조금만 더 쉽고 간결하게 묘사됐더라면, 그래서 이야기가 오히려 사건 자체에 집중됐더라면 훨씬 더 고급스러운 미스터리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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