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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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해(大渡海)’라는 이름의 꿈의 사전(事典)을 기획한 아라키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정년 이전에 후계자를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그러던 중 영업부에서 근무하던 마지메 미쓰야를 추천받고, 그가 가진 언어에 대한 독특하면서 탁월한 감각을 감지합니다.

대도해(大渡海) 제작진은 교수 출신의 고문인 마쓰모토 선생, 정년 후 외부 스태프로 참여하는 아라키, 그리고 주인공 마지메 외에 철없는 한량 니시오카, 계약사원 사사키, 대도해(大渡海) 제작 13년 차에 합류한 막내 기시베 등입니다. 마지메와 니시오카, 기시베 등이 한 챕터씩 화자가 되어 기획에서 출판까지 15년이 걸린 대도해 제작의 장정을 이야기합니다. 그 속에서 마지메는 편집자로서의 고뇌와 희열, 어른으로의 성장과 연애를 겪습니다. 한때 사전 제작과는 안 맞는다고 툴툴거리던 니시오카는 마지메의 진정성에 감동받고, 계약사원 사사키는 기숙사 사감 같이 무뚝뚝하면서도 늘 편집부의 중심을 잡아줍니다. 아라키와 마쓰모토 선생은 사전에 대한 열정 하나로 살아온 인생 선배의 모습을 보여주고, 패션잡지 팀에 있던 막내 기시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전편집부의 열혈멤버가 되어갑니다.

 

배를 엮다는 일본 소설의 강점인 다양한 소재, 다양한 캐릭터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독특하고 신선한 작품입니다. 겐부쇼보 출판사 사전편집부에서 근무하는 주인공들이 대도해라는 이름의 꿈의 사전을 제작하기 위해 보낸 진정성 가득한 15년의 여정이 느리지만 진하고 깊은 맛을 풍기며 그려집니다. 이미 종이 사전이 디지털 사전에게 그 자리를 내준 지 한참이고, 그래서 새삼 한 편의 사전을 제작하는 이야기가 어떤 감흥을 줄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일본 서점대상 수상작이라는 공식적인 타이틀도 믿음직했고, 처음 만나는 작가지만 주변에서 좋은 평을 들었던 미우라 시온에 대한 기대감도 있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첫 장을 넘겼습니다.

 

이야기 자체는 극성이 그리 강하지도 않고, 긴장감이나 반전 같은 강한 양념도 찾아볼 수 없는 차분한 소품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온 마음을 다 해서 이야기 속의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전편집부라는 다분히 아날로그적인 공간과 그보다 더 아날로그적인 캐릭터들이 내뿜는 힘은 웬만큼 잘 짜인 미스터리보다 더 강한 페이지터너로 작용합니다. 그 중심에는 평범하지만 자신의 일에 모든 것을 거는 진정성이 놓여있습니다.

 

누군가는 뻔하다고, 상투적이라고,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고 보면 우리는 늘 그런 이야기에 감동받고, 울컥하고, 오래 기억하고 싶은 본능을 스스로 일깨우게 됩니다. ‘배를 엮다는 그런 상투성 위에 이제는 책꽂이에서 먼지받이로 방치된 채 언제 다시 사람 손에 의해 펼쳐질지 기약조차 할 수 없는 처지가 된 종이 사전을 얹어놓음으로써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소중한 아날로그적 감성을 자극합니다.

좀더 강하고,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것만 찾아 읽느라 무뎌질 대로 무뎌진 오감을 위해 가끔은 배를 엮다같은 꾸밈없고 티 없는 이야기를 읽는 것도 요즘처럼 불쾌하기 짝이 없는 여름을 지내기에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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