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특급 하야부사 1/60초의 벽 요시키 형사 시리즈 1
시마다 소지 지음, 이연승 옮김 / 해문출판사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구조 지즈코라는 여인이 얼굴 피부가 벗겨진 채 핏물로 가득한 욕조 속에서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사건 자체도 충격적이지만, 피살 추정 시간에 침대특급 하야부사 열차에서 그녀를 목격한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사건은 미궁에 빠집니다. 요시키는 지즈코가 일하던 술집을 시작으로 집요한 탐문을 통해 나름 추리의 방향을 세우지만, 두 번째 희생자가 나타나자 망연자실해 합니다. 지즈코의 과거에 주목한 요시키는 오지나 다름없는 그녀의 고향을 찾았다가 불행하고 비극적인 가족사를 알게 됩니다. 이후 요시키는 선배 나카무라의 조언으로 침대특급 하야부사를 직접 타보게 되고, 그 여정 속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보게 됩니다.

 

점성술 살인사건이후 별 재미(?)를 못 봤던 시마다 소지의 작품을 오랜만에 집어 들었습니다. 최근작이자 화제작인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를 아직 못 읽은 상태에서 이 작품을 먼저 택한 것은 요시키 시리즈를 첫 편부터 읽고 싶은 생각에서였습니다.

 

시마다 소지의 팬이라면 그가 창조한 두 주인공 미타라이와 요시키를 비교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외모나 사건을 추적하는 방식 모두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인물들이라 저절로 비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천재과에 속하는 미타라이에 비하면 요시키는 묵직하고 집요한 돌직구 스타일입니다. 미타라이의 수사과정을 지켜보면 기상천외한 추리에 감탄하다가도 기어이 잘난 체 하는 마지막 한마디 때문에 얄미워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요시키의 탐문과 추리는 답답함을 불러일으키거나 심지어 한 대 걷어차 주고 싶을 만큼 미련스러울 뿐입니다. 그만큼 꼼꼼하고 세밀한 캐릭터라는 뜻인데,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면 지름길을 곁에 두고도 기어이 먼 길을 돌아갈 것을 택하는 것이 요시키의 수사법입니다.

 

요시키의 캐릭터와 함께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열차 여행에 관한 내용입니다. 침대특급 하야부사는 말할 것도 없고, 지즈코의 고향을 찾는 요시키의 오지 열차 여행 역시 영상이 저절로 그려질 정도로 매력적인 장면들입니다. 일본의 철도 시스템이 거미줄처럼 복잡하면서도 오지 곳곳까지 뻗어있고, 도시락이나 온천, 유적지 등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은 잘 알고 있지만, 요시키의 여행 장면은 마치 일본 철도여행 홍보글로 착각될 만큼 맛있게쓰여 있어서 언제고 한번은 침대특급 하야부사나 오지를 달리는 작은 열차를 타보고 싶게 만듭니다.

 

하지만 미스터리에 관한 한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죽은 여인이 열차에서 목격된 미스터리의 해법은 다소 억지 같았고, 범행 과정은 저게 가능해?”라는 의문을 자아낼 정도로 작위적입니다. 적잖은 발품과 탐문에도 불구하고 결국 요시키의 비약적인 추리로 마무리된 점 역시 대단원에 대한 기대감을 품었던 독자들에겐 맥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트릭은 비현실적, 사건해결은 지나치게 초인적이라고 할까요? (아이러니하게도 미타라이가 주인공인 작품에서 이런 아쉬움을 자주 느끼곤 했는데, 캐릭터는 정반대지만 요시키 역시 비슷한 스타일로 전개될 것만 같아 심히 걱정이 됩니다.)

 

몇몇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미덕들이 골고루 잘 배분되어 한 번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고,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과 본능이 빚어낸 범행 동기 역시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진정성 있는 캐릭터들 덕분에 읽는 내내 그들을 응원하고 싶어질 만큼 매력적인 작품임엔 틀림없다는 생각입니다. 미스터리 자체만 현실감을 지녔더라면 충분히 별 5개를 받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사실, 이 서평을 쓰기 전에 요시키 시리즈세 번째 작품인 북의 유즈루, 저녁 하늘을 나는 학을 읽었습니다. 별도로 서평을 쓰긴 하겠지만, 이 작품에서 느낀 아쉬움이 조금은 더 두드러져 보였습니다. 많은 독자가 호평한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요시키 시리즈’ 10)를 읽고 나면 또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계속 하향세를 그리고 있는 시마다 소지에 대한 매력이 점성술 살인사건만큼 회복될지는 두고 봐야 알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Q&A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9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형마트 지상 6층을 가득 채운 주말 방문객들이 한순간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후일, 누군가는 불꽃을 봤다고 하고, 누군가는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고 진술하지만, 실제로는 화재의 흔적도, 유독가스의 잔재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방문객들은 일제히 마트 밖으로 도망치기 위해 출구로 몰려들었고, 그 과정에서 내장 파열, 전신 골절, 질식 등의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무참히 죽어나갔습니다. 그리고 참사 이후 조사원, 유족, 생존자 등이 둘씩 짝을 지어 서로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사건에 관한 정보를 캐거나 참혹했던 기억들을 되새기거나 참사 전후에 벌어졌던 미스터리한 현상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펼쳐집니다.

 

본문 마지막 장을 읽자마자 얼른 다음 페이지를 넘겨봤습니다. 작가의 후기든, 번역자의 해설이든 뭐라도 읽어야 제대로 책을 덮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서지 정보가 전부였고 남은 건 1인용 나무의자 그림과 ‘Q&A’라는 활자가 조그맣게 인쇄된 뒤표지뿐이었습니다. 결국 제 목록 속에 또 한 편의 온다 리쿠의 문제작이 추가되고 말았습니다.

 

발발 원인에 관해 어떤 논리적 설명도 불가능한 대형 참사가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있고, 나이, 성별, 직업이 제각각인 인물들이 그에 관해 문답을 주고받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목격한 사실을 청취하는 조사원도 있고, 취재가 목적인 언론 관계자도 있고, 살아남았으나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사건 자체와는 전혀 관계없는 인근 주민들도 등장합니다.

참사 직후의 정황을 소개한 첫 챕터를 읽다보면 범인의 정체 또는 사건의 원인이 후반부쯤에는 자연스레 드러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하지만 참사 이후 근 7-8개월이 지난 시점의 이야기를 다루는 2/3쯤에 이르렀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와서 진실 따위가 무슨 소용이지?”

 

아마 온다 리쿠의 작의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거란 생각입니다. 말하자면, 어처구니없는 참사를 겪은 사람들의 다양하고 기구한 사연과 트라우마 그 자체를 묘사하는 것이 온다 리쿠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뜻입니다. 누군가는 살아남아서 기뻤지만, 누군가는 그날 누군가가 죽어줘서기뻤습니다. 누군가는 트라우마를 이겨내지 못해 삶 자체가 엉망이 되었지만, 누군가는 남들의 트라우마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습니다. 누가 어떤 식으로 참사를 일으켰는지는 더 이상 관심 밖의 일이고 오로지 자신에게 닥친 느닷없는 불행에 격분하고 우울해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등장인물의 대화는 대체로 이런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이들의 묻고 답하기는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한 진실 찾기가 아니라 각자의 뇌리 속에 전혀 다른 모양새로 새겨진 그날의 기억에 대한 고백담이란 뜻입니다. 마치 대형 참사의 생존자나 유족이나 목격자들 역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사고의 원인과 책임자 추궁보다는 살아남은 탓에 겪어야만 했던 불면과 악몽, 떠나보낸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 TV화면을 통해 겪은 간접적인 공포 등을 기억 속에 더 깊이 간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온다 리쿠의 독특함과 고유의 미덕이 작품 전반에 가득 배어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읽은 후의 당혹스러움은 꽤 심각했습니다. 진실은 희미하고, 딱히 주인공이라 부를만한 존재도 없고, 전형적인 기승전결 구성과도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조금은 화가 나기도 했고, 조금은 내 이해력의 부족 탓인가?” 의문스럽기도 했다가, 결국엔 스스로를 위로하는 마음으로 내가 읽은 게 이런 거였나? 그렇겠지? 맞을 거야.”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제가 유별난 게 아니라면 ‘Q&A’는 꽤나 호불호가 갈릴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5:5쯤 될 거란 제 예상과 달리 대략 8:2쯤으로 나뉜 인터넷서점의 서평들은 잠시나마 저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다들 이 이야기를 이해했다는 뜻인가? 어느 대목에서든 호감을 느꼈고, 그래서 재미든 의미든 뭔가 하나는 제대로 건졌단 뜻인가?

 

올해 들어 유독 좋아하는 작가들의 특이한 작품들을 자주 만났습니다. 누쿠이 도쿠로의 미소 짓는 사람’, 가이도 다케루의 나니와 몬스터’, 다카노 가즈아키의 ‘KN의 비극등이 그 예인데, 대부분 읽고 난 후 한동안 얼떨떨해지거나 나만 이상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던 작품들입니다.

‘Q&A’는 어느 정도 공백을 뒀다가 다시 한 번 읽어볼 생각입니다. 어떤 작품은 이미 결론을 알고 재독할 때 제대로읽히는 경우가 있는데, ‘Q&A’는 그리 될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3개에 불과한 야박한 별 평점에 1개 정도는 추가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쇠 창비세계문학 16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이한정 옮김 / 창비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 같은 작가의 미친 사랑을 읽고 난 직후 세설을 이어서 읽을 예정이었는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열쇠를 먼저 만나게 됐습니다. ‘()’을 소재로 다뤘다고는 하지만, 주인공이 부부이고 나이가 56세와 45세이다 보니 흔히 예상할 수 있는 자극적인 이야기는 아니겠구나, 싶었습니다. 예상은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일기를 통해 가감 없이 자신들의 성 생활을 표현하는 점, 또 그 일기 자체가 다분히 상대방이 훔쳐 읽을 것을 기대하며 쓰인 점 등 파격적인 형식과 캐릭터 덕분에 얼마 안 되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무척 독특한 책 읽기가 되었습니다.

 

주요 등장인물 네 명은 일본이라는 공간과 1950년대라는 시대적 특징을 감안하더라도 요즘의 상식으로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면모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질투를 성욕의 원동력으로 삼은 나머지 아내의 나체사진 인화까지 질투의 상대에게 맡기는 남편, 고풍스러운 집안에서 자란 탓에 여자가 지켜야 할 의무를 당연히 여기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왕성한 성욕 때문에 이중적인 삶을 살아온 아내, 그런 모친의 음탕함을 대놓고 비난하다가도 자신의 교제상대인 남자와의 불륜을 조장하는 듯한 딸, 존경하는 남자의 아내와 딸을 양손에 거머쥔 파렴치한 같지만 정작 행동은 예의바른 사나이처럼 하는, 남편의 질투 상대인 젊은 남자 등이 그들입니다.

그들의 모든 관심은 부부의 침실 생활에만 맞춰져있고, 그 방법 역시 변태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특이합니다. 작가는 이런 분위기를 위해 상당히 많은 양의 판화로 된 삽화를 함께 실었는데, 그 덕분에 내용이나 형식 모두 극단적이라고 할 지점까지 내달립니다.

 

요즘이야 워낙 극단적인 소재와 이야기들이 넘쳐나서 열쇠같은 작품의 출간이 주목받기 쉽지 않지만, 1950년대 일본에서 연재될 당시 정치권까지 나설 정도로 사회적인 이슈가 됐던 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다루는 은 탐미적이라기보다는 파괴적이거나 악마적인 성격이 강한 편입니다. 작품 해설에서 언급된 다니자키의 다른 작품들의 내용을 보면 대체로 일관된 경향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들을 살피다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활동 시점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억압받는 근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 속에서 남녀의 지위는 을 매개로 역전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발 앞에 굴복하고 이용당하다가 종국엔 파멸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렇지만, 다니자키는 그런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내세우진 않습니다. “나는 섹슈얼 페미니스트다!”라고 주장하지도 않고, 남자의 을 단순히 동물적인 것으로 격하시키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작품 속에서 여자는 신 아니면 완구라고 언급한 점을 보면, 지독한 여성 비하론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도 아니면 모식의 양극단을 치닫는 가치관을 지닌, 이해 불가한 뇌구조라고 할까요?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이지만, 읽고 나면 이게 뭐지?”라는 당혹감이 더 강하게 남는 작품입니다. 단순히 선정적인 장면들을 기대한다면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지만, 일본 문화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상식과는 거리가 먼 다소 기괴한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강추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번쯤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도해(大渡海)’라는 이름의 꿈의 사전(事典)을 기획한 아라키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정년 이전에 후계자를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그러던 중 영업부에서 근무하던 마지메 미쓰야를 추천받고, 그가 가진 언어에 대한 독특하면서 탁월한 감각을 감지합니다.

대도해(大渡海) 제작진은 교수 출신의 고문인 마쓰모토 선생, 정년 후 외부 스태프로 참여하는 아라키, 그리고 주인공 마지메 외에 철없는 한량 니시오카, 계약사원 사사키, 대도해(大渡海) 제작 13년 차에 합류한 막내 기시베 등입니다. 마지메와 니시오카, 기시베 등이 한 챕터씩 화자가 되어 기획에서 출판까지 15년이 걸린 대도해 제작의 장정을 이야기합니다. 그 속에서 마지메는 편집자로서의 고뇌와 희열, 어른으로의 성장과 연애를 겪습니다. 한때 사전 제작과는 안 맞는다고 툴툴거리던 니시오카는 마지메의 진정성에 감동받고, 계약사원 사사키는 기숙사 사감 같이 무뚝뚝하면서도 늘 편집부의 중심을 잡아줍니다. 아라키와 마쓰모토 선생은 사전에 대한 열정 하나로 살아온 인생 선배의 모습을 보여주고, 패션잡지 팀에 있던 막내 기시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전편집부의 열혈멤버가 되어갑니다.

 

배를 엮다는 일본 소설의 강점인 다양한 소재, 다양한 캐릭터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독특하고 신선한 작품입니다. 겐부쇼보 출판사 사전편집부에서 근무하는 주인공들이 대도해라는 이름의 꿈의 사전을 제작하기 위해 보낸 진정성 가득한 15년의 여정이 느리지만 진하고 깊은 맛을 풍기며 그려집니다. 이미 종이 사전이 디지털 사전에게 그 자리를 내준 지 한참이고, 그래서 새삼 한 편의 사전을 제작하는 이야기가 어떤 감흥을 줄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일본 서점대상 수상작이라는 공식적인 타이틀도 믿음직했고, 처음 만나는 작가지만 주변에서 좋은 평을 들었던 미우라 시온에 대한 기대감도 있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첫 장을 넘겼습니다.

 

이야기 자체는 극성이 그리 강하지도 않고, 긴장감이나 반전 같은 강한 양념도 찾아볼 수 없는 차분한 소품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온 마음을 다 해서 이야기 속의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전편집부라는 다분히 아날로그적인 공간과 그보다 더 아날로그적인 캐릭터들이 내뿜는 힘은 웬만큼 잘 짜인 미스터리보다 더 강한 페이지터너로 작용합니다. 그 중심에는 평범하지만 자신의 일에 모든 것을 거는 진정성이 놓여있습니다.

 

누군가는 뻔하다고, 상투적이라고,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고 보면 우리는 늘 그런 이야기에 감동받고, 울컥하고, 오래 기억하고 싶은 본능을 스스로 일깨우게 됩니다. ‘배를 엮다는 그런 상투성 위에 이제는 책꽂이에서 먼지받이로 방치된 채 언제 다시 사람 손에 의해 펼쳐질지 기약조차 할 수 없는 처지가 된 종이 사전을 얹어놓음으로써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소중한 아날로그적 감성을 자극합니다.

좀더 강하고,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것만 찾아 읽느라 무뎌질 대로 무뎌진 오감을 위해 가끔은 배를 엮다같은 꾸밈없고 티 없는 이야기를 읽는 것도 요즘처럼 불쾌하기 짝이 없는 여름을 지내기에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진 이틀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 들녘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평소 온화하고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로 많은 후배 경찰에게 존경을 받던 카지 소이치로 W현 경찰청 교육과 계장이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내를 촉탁살인한 후 자수합니다. 경찰청은 현직 경찰의 범죄라는 파장을 최대한 억누르려 하고, 검찰과 언론은 진상을 파악해내려고 동분서주합니다. 가장 큰 미스터리는 카지 소이치로가 아내를 살해한 후 자수하기까지 이틀의 공백입니다. 경찰은 카지 본인의 진술대로 자살할만한 장소를 찾기 위해서라고 판단하지만, 검찰과 언론은 의심을 거두지 않고 카지와 W현 경찰청을 추궁합니다. 하지만 카지는 사라진 이틀에 대해 함구할 뿐이며, 그러는 사이 경찰-검찰-법원-교도소에 이르는 약 3~4개월의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사라진 이틀의 실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 책의 원제인 半落’(한오치)는 용의자가 범행의 일부만 자백한 상태를 가리키는 경찰용어입니다. 일본에서 이 용어의 어감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라진 이틀이라는 번역 제목이 훨씬 더 책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요코야마 히데오를 좋아하는 이유는 치밀한 구성, 빈틈없는 스토리, 적절한 반전 등 미스터리의 기초가 탄탄하게 잘 갖춰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그를 토대로 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묘사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라진 이틀에는 이야기의 규모에 비해 꽤 많은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각각 한 챕터씩 주인공을 맡아 사건의 흐름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진실 찾기라는 1차적인 역할 외에도 사건의 이면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하거나, 범인의 심연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 보기도 하고, 때로는 분노하거나, 때로는 자책하고, 때로는 나약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마치 옆에서 살아 숨 쉬는 인물로 느껴질 만큼 리얼한 존재들입니다. 어렵지도 않고, 장황하지도 않은 문장으로 그 많은 캐릭터들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필력 덕분에 읽는 내내 두근거리다가, 짠해지다가, 분노하다가 결국에는 울컥하게 되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게 됐습니다.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화두 중 하나는 카지가 자수하기 직전 붓으로 쓴 人間五十年이라는 다섯 글자입니다. “인간 오십년, 천상의 하루에 비한다면 덧없는 꿈과 같구나. 한번 생을 얻은 자, 그 누가 멸하지 않으리오.”라는 하이쿠(?) ‘아츠모리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조금 작위적인 면이 보이지만, 등장인물 상당수가 곧 나이 50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주인공 카지 소이치로(49)를 비롯하여 카지를 담당한 W현 강력계 지도관 시키 카즈마사(48), 카지의 진실을 밝히려는 W현 지검 검사 사세 모리오(43), 카지의 변호사 우에무라 마나부(49)가 그들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크건 작건 가정적인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결혼 생활 20년을 넘겼고, 자녀들은 한창 반항기를 지나고 있을 무렵입니다. 부모들은 작고했거나, 병환을 앓고 있거나 그 외 여러 가지 트러블의 원인이 될 나이입니다. 그래서인지 아내 살해범 카지 소이치로를 바라보는 동년배의 형사, 검사, 변호사의 시선은 경찰출입기자 나카오, W현 판사 후지바야시 등 30대의 그것과는 확연히 구분됩니다.

 

요코야마 히데오는 50이라는 나이를 한 인간이 넘어야 할 가장 큰 고비처럼 묘사합니다. 살아온 삶에 대한 회한과 분노가 동시에 일어나고, 그것이 범죄나 자살로 이어지는, 사춘기보다 수백 배의 폭발력을 지녔다고 봅니다. 더불어, 본문 중에 최근 몇 년간, 살인범 가운데 49살이 가장 많다라는 통계도 제시합니다. 어찌 보면 사라진 이틀은 단순한 미스터리라기보다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내를 제 손으로 죽여야 했던 성실한 49살의 현직 경찰을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끼리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이야기, 또는 자신의 삶과 행적을 돌아보는 참회록의 비중이 더 큰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전에 대한 기대감이 충족되지 못한 것과 선명하지 못한 마무리 덕분에 왠지 후속편이 있어야 할 것 같은 아쉬움이 들긴 했지만, 요코야마 히데오의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그 정도 아쉬움은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면에서,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린 사회소설에 가깝다.”라는 번역자의 후기는 이 작품의 특징을 함축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올해 들어 가장 많이 읽은 작가가 요코야마 히데오입니다. 진작 읽었어야 할 작품들을 뒤늦게 읽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마치 맛있는 반찬을 아껴놓았다가 마지막에 먹는 기분 좋은 느낌처럼 뒤늦게 몰아 읽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매력은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