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 창비세계문학 16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이한정 옮김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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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같은 작가의 미친 사랑을 읽고 난 직후 세설을 이어서 읽을 예정이었는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열쇠를 먼저 만나게 됐습니다. ‘()’을 소재로 다뤘다고는 하지만, 주인공이 부부이고 나이가 56세와 45세이다 보니 흔히 예상할 수 있는 자극적인 이야기는 아니겠구나, 싶었습니다. 예상은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일기를 통해 가감 없이 자신들의 성 생활을 표현하는 점, 또 그 일기 자체가 다분히 상대방이 훔쳐 읽을 것을 기대하며 쓰인 점 등 파격적인 형식과 캐릭터 덕분에 얼마 안 되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무척 독특한 책 읽기가 되었습니다.

 

주요 등장인물 네 명은 일본이라는 공간과 1950년대라는 시대적 특징을 감안하더라도 요즘의 상식으로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면모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질투를 성욕의 원동력으로 삼은 나머지 아내의 나체사진 인화까지 질투의 상대에게 맡기는 남편, 고풍스러운 집안에서 자란 탓에 여자가 지켜야 할 의무를 당연히 여기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왕성한 성욕 때문에 이중적인 삶을 살아온 아내, 그런 모친의 음탕함을 대놓고 비난하다가도 자신의 교제상대인 남자와의 불륜을 조장하는 듯한 딸, 존경하는 남자의 아내와 딸을 양손에 거머쥔 파렴치한 같지만 정작 행동은 예의바른 사나이처럼 하는, 남편의 질투 상대인 젊은 남자 등이 그들입니다.

그들의 모든 관심은 부부의 침실 생활에만 맞춰져있고, 그 방법 역시 변태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특이합니다. 작가는 이런 분위기를 위해 상당히 많은 양의 판화로 된 삽화를 함께 실었는데, 그 덕분에 내용이나 형식 모두 극단적이라고 할 지점까지 내달립니다.

 

요즘이야 워낙 극단적인 소재와 이야기들이 넘쳐나서 열쇠같은 작품의 출간이 주목받기 쉽지 않지만, 1950년대 일본에서 연재될 당시 정치권까지 나설 정도로 사회적인 이슈가 됐던 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다루는 은 탐미적이라기보다는 파괴적이거나 악마적인 성격이 강한 편입니다. 작품 해설에서 언급된 다니자키의 다른 작품들의 내용을 보면 대체로 일관된 경향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들을 살피다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활동 시점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억압받는 근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 속에서 남녀의 지위는 을 매개로 역전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발 앞에 굴복하고 이용당하다가 종국엔 파멸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렇지만, 다니자키는 그런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내세우진 않습니다. “나는 섹슈얼 페미니스트다!”라고 주장하지도 않고, 남자의 을 단순히 동물적인 것으로 격하시키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작품 속에서 여자는 신 아니면 완구라고 언급한 점을 보면, 지독한 여성 비하론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도 아니면 모식의 양극단을 치닫는 가치관을 지닌, 이해 불가한 뇌구조라고 할까요?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이지만, 읽고 나면 이게 뭐지?”라는 당혹감이 더 강하게 남는 작품입니다. 단순히 선정적인 장면들을 기대한다면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지만, 일본 문화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상식과는 거리가 먼 다소 기괴한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강추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번쯤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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