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 살인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158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남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국내에 소개된 대낮의 사각을 비롯 파계재판’, ‘유괴’,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1950~60년대의 주요 출간작들보다 앞선 다카기 아키미쓰의 1948년 데뷔작입니다.

패전 이후 혼란스럽고 무질서했던 도쿄의 사회상과 함께 다분히 주술적이고 기이한 분위기를 내뿜는 문신의 향연이 상세히 묘사돼있고, 당대 최고의 문신을 새긴 여자, 광적으로 최고의 문신을 수집하는 의대 교수, 문신이 있어야 성욕을 느끼는 재력가, 문신 자체를 정신병으로 여기는 남자 등 괴담에 어울릴 법한 독특한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연쇄살인의 피해자들은 토막 나거나 가죽이 벗겨진 채 발견되고, 밀실을 포함한 고전적이지만 중의적인 트릭들이 복잡하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야기의 외연만 놓고 보면 언뜻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가 떠오릅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에도 시대가 끝나고 통제와 금지령 속에 몰락해간 문신사들의 비극, 세 자식들의 몸에 금기시 된 동물 문신을 새긴 전설적인 문신사, 도쿄대 의학부 표본실에 소장된 문신이 새겨진 100여 장의 인피(人皮), 뛰어난 문신을 찾아 매일 목욕탕을 찾아다니며 사후 문신 양도계약에 혈안이 된 수집가들, 그리고 전설과 신화, 탐욕과 증오가 혼재된 비극적인 가족사 등 독자를 요괴의 세계로 끌고 들어가는 도조 겐야 시리즈스타일의 설정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막판에 이르러 그동안 드러난 단서들을 제시하며 독자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구성이나, 한계에 부딪힌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초슈퍼 울트라급 천재 해결사를 등장시킨 점 등은 다분히 아날로그적이고 올드한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의 트릭으로 이중 삼중의 효과를 노렸던 범인의 치밀한 계획이나 연이어 독자의 뒤통수를 치며 반전을 이끌어내는 해결사의 활약은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일찌감치 범인을 눈치 챌 수도 있지만, 다카기 아키미쓰가 곳곳에 숨겨놓은 트릭만큼은 그리 쉽게 알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가 천재 해결사의 입을 빌려 표현한대로, “모든 단서와 정보를 뒤집어 생각하고, 평행선도 어디선가 마주친다는 논리로 접근한다면의외로 빨리 사건의 실체에 접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족으로.. 20152분기에 검은숲에서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으로 개정판이 나온다고 합니다. 동서문화사에서 2005년에 처음 출간됐으니 꼭 10년만입니다. 편집이나 디자인 등 여러 면에서 세련된 문신 살인사건을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어느 작품의 표지보다 파격적이고 독창적이긴 하지만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구판의 표지 - 작품을 읽고 나면 나름 이해할 수 있지만 만큼은 작품의 내용과 2015년이라는 시대에 걸맞게 페이스오프 되기를 기대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7
무라카미 하루키.오자와 세이지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음악에 관한 한 가장 인상적이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였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프란츠 리스트의 순례의 해라는 피아노 소곡집은

주인공 쓰쿠루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거의 소설의 일부나 마찬가지여서

책을 읽던 도중 기어이 음원을 찾아내곤 반복해서 들으며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음악이 친숙한 관계라는 것은

그의 작품을 2~3권만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이렇게 대놓고(?) 음악을 이야기하는 작품을 내놓을 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클래식이라곤 상식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문외한이다 보니

오자와 세이지라는 이름은 물론 그의 위상조차 처음 알게 된 것이 사실이지만,

이 작품이 그에 대한 전기나 수필, 혹은 인물론도 아닌

그와의 대화록 모음집이란 형식으로 꾸며진 점은 더욱 파격적이었습니다.

 

여러 작품 속에서 클래식부터 재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을 녹여낸 것을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음악에 대한 편력은 가공할 연륜을 지닌 것임에 틀림없지만,

거장 오자와 세이지와의 대화 속에서 그는 스스로 문외함임을 여러 번 강조합니다.

도가 지나친 겸손이라는 약간의 삐딱한(?)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가 오자와 세이지와 나누는 대화를 한 줄 한 줄 읽다 보면

겸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배우고자 하는 마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배움은 기술적인 것을 넘어 궁극적으로는 음악을 대하는 자세에 이르고 있어

전혀 알지 못하는 교향곡을 놓고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언어가 외계어처럼 들리면서도

행간에 녹아있는 두 거장의 열정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솔직히 초반에는 당혹스러운 책읽기의 연속이었습니다.

특히 음악을 논하는 그들의 대화를 활자로 소화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령...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느린 템포로 어우러진다)

오자와 : , 방금 거기 안 맞는데.

무라카미 : 확실히 흐트러졌죠.

 

음악을 들으면서 나눈 두 사람의 대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음악을,

그것도 지휘자와 연주자까지 정확히 맞는 음원을 찾아 함께 들으면서 읽어야겠지만,

‘DVD 소설이 아닌 다음에야 그런 것은 100% 불가능한 일이고,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독자에게 그런 수고를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모르는 건 그냥 넘어가자는 식의 편한 마음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읽어나가기로 했고,

그러다 보니 왜 이런 독특한 형식의 책을 낼 생각을 했는지,

무라카미 하루키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초반부터 몇 차례에 걸쳐

이 작품이 오자와 세이지의 인물론이 아님을 거듭 밝혔지만,

음악에 관한 테크니컬한 의견이나 비평보다는

지휘자로서 그가 걸어온 길, 유럽과 미국에서 겪은 굴곡과 환희로 채워진 다채로운 경험들,

그리고 음악을 대하는 그만의 개성 있는 태도 등에 좀더 공을 들여 묘사하고 있어,

궁극적으로는 거장의 삶의 향기와 발자취를 이야기하고 싶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예술이 마찬가지지만, 특히 시간을 들여야만 온전하게 감상할 수 있는 음악의 경우

벼락치기하듯 하루아침에 내공과 연륜을 쌓는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클래식을 공부하겠다고 하루 종일 교향곡을 듣고,

작곡가와 곡명과 음악의 사조를 외워봤자,

오랜 시간 사심 없이 편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음악을 즐겨온 사람 앞에서는

한낱 치졸한 지식에 불과한 모래성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60년 넘게 야유와 찬사 속에 지휘자의 삶을 살아온 오자와 세이지나

오랜 시간 음악을 통해 행복감을 만끽해온 무라카미 하루키의 음악에 관한 애정과 정열은

왜 그들이 거장으로 불리는지 쉽게 이해하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구스타프 말러에 관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함부로 도전할 수 없었던 독특한 세계를 구축했던 말러의 음악에 관한 이야기며,

동 시대를 살았던 프로이트와의 관계, 당시 오스트리아 빈의 예술과 풍경 등은

두 거장의 묘사 덕분에 훨씬 더 생생했고, 말러의 음악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습니다.

또한 오자와 세이지가 밀라노에서 오페라 지휘를 하며 야유를 받은 일,

시카고 언론으로부터 십자포화를 받았지만 단원들에게 샤워를 통해 응원 받은 일,

오직 뛰어난 음악가를 키우기 위해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힘쓰는 그의 노력 등도

훙미로운 에피소드들이었습니다.

 

제겐 미지의 영역(?)인 클래식에 관한, 그것도 낯설고 특이한 대화록 형식의 작품이었지만,

다 읽고난 후 , 이런 책읽기도 나름 재미있네.”라는 느낌이 절로 든 것이 사실이고,

그것은 아마도 대화체에서도 묻어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만의 매력 있는 문장들과

자신들의 열정을 꾸미지 않고 드러낸 두 거장의 진정성 덕분이라는 생각입니다.

오자와 세이지를 좋아하는 수준 높은 클래식 애호가나

클래식에 관심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에겐 더욱 반가운 작품이 돼줄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꽃밥 - 제133회 나오키상 수상작
슈카와 미나토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사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5~6년 전쯤 구판으로 읽은 꽃밥에 대한 기억은 따뜻한 단편들이었다는 아련한 느낌과

꽤 오랫동안 여운이 남았었다는 막연한 잔상이 전부였습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때라 그 이야기들을 온전히 기억 못하는 것이 무척 아쉬웠는데

8년 만에 나온 개정판을 운 좋게 손에 넣은 덕분에

슈카와 미나토가 그려낸 6편의 주옥같은 단편들과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단편집 오늘은 서비스데이처럼 꽃밥역시 죽음, 환생, 영혼 등을 다루고 있는데,

오늘은 서비스데이가 소동극 또는 라이트한 호러물의 느낌이 강했다면,

꽃밥은 지금은 중년이 된 주인공들이 오래 전의 유년기에 겪었던 소소한 일상들을 회상하며

그 안에서 마주쳤던 죽음이나 영혼의 문제를 고백하는 따뜻한 서사로 이루어져있습니다.

 

환생과 가족애를 다룬 표제작 꽃밥’,

재일한국인과의 우정과 귀신 해프닝을 그린 도까비의 밤’,

소녀의 성장기와 가족의 붕괴를 성()과 결부시킨 요정 생물’,

요절한 삼촌의 장례식에 등장한 세 여자의 소동극 참 묘한 세상’,

산 자의 목숨을 거두는 언령(言靈)에 관한 이야기 오쿠린바’,

따돌림 당한 소년이 만난 신기루 같은 여자 이야기 얼음 나비

대부분의 작품이 죽음이라는 무겁고 원초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비극의 여운을 남겼던 요정 생물을 제외하곤

하나같이 읽는 동안 한번쯤 눈시울이 뜨끈해지는 순간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죽음 자체는 그 어떤 경우라도 본인은 물론 살아남은 자들에게 힘든 여정이지만,

꽃밥속의 죽음들은 때론 유쾌하게, 때론 누구나 맞이해야 하는 숙명처럼 공평하게,

그리고 때론 모든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축복처럼 그려지고 있습니다.

많은 인물들이 오사카의 변두리 연립주택단지에서 인연을 맺게 되고,

그 인연이 대부분 죽음을 계기로 끊어지거나 깨지곤 하지만,

왠지 꽃밥속의 죽음들은 내세에 다시 만날 것을 보장받은 휴식 같은 느낌이 강합니다.

 

죽음으로 인해 헤어졌던 전생의 가족과 고향을 찾아가는 아이 (꽃밥),

차별과 병치레 속에 세상을 떠났지만 유쾌한 귀신이 되어 돌아온 아이 (도까비의 밤),

죽어서도 바람둥이 기질을 버리지 못해 영구차를 멈추게 만든 백수 삼촌 (참 묘한 세상),

고통 대신 안락하고 평화로운 죽음을 제공하는 괴짜 할머니 (오쿠린바)

죽음과 결부된 인물들 모두 죽었지만 죽은 것 같지 않은, 얼마 안 있으면 다시 만날 것 같은,

그래서 슬프고 아쉬워도 충분히 그()의 부재를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캐릭터들입니다.

온통 죽음을 다룬 이야기들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끝이라는 비극성보다

웃으면서 그()를 보내주는 듯한 훈훈함이 남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판타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서사들로 가득 차있고,

빈곤의 그늘이 훨씬 더 컸던 1960~70년대 오사카의 변두리라는 낯선 공간이 주 무대인데다

곳곳에 일본식 정서가 진하게 배어있는 작품들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화감을 못 느꼈던 것은

꽃밥에 담긴 이야기들이 문화와 세대를 건너뛰는 보편적인 감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반부에 실린 작품 해설과 번역자의 후기에서도 이런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특정 시대나 세대, 지역에 한정되지 않는 보편적인 그리움’(작품 해설)이라든가,

세월이 흘러 다시금 펼쳐 본 꽃밥이 이리도 애잔하게 가슴을 적시는 것은 각 단편이

보편성이라는 힘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번역자 김난주 님의 후기)라는 설명은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혹독하고 정신없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치유와 위로를 받고 싶은 독자라면,

온 세상이 아날로그였던 그 시대의 끄트머리라도 잠시 살아봤던 독자라면,

, 아사다 지로의 단편에 마음이 움직였던 독자라면,

주말의 하루쯤, 슈카와 미나토의 꽃밥과 만나볼 것을 꼭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3의 저주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8
미쓰다 신조 지음, 이연승 옮김 / 레드박스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유치원 시절, 외가에서 겪은 기이한 사건 이후 타인에게 나타난 사상(死相),

즉 죽음의 그림자나 증상을 볼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갖게 된 쓰루야 슌이치로는

무녀인 외조모의 도움으로 탐정사무소를 열고, 첫 의뢰인인 나이토 사야카를 맞이합니다.

그녀에 따르면, 약혼자 아키라의 죽음 이후 이리야 가()에서는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멀쩡하던 조각상이 넘어져 다치는가 하면,

사지가 마비되거나, 미각을 잃거나 서가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일어나는 등

온 가족에게 괴현상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덧붙여, 13개의 막대가 그려진 괴편지까지 가족 개개인에게 날아들었습니다.

 

이리야 가를 방문한 슌이치로는 사야카를 비롯한 이리야 가 가족들의 사상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끔찍한 장면으로,

머지않아 이리야 가에 연이은 죽음이 찾아올 것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겪은 현상들 곳곳에 ‘13’이라는 숫자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파악한 것 외에

슌이치로는 괴현상과 괴편지, 그리고 끔찍한 사상 사이의 연관성은 물론

제대로 된 단서 하나 찾지 못한 채 귀중한 시간을 흘려보냈고,

결국 이리야 가의 사람들은 하나씩 차례로 변사를 당하게 됩니다.

 

● ● ●

 

도조 겐야 시리즈나 작가 시리즈, 그리고 최근 출간된 노조키메등을 통해

공포와 괴담의 진수를 선보인 미쓰다 신조의 새로운 사상학 탐정 시리즈 첫 편입니다.

쓰루야 슌이치로는 미쓰다 신조의 단편집 붉은 눈에 실린 죽음이 으뜸이다를 통해

살짝 맛보기만 했던 캐릭터인데, 결국 장편 시리즈의 주인공이 돼서 돌아왔습니다.

 

시리즈 첫 편이다 보니 슌이치로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제법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타인의 죽음을 알아보는 특이한 능력을 얻게 된 유치원 시절에 겪은 사건이나

그 이후 저승사자, 귀신 들린 아이로 비난받으며 은둔형 외톨이가 된 그의 성장기,

그리고 그를 보살피고 키워준 뛰어난 무녀인 외할머니 이야기까지

비하인드 스토리 자체만으로도 한 편의 작품의 소재가 될 정도로 흥미 있게 묘사됐습니다.

 

타인과의 소통에 익숙하지 않아 삐딱하고 까칠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데다,

사상을 볼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사람들이 많은 곳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던 슌이치로가

첫 사건인 이리야 가 연쇄변사에 뛰어든 후 여러 사람과 맞부딪히며 겪는 성장통(?)

그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 못잖게 깨알 같은 재미를 던져줍니다.

 

도조 겐야 시리즈나 노조키메가 문명과 동떨어진 자연이나 외진 마을을 배경으로 했다면,

이 작품은 도쿄 한복판의 저택에서 벌어지는 현대의 도시괴담이라

상식으론 설명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괴현상이 더욱 섬뜩하게 느껴집니다.

제아무리 뛰어난 범인이라고 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괴현상을 일으킬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무서운 주술의 힘이라고 하기엔 아무래도 적잖은 위화감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누가 범인인가’, 보다 괴현상은 범인의 물리적인 힘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주술의 힘인가?’에 더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으며,

진실이 드러나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습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미쓰다 신조는 작품 곳곳에 제법 많은 힌트를 깔아놓습니다.

아예 대놓고 ‘13의 저주라는 부제를 달아놓은 데서 알 수 있듯,

작품 속에는 숫자 13과 관련된 많은 정황들이 등장하는데,

그 정황들은 독자를 위한 힌트이자 독자를 보기 좋게 속이는 함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범인의 정체에 신경 쓰기보다 비현실적인 능력을 가진 슌이치로가

더욱 비현실적인 사건을 어떻게 다루고 풀어가는가, 를 음미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기에,

너무 힌트나 함정에 매몰되거나 머리를 굴리면서 읽을 것이 아니라,

미쓰다 신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여유 있는 책읽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명백한 단서와 증거보다는 랜덤하고 이해 불가능한 현상들이 등장하고,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과학적 추리보다는 직관이나 느낌에 좀더 의존하는 내용이다 보니

본격이나 사실감을 선호하는 독자에게는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을 수도 있고,

공포나 괴담을 좋아하는 독자는 물론 미쓰다 신조의 팬 중에서도 호불호가 갈릴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신화와 전설을 동반한 도조 겐야 시리즈를 좀더 선호하는 편이긴 하지만,

일단 시리즈 첫 편으로서 주인공 슌이치로의 매력을 잘 이끌어낸 점,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무수한 떡밥을 사방에 깔아놓은 점,

특히 운명적으로 조우할 것이 분명한 엄청난 힘을 지닌 적의 존재감을 부각시킨 점 등은

앞으로 이어질 슌이치로 시리즈를 여러 면에서 기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아직은 탐정으로서도 어설프고, 인간관계도 제대로 꾸려나가지 못하는 미숙아이지만,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호감과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사상학 탐정 쓰루야 슌이치로가

두 번째 편에서는 어떤 사건을 통해 인간과 탐정으로서 쑥쑥 성장하게 될지 기대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왕국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왕국의 자매편이며 소매치기가 주인공인 쓰리는 비교적 쉽고 편하게 읽혔던 작품입니다.

예전의 서평을 보니 길지 않은 분량이기도 하거니와, 페이지가 하도 잘 넘어가는 바람에

두어 시간 만에 마지막 장까지 달렸습니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서평을 쓰기 시작한 초기라

야박하게 별 세 개만 주고 말았지만, 요즘 저의 잣대라면 네 개는 마땅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왕국은 인물들을 훨씬 더 사악하거나 복잡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달의 광기, 매춘과 욕망의 신화, 인간의 의지와 운명을 장악한 절대 악 등 수많은 상징들이

때론 묵직하게, 때론 은유적으로 작품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자매편인 쓰리에 비해 결코 쉽고 편한 책읽기를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건만 놓고 보면 내용은 심플합니다.

유리카는 비밀조직의 요원으로 추정되는 야다의 지시를 받고 기업이나 정부 고위직 남자들의

추잡한 사진과 동영상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고급 콜걸 출신의 위장 창녀입니다.

하지만 야다의 적대 세력으로 보이는 기자키에게 신분이 들통 나고 목숨을 위협받으면서

유리카는 본의 아니게 위험천만한 거짓 이중스파이 노릇을 하게 됩니다.

어떤 선택을 해도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한 유리카는 위조여권으로 일본을 뜰 생각이지만,

도주를 목전에 둔 어느 날, 야다와 기자키 모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간단한 줄거리만 보면 전형적인 할리우드 스파이 물의 공식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왕국의 구성에서 이런 통속적인 줄거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정작 몸통이 되는 이야기는

운명을 거부하는 한 여자와 남의 인생을 멋대로 설계하려는 한 남자의 대결입니다.

 

쓰리의 니시무라가 천재적인 소매치기지만 트라우마에 휩싸인 채,

조금은 과할 정도로 철학적이고 자기애(또는 자기혐오)가 강한 남자였다면,

왕국의 유리카는 고아원에서 자라 고급 콜걸을 거쳐 비밀조직의 매춘 사기에 가담하게 됐고,

자신의 삶과 운명을 좌지우지하려는 이 세계의 온갖 힘을 배신하겠다는 자기애

딱히 삶에 미련은 없지만 그렇다고 참혹하게 죽기는 싫다는 자기혐오로 똘똘 뭉친 채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여자입니다.

거기에 덧붙여, 밤마다 뜨는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달()에게 자신을 투사하며

때론 환멸하고, 때론 자조하고, 때론 사무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쓰리의 니시무라보다 훨씬 더 심연에 가까운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쓰리에서 니시무라를 완벽하게 장악했던 기자키는

왕국에서 유리카를 상대로 또다시 신에 버금가는 절대 악을 행사합니다.

그는 타인의 인생 경로는 물론 감정, 희망, 절망까지도 통제할 수 있는 신의 권능을 꿈꾸는데,

그 인생을 멋대로 희롱하다가 배신하고 망가뜨리고 싶은 대상으로 유리카를 점찍은 기자키는

결국 그녀를 야다와의 권력 투쟁에 이용함과 동시에

자신의 설계도대로 그녀의 삶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습니다.

 

유리카와 기자키는 극과 극의 위치에 서있으면서도 배신이라는 코드에 있어서만큼은

동류항으로 분류될 수 있는 아이러니한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자키가 자신을 믿고 따르던 자를 한순간에 배신하면서 살해하는데서 쾌감을 느낀다면,

유리카는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의 몸을 탐내는 잘난 남자들을 배신함으로써

그들이 성취해온 것과 인생 자체를 박살내는데서 열기와 자유를 느끼는 인물입니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정말 공감하기 쉽지 않은 캐릭터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반사회적 인격 장애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는데,

왕국에서는 이런 비범한(?) 인물들을 종종 목격할 수 있습니다.

거짓 사랑에 속아 절망에 빠진 여자를 보면서 성적으로 흥분하는 괴물이 있는가 하면,

선량함으로 남을 도와주다가 정작 상대가 구원을 받게 되면 분노를 느끼곤

어째서 계속 불행하지 않은 것이냐?”며 너덜너덜하게 파멸시켜버리는 인물도 있습니다.

왕국의 등장인물 중 인간적으로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유리카를 이용해

추잡한 정보를 모으면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거대조직에 복무하는 야다 정도뿐입니다.

 

마지막 장까지 다 읽은 후의 첫 느낌은 솔직히 말하자면 ‘So what?’이었습니다.

범인을 잡아 진실이 드러나는 이야기도 아니고,

비장한 새드 엔딩이나 유쾌한 해피 엔딩도 아니며,

그렇다고 눈물이든 분노든 감정의 폭발을 끌어내는 마무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저것 생각할 여지나 여운이 많이 남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무의미한 삶, 고통스러운 기억, 타인에 대한 지배, 운명이란 존재하는가, 등등...

 

추정이지만, 작가는 독자에게 어떤 특정한 공통된 정서를 강요할 생각도 없었고,

, 그런 공통된 정서를 느끼기를 원하지도 않은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절대 악과 운명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이나 가치관을

인류 최초의 직업인 창녀와 소매치기를 등장시킨 두 편의 작품을 통해 내보였고,

공감과 반감은 철저히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았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인지 유리카나 기자키의 삶의 방식이나 그들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느낌은

글로 표현해봤자 지독히 주관적인 궤변일 수밖에 없을 것 같아 서평에 담지 않기로 했습니다.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팬이더라도 왕국에 관한 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자매편인 쓰리왕국을 다 안 읽은 독자라면, ‘쓰리부터 읽을 것을 권하고 싶고,

혹시 왕국을 읽고 실망한 독자라면, 쓰리를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