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여자 밀리언셀러 클럽 137
가노 료이치 지음, 한희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일본 미스터리 작품으로는 꽤나 방대한 분량(688페이지)의 작품입니다.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몇 년 전에 읽은 가노 료이치의 제물의 야회656페이지더군요.

기억의 오류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제물의 야회는 그리 길다는 느낌을 못 받았던 것 같은데

환상의 여자는 다루고 있는 사건의 규모 때문인지 조금은 분량의 부담을 느꼈습니다.

 

처음엔 제목만 보고 윌리엄 아이리시의 작품이 황금가지에서 다시 나왔나 오해했습니다.

물론 오해는 금세 풀렸지만, 초반에 여주인공 고바야시 료코가 사라지는 대목을 읽다보니

왠지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이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환상의 여자역시 그녀는 과연 누구인가?”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 ● ●

 

5년 만에 우연히 마주친 옛 연인 고바야시 료코가 다음날 무참히 살해된 채 발견되자

변호사 스모토 세이지는 모든 일을 중지시키고 그녀의 죽음을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친인척을 찾기 위해 그녀의 고향까지 찾아갔던 스모토는 뜻밖의 상황에 처하면서,

그가 알고 있던 료코는 진짜 료코인가?”라는 당혹스러운 자문을 하게 됩니다.

또한 그녀가 살해된 현장을 조사하다가 괴한의 습격을 받는가 하면,

그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여러 폭력단이 연루된 사실까지 알게 됩니다.

 

흥신소장 기요노, 호스티스 사요코와 함께 갖은 위험을 무릅쓴 스모토의 조사는

결국 10여 년 전 그녀의 고향에서 벌어졌던 두 건의 살인사건까지 닿게 되고,

거기에서 스모토는 탐욕을 채우기 위해 야차처럼 날뛰었던 악당들의 실체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쉽게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스모토 일행은 오히려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단지 그녀를 위해서라는 명분 하나만으로 집요하게 자료를 모으고 사람들을 만나보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스모토가 손에 쥔 진실은 참담하고 가슴 아픈 료코의 과거사일 뿐입니다.

 

● ● ●

 

크게 보면 심플한 구조를 갖고 있지만

작가는 캐면 캘수록 끝없이 딸려 나오는 고구마 줄기처럼

고바야시 료코의 과거에 연루된 인물과 사건을 복잡다단하게 설정함으로써

7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시점인가부터는 인물과 지역, 사건 등을 메모하면서 읽게 됐는데,

30여 년 동안 세토 내해에서부터 오사카, 나고야, 도쿄를 전전했던 료코의 삶을

촘촘하고 빈틈없이 구성한 작가의 필력에 여러 번 놀라곤 했습니다.

 

사건에만 집중했다면 아마 4~500페이지 내외에서 마무리 될 수 있었겠지만,

작가는 스모토와 료코 두 남녀의 고통스런 가족사와 심리 묘사에 적잖은 분량을 할애함으로써

단순한 사건해결 미스터리를 넘어 묵직한 한 편의 비극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변호사 스모토 세이지의 인생은 한시도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오직(汚職)으로 공무원에서 퇴출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버지,

정의란 그저 비즈니스라는 원칙으로 살아온 삐딱이 같은 변호사로서의 삶,

권력형 로펌의 수장을 장인으로 뒀지만, 불륜으로 인해 파탄에 이른 결혼 생활 등...

그런 스모토 앞에 나타난 작은 스낵바의 종업원 료코는 한줄기 빛 같은 존재였습니다.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를 내보일 수 있었고, 언제든 위로받을 수 있는 안락한 도피처였으며,

죄책감이나 수치심 없이 몸을 섞을 수 있는 파트너였습니다.

 

료코의 가족사와 과거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언급하지 않겠지만,

정말 기구하다라는 표현이 이보다 잘 어울리는 캐릭터는 없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스모토에게 있어 료코가 인생에서 처음 만난 해방구 같은 존재였다면

료코에게 있어 스모토는 과거를 영원히 봉인시켜줄 마지막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그녀의 행복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녀를 스모토의 곁에서 떼어낸 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보내버렸습니다.

 

캐릭터는 단단하고, 서사는 빈틈없으며, 사건은 반전을 거듭하며 진실을 토해냅니다.

장점과 미덕이 많은 작품임에 틀림없지만, 역시 아쉬운 점도 분명히 있는 작품입니다.

크게 두 가지만 얘기하자면, 하나는 분량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미스터리의 해법입니다.

다 읽고 돌아보면 그리 많은 분량을 할애할 이유가 없었던 에피소드가 꽤 생각나는데,

그런 부분들을 정리했다면 500페이지 내외에서 충분히 마무리될 수 있었다는 느낌입니다.

사건의 규모나 밝혀지는 진실의 깊이로 봐도 688페이지는 좀 과하게 넘쳤다는 생각입니다.

 

미스터리의 해법을 언급한 이유는,

후반에 이르러 독자들이 따라잡기에는 무리일 정도로 스모토의 추리가 폭주하기 때문입니다.

한 장의 사진을 통해, 한 줄의 진술을 통해 진상을 알 것 같다.”는 모습이 종종 나오는데

충분한 단서나 개연성이 제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방대한 진실을 설명하는 스모토의 추리는

몇 번을 되읽어도 왜 저런 결론에 도달했나?”를 이해하기 힘들 만큼 홀로 앞서갑니다.

특히 결정적인 반전에 관해 몇 번이고 반복되는 이런 폭주 추리

엔딩에서 만끽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상당 부분 감소시킨 것이 사실입니다.

줄거리는 잊어도 엔딩만큼은 기억나게 만드는 작품들이 다수 있는데,

환상의 여자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더 슬림했으면, 좀더 친절한 엔딩이었으면, 하는 두 가지 아쉬움 외에는

제물의 야회이후 대체로 만족스러운 가노 료이치와의 만남이었습니다.

한국에는 이 두 편밖에 소개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최근 다양한 작풍의 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세계를 넓히고 있다.”는 소개글이 있긴 하지만,

그의 주 무기인 하드보일드 풍의 작품이 좀더 많이 소개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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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의 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0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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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통성 없는 옹고집에 질서정연함을 좋아하고, 불의를 지나치지 못하던 안조 세이지는

패전 직후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경관의 길에 들어섭니다.

단호한 원칙주의자면서도 진심으로 이웃을 대하는 태도 덕분에 호감을 사게 되지만,

그가 주재소 경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깊숙이 개입했던 두 건의 살인사건은

그 자신은 물론 손자에 이르기까지 깊고 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비극의 출발점이 됩니다.

 

아버지 세이지에게 영향을 받아 경관의 길을 선택한 안조 다미오는

우수한 재능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스파이역할을 부여받게 됩니다.

애초 아버지의 뒤를 이어 주재소 경관이 되고자 했던 그에게

자신과 남을 완벽하게 속여야 하는 스파이 역할은 엄청난 후유증을 남깁니다.

게다가 아버지의 죽음과 그가 조사하던 두 살인사건에 의문을 품게 되면서

헤어나기 힘든 어둡고 긴 터널 속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 대한 애증을 간직한 안조 가즈야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경관의 길을 택합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흔적을 쫓던 가즈야는 오래된 단서들과 증인, 목격자들을 통해

전혀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할아버지가 쫓던 두 살인사건의 진상과 할아버지가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은 물론

스파이였던 아버지의 삶과 철저히 숨겨졌던 비밀까지 전부 알게 된 것입니다.

 

● ● ●

 

4~5년 쯤 분권 상태로 읽을 때는 몰랐지만,

700페이지에 이르는 합본을 지켜보고 있으니 만만찮은 분량의 부담이 밀려옵니다.

하지만, 흐릿하긴 해도, 대하(大河)급의 묵직한 서사를 만끽했던 일이 기억나는 것을 보면

역시 이만한 분량이 제대로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생각도 동시에 듭니다.

 

60년에 이르는 경관 3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경관의 피는 두 가지 축으로 진행됩니다.

하나는 1957년 안조 세이지의 의문사와 그가 수사하던 두 살인사건의 진상을

아들 안조 다미오와 손자 안조 가즈야가 수십 년의 시간에 걸쳐 추적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세이지-다미오-가즈야 등 3대가 각각 겪은 다양한 에피소드들입니다.

더불어 아버지나 남편, 혹은 형이나 오빠를 경관으로 둔 가족들의 이야기가 섞여 있습니다.

 

첫 번째 축이 700페이지를 관통하는 미스터리의 핵심이라면,

두 번째 축은 세 명의 안조가 짊어져야 했던 경관으로서의 삶과 가장으로서의 삶을

시대의 변화상과 함께 느리지만 묵직하게, 소박하지만 디테일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경찰 미스터리이면서 동시에 시대소설이자 사회소설,

또 한편으로는 3대에 걸친 가족소설이라는 복합적인 인상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시대와 사회에 의해 구속받지만 그에 저항하는 지난한 개인의 삶

장르를 불문하고 언제나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소재입니다.

시대와 사회가 너무 강조되면 픽션의 매력이 떨어지고,

개인에게만 집착하면 캐릭터의 존재감과 서사의 무게가 한없이 가벼워질 뿐입니다.

경관의 피는 패전 직후, 고도성장기, 거품경제 등 일본의 굴곡진 현대사와

그 안에서 경관으로서 구속과 저항을 반복했던 세 명의 안조를 잘 버무린 덕분에

시대와 사회, 개인이 모두 살아있는 제대로 된 대하급 서사를 완성한 작품입니다.

주인공들의 꿈이나 희망만이 아니라, 기쁨도 고뇌도 편견도 시대의 규정 속에 있다.”라는

작가 사사키 조의 글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복잡하고 대단한 반전을 기대한 미스터리 독자에게는

대하 또는 고전의 향기가 더 짙게 느껴지는 경관의 피의 서사가 조금은 지루할 수 있습니다.

60년에 걸쳐 세 명의 안조가 쫓은 살인사건과 그 진상은 잔혹하지도 극적이지도 않고,

그들이 각각 겪은 개별 사건 역시 흥미보다는 진정성에 더 방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경관의 피의 매력과 존재감은 바로 거기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단순히 수사를 하고, 범인을 잡는 단선적인 경관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택한 경관의 길을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 열심히 살았던 세 명의 인생행로는

험난한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양은 조금씩 달라도 진한 감동을 주기 때문입니다.

언뜻 손에 잡히는 두툼한 분량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일본 경찰소설에 입문하거나 그 기초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싶은 독자라면,

또 금세 잊힐 가벼운 이야기에 질려 감동과 여운이 담긴 묵직한 서사를 읽고 싶은 독자라면

조금은 넉넉한 여유를 갖고 경관의 피를 완독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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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의 살인 하야미 삼남매 시리즈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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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금 판정을 받은 잔혹한 묘사와 마지막 반전으로 유명한 살육에 이르는 병부터

코믹 청춘 탐정 미스터리로 분류되는 '인형 탐정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극과 극을 달리는 작품들을 선보였던 아비코 다케마루의 신작입니다.

일본 출간 시기로 따지면 살육에 이르는 병이전의 작품이며 거의 데뷔작이나 마찬가지라

초기 아비코 다케마루의 성향을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후반부에 실린 작가 후기에는 살육에 이르는 병만 알고 있는 독자들에겐

제법 충격적인(?) 아비코 다케마루의 고백이 실려 있습니다.

 

밝고 즐거운 소설을 쓰려고 유의하고는 있습니다만 역시 미스터리 소설에서는

살인사건이 주류이고, 살인 동기는 쓰면 쓸수록 어두워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것이 딜레마입니다만 이 작품을 읽으실 때는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증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모 탄산 음료수처럼 개운하고 상쾌한 미스터리입니다.”

 

하야미 3남매 시리즈 중 한 편인 ‘0의 살인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B급 코믹 코드가 버무려진 본격 미스터리입니다.

무엇보다 3남매의 캐릭터가 눈길을 끄는데,

경시청 수사 1과 경위 하야미 교조는 거구의 무술 유단자지만

35살 미혼에 애인 하나 없는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며,

어디 멋진 여자 없을까? 운명적인 만남이 굴러들어오지는 않을까?” 자문하기도 하고,

한번 꽂힌 여자 앞에선 수시로 얼굴이 빨개지는 소박한 캐릭터입니다.

제법 터울이 지는 남동생이자 카페 점주인 신지는 예리한 추리력을 지닌 반면,

여동생 이치오는 천방지축에 막무가내 식 추리로 교조의 수사에 혼선을 가중시키곤 합니다.

 

유머의 분위기가 넘치는 주인공 3남매 캐릭터에 비해

이들 앞에 던져진 살인사건은 무척 기이하고 풀기 쉽지 않은 난제입니다.

부호 노파인 후지타 가쓰의 일가족에게 닥친 독살, 추락사, 사고사 등 다양한 죽음은

어느 하나도 앞뒤 맥락이 쉽게 파악되지 않는 미스터리 투성이입니다.

괴짜 후배 기노시타와 함께 정열적으로 수사에 뛰어들었던 하야미 교조는

결국 아무 성과 없이 수사본부가 축소되고 미제로 종결되는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둔 겨울 밤, 3남매는 경찰이 포기한 몇 달 전의 사건을 놓고

안락탐정들의 난상토론을 연상시키는 추리 대결을 펼칩니다.

 

재미있는 점은 첫 장에 등장하는 독자에 대한 작가의 도전장입니다.

우선 아비코 다케마루는 독자가 지켜봐야 할 용의자 4명을 공개합니다.

심지어 나머지 인물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자신 있게 밝힙니다.

압권은 다분히 도발적인 냄새를 풍기는 마지막 멘트입니다.

 

간단한 문제이니만큼 대부분의 독자는 종막 전에 진상을 간파하겠지만,

백 명 중 한 명쯤은 모르는 분도 있지 않을까요. 당신도 그 한 명이기를 바랍니다.”

 

고백하자면 작가의 예상대로(?) ‘진상을 파악 못한 백 명 중 한 명이 돼버렸지만,

그만큼 아비코 다케마루가 짜놓은 촘촘한 본격 미스터리의 재미를 맛볼 수 있었다는 뜻이고,

마지막에 밝혀지는 진실들은 엄청난 반전은 아니더라도

나름 오호~”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할 만큼 신선한 충격을 담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유머 코드가 섞인 미스터리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0의 살인은 적절한 선에서 유머과 미스터리를 믹스한 덕분에

읽으면서도 크게 불편하거나 위화감을 느끼진 못했습니다.

분량도 가벼워서 몇 시간이면 충분히 완주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물론 살육에 이르는 병이나 미륵의 손바닥처럼 잔혹한 서사에 더 꽂힌 탓에

그런 방면의 신작이 더 기대되고 기다려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초기 아비코 다케마루의 자뻑 만발한 하야미 3남매 시리즈역시

후속작의 출간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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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밟기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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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한 '사전 서평단 가제본'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전설의 밤털이 마카베 슈이치가 교도소에서 출소한 이후 1년 여간 겪은 다양한 일상들을

미스터리 형식으로 꾸민 연작소설집입니다.

(밤털이는 빈집털이와 달리 밤에 사람이 있는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는 자를 말합니다)

미스터리를 파헤치고 비밀을 캐는 것은 당연히 주인공 마카베의 몫인데,

형사나 탐정, 또는 검시관 등 제도권에 있는 인물이 아니라

출소한 후에도 여전히 밤털이를 하며 먹고사는 도둑이 탐문과 수사를 벌이다 보니

의외의 재미나 감동을 주는 에피소드들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마카베는 자신이 검거되기 직전 목격했던 살인음모를 은밀히 파헤치는가 하면,

자신을 눈엣가시이자 먹잇감으로 여겼던 한 형사의 죽음의 진실을 추적하기도 하고,

동종업자들을 향한 야쿠자의 무차별 다구리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누군가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증거 수집 차 남의 건물에 잠입하는가 하면,

아버지를 잃은 소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하기 위해 밤털이의 재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이런 에피소드 속에서 마카베는 웬만한 형사나 탐정 이상의 추리력을 발휘하는데,

완력과 권위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관할 경찰서의 형사들과는 재미있는 대비를 보여줍니다.

처음엔 사소한 단서만으로 모든 것을 알아냈어.”라는 식의 마카베 식 추리가 좀 어색했지만

이어지는 부연설명을 보면 논리와 직관을 겸비한 뛰어난 추리였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마카베가 7편의 에피소드에서 펼치는 미스터리 자체도 흥미롭지만,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마카베의 파트너로 등장하는 쌍둥이 동생 게이지의 존재입니다.

사실 게이지는 15년 전 비극적인 사고로 죽었지만,

지금은 형 마카베의 귓속뼈 어딘가에 자리를 잡은 채

끊임없이 형과 소통하는 일종의 고스트(ghost) 캐릭터입니다.

두 사람은 비극적인 가족사를 공유했고, 한 여인을 사랑한 불편한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마카베는 한때 게이지의 존재를 저주하기도 했지만,

가족에게 닥친 끔찍한 불행 이후 게이지를 자신의 곁에 머물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죄책감에 휩싸인 그만의 고유한 동생 사랑법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마카베는 동생 게이지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쌍둥이란 서로가 서로의 그림자를 밟으려 하며 살아가는 존재였다.

하지만 (쌍둥이였다가) 혼자가 되었다는 건 외톨이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그림자를 잃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승에 미련이 남은 게이지가 마카베의 마음에서 떠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마카베가 불러들인 것이다.

동생을 아무 데도 보내고 싶지 않아서, 그림자가 없는 어둠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그래서 게이지의 영혼을 불러들여 자기 안에 붙잡아둔 것이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사실 빈틈없이 완벽한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요코야마 히데오가

판타지 또는 환상적인 요소를 끌어들인 점은 의외였습니다.

극단적인 설정 속에서도 묵직한 사실감과 따뜻한 감동을 맛깔나게 버무리는 필력 덕분에

그의 광팬이 된 입장에서 게이지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코야마 히데오는 급하지 않게, 억지스럽지 않게 독자를 설득합니다.

왜 마카베가 게이지를 자신의 곁에 머물게 했으며,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듯 걱정하고, 존중하고, 염려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가 게이지에게 갖고 있는 마치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감정의 정체는 무엇인지 등을

7편의 에피소드를 진행시키면서 조금씩 조금씩 독자들에게 털어놓습니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게이지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고,

더 이상 큰 거부감 없이 페이지를 넘길 수 있게 됩니다.

 

고백하자면,

요코야마 히데오의 신작 소식이 들리기에

‘64’클라이머즈 하이처럼 분량과 내용 모두 묵직한 대작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림자밟기역시 얼굴이나 종신검시관에서 보여준

요코먀아 히데오 특유의 소소한 단편을 통한 감동과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밤털이 마카베의 어딘가 시니컬한 캐릭터 덕분에 만족스러운 책읽기를 경험할 수 있었지만,

다음엔 요코야마 히데오의 진면목을 맛볼 수 있는 진짜 대작을 만나보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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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구 나와 23인의 노예 1 - 소설
오카다 신이치 지음, 이승원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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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일본 장르물에서 맛볼 수 있는 판타지의 영역은 정말 넓고 다양한 것 같습니다.

애니메이션에 기반을 둔 자유로운 상상력과 기발한 설정을 이끌어내는 창작력을 통해

독특한 서사를 구축한 작품들을 볼 때마다 신기하면서도 한편 부러운 느낌까지 들곤 합니다.

 

치아교정기를 닮은 SCM(Slave Control Method)은 그것을 착용한 사람끼리 게임을 벌여

이긴 사람이 패자를 노예로 만들 수 있는 특별한 장치입니다.

주인끼리 게임을 할 경우 승자는 상대방의 노예까지 모두 확보할 수 있으며,

감정까지 통제하진 못하지만 대부분의 행위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됩니다.

 

1권에서는 모두 11명의 인물이 등장하여 치열하게 노예 만들기 게임에 뛰어듭니다.

단순히 금전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노예를 확보하려는 사람도 있고,

자신을 유린한 남자들에게 복수하려는 여자,

오로지 성적 착취를 위해 여자 노예를 구하려는 남자,

사랑하는 남자를 자신의 곁에 두려는 여자,

스릴감과 정복감을 누리기 위해 게임 자체를 즐기는 사람 등

다양한 인물들이 서로 먹고 먹히는 SCM 게임을 벌입니다.

 

자칫 엇비슷한 에피소드가 반복될 수 있는 단편들이지만

작가는 다양한 게임 룰과 서로 얽히고설킨 인물 간의 관계도를 만들어냄으로써

매 에피소드마다 강한 개성들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수시로 주인이 바뀌는가 하면, 주종 관계가 역전되기도 하고,

GPS를 통해 SCM 착용자의 위치를 추적하는 스릴러의 묘미도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 에피소드가 전개되면서 앞서 등장한 인물이 새로운 인물과 관계를 맺게 되고,

그 관계가 파벌로 발전하면서 점점 거대한 대결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하기도 합니다.

 

또한 단순히 게임을 통한 노예 확보라는 말초적 재미를 넘어

통제 가능한 인간 노예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근원적인 욕망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점은

이 작품을 평범한 엔터테인먼트 소설로만 치부할 수 없게 만듭니다.

딱히 어떤 철학적 주제나 도덕적 함의를 지닌 작품은 아니지만,

욕하면서도 한편으로 갖고 싶은 무한한 폭력적 권력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만들기도 하고,

노예로 전락한 삶에 대한 공포와 전율을 제대로 맛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나름 고유한 미덕과 주제 의식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좀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는 2권에서 어떤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애당초 SCM이라는 기발한 도구를 만들어낸 창조주의 실체와 목적이 무엇인지,

, 이미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서 도 아니면 모의 삶을 강요받은 등장인물들이

자신 앞에 놓인 예정된 비극에 대해 어떤 식으로 대처할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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