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여자 밀리언셀러 클럽 137
가노 료이치 지음, 한희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일본 미스터리 작품으로는 꽤나 방대한 분량(688페이지)의 작품입니다.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몇 년 전에 읽은 가노 료이치의 제물의 야회656페이지더군요.

기억의 오류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제물의 야회는 그리 길다는 느낌을 못 받았던 것 같은데

환상의 여자는 다루고 있는 사건의 규모 때문인지 조금은 분량의 부담을 느꼈습니다.

 

처음엔 제목만 보고 윌리엄 아이리시의 작품이 황금가지에서 다시 나왔나 오해했습니다.

물론 오해는 금세 풀렸지만, 초반에 여주인공 고바야시 료코가 사라지는 대목을 읽다보니

왠지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이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환상의 여자역시 그녀는 과연 누구인가?”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 ● ●

 

5년 만에 우연히 마주친 옛 연인 고바야시 료코가 다음날 무참히 살해된 채 발견되자

변호사 스모토 세이지는 모든 일을 중지시키고 그녀의 죽음을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친인척을 찾기 위해 그녀의 고향까지 찾아갔던 스모토는 뜻밖의 상황에 처하면서,

그가 알고 있던 료코는 진짜 료코인가?”라는 당혹스러운 자문을 하게 됩니다.

또한 그녀가 살해된 현장을 조사하다가 괴한의 습격을 받는가 하면,

그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여러 폭력단이 연루된 사실까지 알게 됩니다.

 

흥신소장 기요노, 호스티스 사요코와 함께 갖은 위험을 무릅쓴 스모토의 조사는

결국 10여 년 전 그녀의 고향에서 벌어졌던 두 건의 살인사건까지 닿게 되고,

거기에서 스모토는 탐욕을 채우기 위해 야차처럼 날뛰었던 악당들의 실체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쉽게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스모토 일행은 오히려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단지 그녀를 위해서라는 명분 하나만으로 집요하게 자료를 모으고 사람들을 만나보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스모토가 손에 쥔 진실은 참담하고 가슴 아픈 료코의 과거사일 뿐입니다.

 

● ● ●

 

크게 보면 심플한 구조를 갖고 있지만

작가는 캐면 캘수록 끝없이 딸려 나오는 고구마 줄기처럼

고바야시 료코의 과거에 연루된 인물과 사건을 복잡다단하게 설정함으로써

7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시점인가부터는 인물과 지역, 사건 등을 메모하면서 읽게 됐는데,

30여 년 동안 세토 내해에서부터 오사카, 나고야, 도쿄를 전전했던 료코의 삶을

촘촘하고 빈틈없이 구성한 작가의 필력에 여러 번 놀라곤 했습니다.

 

사건에만 집중했다면 아마 4~500페이지 내외에서 마무리 될 수 있었겠지만,

작가는 스모토와 료코 두 남녀의 고통스런 가족사와 심리 묘사에 적잖은 분량을 할애함으로써

단순한 사건해결 미스터리를 넘어 묵직한 한 편의 비극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변호사 스모토 세이지의 인생은 한시도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오직(汚職)으로 공무원에서 퇴출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버지,

정의란 그저 비즈니스라는 원칙으로 살아온 삐딱이 같은 변호사로서의 삶,

권력형 로펌의 수장을 장인으로 뒀지만, 불륜으로 인해 파탄에 이른 결혼 생활 등...

그런 스모토 앞에 나타난 작은 스낵바의 종업원 료코는 한줄기 빛 같은 존재였습니다.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를 내보일 수 있었고, 언제든 위로받을 수 있는 안락한 도피처였으며,

죄책감이나 수치심 없이 몸을 섞을 수 있는 파트너였습니다.

 

료코의 가족사와 과거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언급하지 않겠지만,

정말 기구하다라는 표현이 이보다 잘 어울리는 캐릭터는 없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스모토에게 있어 료코가 인생에서 처음 만난 해방구 같은 존재였다면

료코에게 있어 스모토는 과거를 영원히 봉인시켜줄 마지막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그녀의 행복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녀를 스모토의 곁에서 떼어낸 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보내버렸습니다.

 

캐릭터는 단단하고, 서사는 빈틈없으며, 사건은 반전을 거듭하며 진실을 토해냅니다.

장점과 미덕이 많은 작품임에 틀림없지만, 역시 아쉬운 점도 분명히 있는 작품입니다.

크게 두 가지만 얘기하자면, 하나는 분량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미스터리의 해법입니다.

다 읽고 돌아보면 그리 많은 분량을 할애할 이유가 없었던 에피소드가 꽤 생각나는데,

그런 부분들을 정리했다면 500페이지 내외에서 충분히 마무리될 수 있었다는 느낌입니다.

사건의 규모나 밝혀지는 진실의 깊이로 봐도 688페이지는 좀 과하게 넘쳤다는 생각입니다.

 

미스터리의 해법을 언급한 이유는,

후반에 이르러 독자들이 따라잡기에는 무리일 정도로 스모토의 추리가 폭주하기 때문입니다.

한 장의 사진을 통해, 한 줄의 진술을 통해 진상을 알 것 같다.”는 모습이 종종 나오는데

충분한 단서나 개연성이 제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방대한 진실을 설명하는 스모토의 추리는

몇 번을 되읽어도 왜 저런 결론에 도달했나?”를 이해하기 힘들 만큼 홀로 앞서갑니다.

특히 결정적인 반전에 관해 몇 번이고 반복되는 이런 폭주 추리

엔딩에서 만끽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상당 부분 감소시킨 것이 사실입니다.

줄거리는 잊어도 엔딩만큼은 기억나게 만드는 작품들이 다수 있는데,

환상의 여자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더 슬림했으면, 좀더 친절한 엔딩이었으면, 하는 두 가지 아쉬움 외에는

제물의 야회이후 대체로 만족스러운 가노 료이치와의 만남이었습니다.

한국에는 이 두 편밖에 소개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최근 다양한 작풍의 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세계를 넓히고 있다.”는 소개글이 있긴 하지만,

그의 주 무기인 하드보일드 풍의 작품이 좀더 많이 소개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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