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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의 살인 ㅣ 하야미 삼남매 시리즈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잔혹한 묘사와 막판 반전으로 유명한 ‘살육에 이르는 병’부터 코믹 청춘미스터리로 분류되는 ‘인형 탐정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극과 극을 달리는 작품들을 선보였던 아비코 다케마루의 신작입니다. 일본 출간 시기로 따지면 ‘살육에 이르는 병’ 이전의 작품이며 거의 데뷔작이나 마찬가지라서 초기 아비코 다케마루의 성향을 맛볼 수 있습니다.
“밝고 즐거운 소설을 쓰려고 유의하고는 있습니다만 역시 미스터리 소설에서는 살인사건이 주류이고, 살인 동기는 쓰면 쓸수록 어두워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것이 딜레마입니다만 이 작품을 읽으실 때는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작품은 모 탄산 음료수처럼 개운하고 상쾌한 미스터리입니다.”
‘하야미 3남매 시리즈’ 중 한 편인 ‘0의 살인’은 한마디로 정의하면 B급 코믹 코드가 버무려진 본격 미스터리입니다. 무엇보다 3남매의 캐릭터가 눈길을 끄는데, 경시청 수사1과 경위 하야미 교조는 거구의 무술 유단자지만 35살 미혼에 애인 하나 없는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며 “어디 멋진 여자 없을까? 운명적인 만남이 굴러들어오지는 않을까?” 자문하기도 하고, 한번 꽂힌 여자 앞에선 수시로 얼굴이 빨개지는 소박한 캐릭터입니다. 제법 터울이 지는 남동생이자 카페 점주인 신지는 예리한 추리력을 지닌 반면, 여동생 이치오는 천방지축에 막무가내 식 추리로 교조의 수사에 혼선을 가중시키곤 합니다.

유머러스한 3남매 캐릭터에 비해 이들이 마주한 살인사건은 무척 기이하고 풀기 쉽지 않은 난제입니다. 부호 노파인 후지타 가쓰의 일가족에게 닥친 독살, 추락사, 사고사 등 다양한 죽음은 어느 것 하나 앞뒤 맥락이 쉽게 파악되지 않는 미스터리입니다. 괴짜 후배 기노시타와 함께 정열적으로 수사에 뛰어들었던 하야미 교조는 결국 아무 성과 없이 수사본부가 축소되고 미제로 종결되는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둔 겨울 밤, 3남매는 경찰이 포기한 사건을 놓고 안락탐정들의 난상토론을 연상시키는 추리 대결을 펼칩니다.
재미있는 점은 첫 장에 등장하는 작가의 ‘도전장’입니다. 우선 아비코 다케마루는 독자가 지켜봐야 할 용의자 4명을 공개합니다. 심지어 나머지 인물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자신 있게 밝힙니다. 압권은 다분히 도발적인 냄새를 풍기는 마지막 멘트입니다.
“간단한 문제이니만큼 대부분의 독자는 종막 전에 진상을 간파하겠지만, 백 명 중 한 명쯤은 모르는 분도 있지 않을까요. 당신도 그 한 명이기를 바랍니다.”
고백하자면 작가의 예상대로(?) ‘진상을 파악 못한 백 명 중 한 명’이 돼버렸지만, 그만큼 아비코 다케마루가 짜놓은 촘촘한 본격 미스터리의 재미를 맛볼 수 있었다는 뜻이고, 마지막에 밝혀지는 진실들은 엄청난 반전은 아니더라도 나름 “오호~”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할 만큼 신선한 충격을 담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유머 코드가 섞인 미스터리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0의 살인’은 적절한 선에서 유머와 미스터리를 믹스한 덕분에 읽으면서도 크게 불편하거나 위화감을 느끼진 못했습니다. 분량도 가벼워서 몇 시간이면 충분히 완주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살육에 이르는 병’이나 ‘미륵의 손바닥’처럼 잔혹한 서사에 더 꽂힌 탓에 그런 방면의 신작이 기대되고 기다려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초기 아비코 다케마루의 자뻑 만발한 ‘하야미 3남매 시리즈’ 역시 후속작의 출간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