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림자 밟기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5년 3월
평점 :
(출판사에서 제공한 '사전 서평단 가제본'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전설의 밤털이(빈집털이와 달리 밤에 사람이 있는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는 자) 마카베 슈이치가 교도소에서 출소한 이후 1년 여간 겪은 다양한 일상들을 미스터리 형식으로 꾸민 연작 단편집입니다. 미스터리를 파헤치고 비밀을 캐는 것은 당연히 주인공 마카베의 몫인데, 형사나 탐정 등 ‘제도권’ 속 인물이 아니라 출소한 후에도 여전히 밤털이로 먹고사는 ‘도둑’이 탐문과 수사를 벌이다 보니 의외의 재미나 감동을 주는 에피소드들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마카베는 자신이 검거되기 직전 목격했던 살인음모를 은밀히 파헤치는가 하면, 자신을 눈엣가시이자 먹잇감으로 여겼던 한 형사의 죽음의 진실을 추적하기도 하고, 동종업자들을 향한 야쿠자의 무차별 ‘다구리’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누군가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증거 수집 차 남의 건물에 잠입하는가 하면, 아버지를 잃은 소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하기 위해 밤털이의 재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이런 에피소드들 속에서 마카베는 웬만한 형사나 탐정 이상의 추리력을 발휘하는데, 완력에 기대어 권위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관할 경찰서의 형사들과는 재미있는 대비를 보여줍니다. 처음엔 사소한 단서만으로 “모든 것을 알아냈어!”라는 식의 마카베 식 추리가 좀 어색했지만. 이어지는 부연설명을 보면 논리와 직관을 겸비한 뛰어난 추리였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마카베의 밤털이 캐릭터나 미스터리 스타일도 눈길을 끌지만 사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마카베의 ‘파트너’로 등장하는 쌍둥이 동생 게이지입니다. 게이지는 15년 전 비극적인 사고로 죽었지만, 지금은 형 마카베의 귓속뼈 어딘가에 자리를 잡은 채 끊임없이 형과 소통하는 일종의 고스트(ghost) 캐릭터입니다. 두 사람은 비극적인 가족사를 공유했고, 한 여인을 사랑한 불편한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마카베는 한때 게이지의 존재를 저주하기도 했지만, 가족에게 닥친 끔찍한 불행 이후 게이지를 자신의 곁에 머물게 했습니다. 그것은 죄책감에 휩싸인 그만의 고유한 ‘동생 사랑법’이었습니다.
“쌍둥이란 서로가 서로의 그림자를 밟으려 하며 살아가는 존재였다. 하지만 (쌍둥이였다가) 혼자가 되었다는 건 외톨이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그림자를 잃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승에 미련이 남은 게이지가 마카베의 마음에서 떠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마카베가 불러들인 것이다. 동생을 아무 데도 보내고 싶지 않아서, 그림자가 없는 어둠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그래서 게이지의 영혼을 불러들여 자기 안에 붙잡아둔 것이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빈틈없이 완벽한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요코야마 히데오가 판타지 또는 환상적인 요소를 끌어들인 점은 의외였습니다. 극단적인 설정 속에서도 묵직한 사실감과 따뜻한 감동을 맛깔나게 버무리는 필력 덕분에 그의 팬이 된 입장에서 게이지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코야마 히데오는 급하지 않게, 억지스럽지 않게 독자를 설득합니다. 왜 마카베가 게이지를 자신의 곁에 머물게 했으며,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듯 걱정하고 존중하고 염려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가 게이지에게 갖고 있는 마치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감정의 정체는 무엇인지 등을 일곱 편의 에피소드를 진행시키면서 조금씩 조금씩 독자들에게 털어놓습니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게이지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고, 더 이상 큰 거부감 없이 페이지를 넘길 수 있게 됩니다.
고백하자면, 요코야마 히데오의 신작 소식이 들리기에 ‘64’나 ‘클라이머즈 하이’처럼 분량과 내용 모두 묵직한 대작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림자밟기’ 역시 ‘얼굴’이나 ‘종신검시관’에서 맛봤던 요코먀아 히데오 단편집 특유의 감동과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밤털이 마카베의 어딘가 시니컬한 캐릭터 덕분에 만족스러운 책읽기를 경험할 수 있었지만, 다음엔 요코야마 히데오의 진면목을 맛볼 수 있는 진짜 대작을 만나보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