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중의 일과 제사 지내는 일은 남의 자식 된 자로서 가장 정성을 다할 일이다. 이미 돌아가신부모는 다시 봉양할 수 없다. 그러하니 상중에 예를 다하지 못하고 또 제사 때 정성을 다하지못한다면 하늘이 다하도록 아픈 마음을 어디다 풀 것이며, 또 어느 때에 풀 것인가? 그렇다면사람의 자식 된 정리가 어떻겠는가?

증자는 말하기를, "부모가 돌아갔을 때 일을 삼가서 하고 돌아간 뒤에 부모를 생각한다면 백성들의 덕을 생각하는 마음씨가 두터운 곳으로 돌아가리라"했다. 그런즉 사람의 자식 된 자들은 마땅히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이다.

예기 제의(祭儀篇)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서리와 이슬이 이미 내리면 군자는 이것을 밟고반드시 슬픈 마음이 있는 것이니, 이것은 추위가 온다고 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또 봄이되어 비와 이슬이 내려도 군자는 이것을 밟고 반드시 놀라는 마음이 있는 것이니 이는 세월이가는 것을 놀라는 것이다"

서리가 왔다고 해서 취위를 느껴서 놀라는 것이 아니다. 비나 이슬이 내렸다고 해서 따뜻한것을 생각하여 놀라는 것이 아니다. 봄은 오는데 우리 부모는 왜 오시지 못하는가 하는 마음, 가을이 왔어도 부모는 다시 뵐 수 없겠지 하는 마음, 그것을 우리는 배우고 본받아야 할 것이다.

공자가 그의 제자 증자에게 한 효도에 대한 이야기 몇 구절을 소개한다. "부모가 나를 낳으셨으니 대를 잇는 것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임금이 친히 다스리시니 나에게 후하게 하는것이 이보다 더 중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제 부모를 사랑하지 않고 남을 사랑하는 자를 가리켜 덕을 거스른다고 하고, 또 제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남을 공경하는 자를 가리켜 예를 거스른다고 하는 것이다"

"부모를 섬기는 자는 윗자리에 있으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아랫자리에 있으면서도 어지러움을피우지 않고, 추한 데 있으면서도 남과 다투지 않는다. 윗자리에 있으면서 교만하면 그 사람은 망하는 법이요.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어지러움을 피우면 형벌을 받게 마련이요, 추한 곳에있으면서 남과 다투면 남에게 해를 입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 가지를 버리지 않고서는 아무리 날마다 소나 양, 돼지 같은 세 가지 고기를 봉양한다 해도 불효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서 효자로 이름이 높은 증자의 말 몇 구절을 더 인용한다. "효자가 늙은 부모를 봉양할 때는 그 마음을 기쁘게 하며, 그 뜻을 어기지 말며, 그 귀와 눈을 즐겁게 해 드리며, 자고 쉬는 곳을 편하게 해 드리며, 또 음식을 맛있게 해서 봉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부모가 사랑하는 바를 자기도 역시 사랑하며, 부모가 공경하는 바를 자기도 역시 공경하는 것이다. 개나 말도 모두 그러한데 하물며 사람은 어떠하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경(詩經)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 아버님은 나를 낳으시고, 우리 어머님은 나를 길러 주셨네. 내 그 은혜를 갚고자 하면 저 하늘과 같이 끝이 없네.‘사람의 자식 된 자가 부모에게 그생을 받았으니 성명(性)과 피와 살은 모두 부모가 주신 것이다. 그래서 숨 쉬고 호흡하게 되며, 기운과 혈맥이 통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이 몸은 나의 사사로운 물건이 아니고 곧 부모가남겨 주신 기운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슬프다. 우리 부모님이시여! 나를 낳으시느라 애쓰셨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모두 부모가 길러 준 은혜를 입고서도 자기 힘으로 그 부모를 봉양하지 못한다. 만일 이렇게 그대로 세월을 보내면 끝내 충성되게 부모를 봉양할 시기가 없을 것이다.

날마다 하는 일이나 또 아무리 짧은 시간일지라도 부모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한 뒤에라야 비로소 효도한다는 말을 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만일 몸가집을 삼가지 않고 말을 하는데도 법도 없이 그저 웃고 노닐면서 세월을 보내는 자는 모두 그 부모를 잊은 자다.

제 부모를 사랑하는 자는 감히 남을 미워하지 못하고, 제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감히 남을 업신여기지 못한다. 이렇게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제 부모에게 다하고 보면 덕스러운 가르침이 백성들에게까지 미쳐서 천하가 본받게 될 것이니 이것은 대개 천자가 해야 할 효도이다.

대체로 하늘이 낳은 물건과 땅이 길러낸 물건 중에서 오직 사람이 제일 위대하다고 하셨다.
이렇게 위대한 사람을 부모가 온전히 낳아 주셨으니 자식된 자로서 온전한 몸뚱이로 돌아가야만 과연 효도라고 할 것이다. 즉 자기 몸뚱이를 망가뜨리지 말고 자기 몸을 욕되게 하지 않는것이 바로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몇 발자국 걸음을 걷는 동안에도 잠시도 이 효도를 잊지 않는 법이다.

증자는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스스로 정성을 다했다고 하는 자는 없을 것이니 이것은 반드시 그 부모가 죽었을 때의 일이다."과연 부모가 죽어서 장사 지내는 일은 실로 부모를 섬기는 큰 예절이다. 여기에 자기의 정성을 다하지 않는다면 어디에다 그 정성을 쓰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라는 자의식은 실체라기보다는 하나의 기능이며 현상이다.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나‘는 자동차라는 실체보다는 자동차의 ‘달리기‘에 해당한다. ‘나‘라는 개념은 그래서 명사가 아닌 동사다. ‘자아‘는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정보를 처리하며 끊임없이 소통한다. 좀 더 정확히말하면, 지속적인 내면소통의 과정 자체가 바로 ‘자아‘다.

의식은 다양한 경험들을 하나의 플롯으로 만들어서 의미 있는 사건으로 구성해낸다. 의식의본질은 이러한 ‘플롯 만들기(emplotment)‘에 있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먼저 있고 나서 내가 생각도 하고 소통도 한다고 느끼지만 사실 이는환상에 불과하다. 내가 하는 생각과 의식 자체가 이미 하나의 소통이다. 즉 ‘나‘는 내가 하는소통 그 자체다. 내가 소통을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실 ‘나‘는 내가 하는 소통의 결과로 생산되는 것이다.

우리 뇌는 점차 진화하면서 일차적인 시스템이 제공하는 정보들을 종합하고 이에 다양한 의미와 스토리텔링을 부여하는 이차적인 시스템을 만들어냈는데, 이것이 곧 의식이다. 결국 우리의 ‘의식‘은 다양한 하위 시스템들이 서로 경쟁하고 선택적으로 통합되면서 떠오르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나‘라고 생각하는 존재는 세상에 드러나는 존재이고, 행동하고 생각하는존재이며, 느끼고 반응하는 존재다.

이렇게 의식에 드러난 ‘나‘가 곧 자아인데, 자아는 기억의 덩어리이고 따라서 이야기의 덩어리다. 자아를 이루는 모든 기억은 이야기 형태로 저장된다. 내가 무언가 의도를 갖고 행동할 때그러한 행위를 결정하고 실행하는 실체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나‘다.

‘드러나는 나‘ 혹은 ‘앞에 있는 나‘의 뒤에는 항상 나를 바라보고 지켜보는 ‘또 다른 나‘가 있다. 이 ‘또 다른 나‘는 일상적인 경험을 하는 나, 즉 ‘경험자아(figure self)‘를 언제나 뒤에서지켜본다

이렇게 ‘드러나는 나‘의 뒤에서 항상 ‘나‘를 지켜보고 배경으로 존재하는 좀 더 근본적인 자아가 있는데 이를 "배경자아(background self)‘라고 한다.

우리는 배경자아의 존재를 분명히 느낄 수는 있으나 하나의 대상으로서 바라보거나 인지할 수는 없다. 배경자아는 ‘인식의 주체‘ 이지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식대상이 아니기에 의식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의 생각과 언어의 세계에서 ‘나‘는 자의식을 지칭하지만, 실제로 ‘나‘는 자의식을 포괄하면서도 그것을 훨씬 더 뛰어넘는 존재다. 자의식 밖에 있으면서도 자의식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 존재가 바로 ‘배경자아‘다.

마음근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이 배경자아의 존재를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고 경험자아의 습관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을 한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경험자아가습관적으로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수동적으로 휩쓸리지 않고 건강한 방향으로 능동적으로 바꿔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배경자아와 경험자아를 동시에 느낄 수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내가 나를 훈련시키는, 내가 나를 변화시키는, 내가 나의 마음근력을 강화하는 훈련을 시작할 수 있다. 배경자아를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내면소통의 출발점이자 마음근력 훈련의 첫걸음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갈등과 괴로움을 겪는 근본적인 이유는 ‘나 자신‘이 하나의 견고한 실체로서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환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견고한 실체가 아니다. 스쳐 지나가는 봄바람 같은 존재이고, 물거품이나 이슬방울처럼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존재이며, 게다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이러한 "변치 않는 실체로서의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깨달음에서 깊은 평정심을 얻게 된다. 그래야 편도체는 차분해지고 전전두피질은 활성화된다. 그래야 깊이있는 내면소통이 가능해지며, 진정한 자유와 행복감을 누릴 수 있다. 그래야 마음근력이 강화된다.

배경자아의 목소리는 누군가에게는 때로 ‘신의 목소리‘로 들려오기도 한다. 또 누군가에게는마음속 저 깊은 곳 어디에선가 울려오는 ‘내면의 목소리‘이며, 혹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지켜보는 ‘시선‘으로만 느껴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내가 나의 마음작용과 감정을 지켜본다고 할 때그 지켜보는 주체가 바로 ‘배경자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학문을 하는자는 반드시 자기 마음을 정성껏 가지고 올바른 도를 행해서 나아가야 한다. 그자질구레한 잡된 일로 자기의 뜻을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 그런 뒤에라야 그 학문의 기초가 비로서 튼튼해지는 것이다.

이것을 주자(朱子)는 "사람이 충성과 신용이 없으면 무슨 일이나 다 실상이 없고 거짓뿐이다.
사람이란 악한 일을 하기는 쉽고 착한 일을 하기는 어렵다. 그 때문에 반드시 충성된 마음과신용을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이렇게 반드시 충성과 신용을 중심으로 해서 용맹스럽게 공부를 해나간 뒤에라야 성취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자기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수습하는 데는 구용(九容)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또 학문을 진보시키고 지혜를 더하게 하는 데는 구사(九思)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

예(禮)가 아니면 눈으로 보지 말라. 예가 아니면 귀로 듣지 말라. 예가 아니면 입으로 말하지말라.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도 말라. 이 네 가지는 곧 자기 몸을 닦아 나가는 요점이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사람이 날마다 쓰고 일해 나가는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사람이보통 거처할 때 행동을 공경히 하고, 일을 공손히 하며, 사람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하면 이것이 바로 학문을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몸을 이겨 나가는 공부는 날마다 행동하는 일을 삼가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몸이란 내 마음이 좋아하는 것이 천리(天理)에 맞지 않는 것을 말한다.

백 가지 좋아하는 것 중에서 만일 한 가지라도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이것을 모두 깨끗이 잘라 없애고, 한 오리 싹이나 한 가닥 줄기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한 뒤에라야 내 마음이 좋아하는 바가 비로소 올바른 의리에 놓이게 되므로 그대로 내버려 두어도 내몸을 저절로 이기게 될 것이다.

학문을 하는 자는 한 곳으로 도를 행해 나갈 것이고, 밖에 있는 아무 물건도 이틈을 타서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밖에 있는 물건 중 정당하지 못한 것은 일절 자기 마음속에 머물게두지 말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을 때는 이치로 따져서 그 일에 응하고, 글을 읽을 때는 정성껏 그 이치를 궁리한다. 이 두 가지 일을 제외한 그 밖의 시간에는 조용히 앉아서 자기의 마음을 수습해 거두어서 조용하게 두어 시끄러운 생각이 없도록 하고, 똑똑하게 생각해서 어둡고 아무것도 모르는실수가 없도록 해야 한다. 이른바 공경해서 속에 있는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배우는 사람은 항상 이런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물이 빈틈을 타고 침입해 들어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반드시 이치를 궁리하고 착한 것을 밝힌 뒤에라야 자기가 마땅히 행해야할 도가 뚜렷하게 앞에 있는 것 같아서 진보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대체로 글을 읽는 자는 반드시 단정하게 손을 마주 잡고 반듯하게 앉아서 공손히 책을 펴 놓고 마음을 오로지하고 뜻을 모아 정밀하게 생각하고, 오래 읽어 그 행할 일을 깊이 생각해야한다.

대체로 글을 읽는 데는 반드시 한 가지 책을 익히 읽어서 그 의리와 뜻을 모두 깨달아 통달하고 의심이 사라진 연후에라야 비로소 다른 책을 읽을 것이고, 여러 가지 책을 탐내서 이것저것을 얻으려고 바쁘고 분주하게 섭렵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넓게 배워서 뜻을 두텁게 하며 절실하게 질문하고 가깝게 생각하면 모든 어진 행동이자연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자식을 기르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비의 과실이요, 엄하게 가르치지 않는 것은 스승의 게으름일세. 아비가 가르치고 스승이 엄한데도 학문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오직 자식의죄일세.

독서, 즉 책을 읽는 즐거움은 옛날부터 문화생활의 매력의 하나로 간주되어 왔다. 그 특권이용이하게 얻어지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오늘날도 존경과 부러움을 받고 있다. 이것은 책을 읽는 사람의 생활과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의 생활을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공부를 하고 싶다면 시골 학교에서도 할 수 있다. 사막에서나 사람의 왕래가 자은 거리에서도할 수 있고, 또 나무꾼이나 목동이 되어서도 할 수 있다. 공부하고 싶은 의지가 없다면 시골학교에서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조용한 시골 가정이나 신선이 사는 섬도 공부하기에는 적당치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체계적이고 반복적인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면 근육이 생기고 몸이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꾸준히 훈련하면 마음근력이 강해지고 생각과 행동이 달라지며 성취역량이 향상된다, 한마디로 사람이 달라진다. 마음근력 훈련을 통해 자기 자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면 훈련 효과에 대한 확신이 반드시 필요하다.

효과적인 마음근력 훈련을 위해서는 먼저 변화에 대한 한계를 설정해두는 고정관념을 버려야한다. 대표적 고정관념 중 하나가 ‘유전자에 대한 환상‘이다.

마음근력 훈련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선천성이나 유전적 영향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하기때문이다.

지난 100여 년간 수많은 과학적 연구결과는 인간의 성취 역량이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줬다. 그중에서도 루이스 터먼(Lewis Terman)의 연구는 지능에 대한 환상, 즉 학업성취도나 업무성취도가 지능에 의해서 결정되고 이 지능은 유전적으로 결정된다는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버렸다.

우리가 선천적이라고 믿는 것들 가운데 상당수는 주어진 환경과 반복된 행동에 따라서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마음근력 역시 어느 정도는 유전자에 의해서 결정되나 그보다는 환경과 습관에 의해서 훨씬 더 많이 결정된다. 마음근력을 강화하고 나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후천적인 습관 형성을 위한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간다는 것이기도 하다.

유전자에 관한 수많은 연구결과를 종합해보면 유전자는 스스로 특정한 생물학적 사건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니다. 즉 특정한 유전자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발현되지는 않는다. 유전자는 일종의 설계도에 불과하다. 그 설계도를 읽는 과정이 ‘전사(transcription)‘이며 그에따라 건물을 짓는 과정이 ‘유전자 조절(generegulation)‘이다. 그런데 환경은 이러한 전사와유전자 조절 과정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마음근력을 강화해 성취역량이 커지길 원한다. 마음근력은 유전자와 환경적 요인이 상호작용으로 결정된다. 유전자는 이미 주어진 것이므로 유전자 자체를 바꾸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유전자의 작동방식과 발현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을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언제나 환경이다.

일상생활에서 반복적이고도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우리의 몸과 뇌가 경험하는 환경에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오고자 하는 것이 곧 마음근력 훈련이다.

인간의 뇌의 신경망은 나이가 든다고 해서 굳어지거나 하지 않는다. 시냅스로 이루어진 신경세포 간의 연결망은 평생 계속 변화한다. 따라서 ‘배움에는 때가 있다‘라는 것은 전혀 사실이아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고 훈련할 수 있고 새로운 습관을 들일수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로써 성취역량을뇌가 습관적으로 ‘프로 선수‘처럼 침착하고 차분하게 반응하도록 변화시킴으향상시키는 것이 바로 마음근력 훈련이다.

마음근력을 강화한다는 것은 뇌의 습관적 작동방식을 바꾼다는 뜻이다. 시냅스 연결로 이루어진 신경망의 구조를 바꾸려면 새로운 방식으로 뇌를 사용하는 방법을 꾸준히 훈련해야 한다.

마음근력을 강화하려면 편도체를 안정시키고 전전두피질이 잘 활성화되도록 신경망의 연결성을 강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러한 방식으로 뇌를 사용하는 반복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마음근력을 강화한다는 것은 결국 신경가소성을 이용해 새로운 습관을 뇌 신경망에 고착화한다는 뜻이다.

마음근력이 강화된다는 것은 사람이 달라진다는 이야기다. 마음근력이 강화되면 더 강한 자기조절력으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이나 행동을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더 잘 조절할 수 있게된다.

자기조절력이 향상되면 높은 수준의 도덕성이나 윤리성을 지니게 되고,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게 되며, 일을 할 때 끈기와 집중력을 발휘하게 되고, 감정조절력과 충동통제력도 높아지게된다. 더 강하고 더 올바르며 더 유능한 사람, 한마디로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

마음근력을 키우려면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뇌의 상태를 잘 관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분노와 불안감 없이 평온한 마음을 유지해서 편도체를 활성화하고, 자기참조과정 훈련을 하거나자신과 타인에 대해 긍정적인 정보를 처리함으로써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된 상태에서 잠들도록해야 한다.

마음근력 강화로 인한 기질의 변화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좀 더 침착하고 차분해지며, 평화롭고 잔잔한 마음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일에 더 잘 집중하고, 꾸준히노력하는 힘과 끈기를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공감 능력과 타인의 의도 파악 능력이 향상되고, 존중과 배려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된다. 세상일에 좀 더 깊은 관심과 흥미를 갖게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아 적극적인 도전성을 지니게 되며, 역경을 극복하고 다시 튀어오르는 회복탄력성이 강화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