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자의식은 실체라기보다는 하나의 기능이며 현상이다.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나‘는 자동차라는 실체보다는 자동차의 ‘달리기‘에 해당한다. ‘나‘라는 개념은 그래서 명사가 아닌 동사다. ‘자아‘는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정보를 처리하며 끊임없이 소통한다. 좀 더 정확히말하면, 지속적인 내면소통의 과정 자체가 바로 ‘자아‘다.
의식은 다양한 경험들을 하나의 플롯으로 만들어서 의미 있는 사건으로 구성해낸다. 의식의본질은 이러한 ‘플롯 만들기(emplotment)‘에 있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먼저 있고 나서 내가 생각도 하고 소통도 한다고 느끼지만 사실 이는환상에 불과하다. 내가 하는 생각과 의식 자체가 이미 하나의 소통이다. 즉 ‘나‘는 내가 하는소통 그 자체다. 내가 소통을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실 ‘나‘는 내가 하는 소통의 결과로 생산되는 것이다.
우리 뇌는 점차 진화하면서 일차적인 시스템이 제공하는 정보들을 종합하고 이에 다양한 의미와 스토리텔링을 부여하는 이차적인 시스템을 만들어냈는데, 이것이 곧 의식이다. 결국 우리의 ‘의식‘은 다양한 하위 시스템들이 서로 경쟁하고 선택적으로 통합되면서 떠오르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나‘라고 생각하는 존재는 세상에 드러나는 존재이고, 행동하고 생각하는존재이며, 느끼고 반응하는 존재다.
이렇게 의식에 드러난 ‘나‘가 곧 자아인데, 자아는 기억의 덩어리이고 따라서 이야기의 덩어리다. 자아를 이루는 모든 기억은 이야기 형태로 저장된다. 내가 무언가 의도를 갖고 행동할 때그러한 행위를 결정하고 실행하는 실체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나‘다.
‘드러나는 나‘ 혹은 ‘앞에 있는 나‘의 뒤에는 항상 나를 바라보고 지켜보는 ‘또 다른 나‘가 있다. 이 ‘또 다른 나‘는 일상적인 경험을 하는 나, 즉 ‘경험자아(figure self)‘를 언제나 뒤에서지켜본다
이렇게 ‘드러나는 나‘의 뒤에서 항상 ‘나‘를 지켜보고 배경으로 존재하는 좀 더 근본적인 자아가 있는데 이를 "배경자아(background self)‘라고 한다.
우리는 배경자아의 존재를 분명히 느낄 수는 있으나 하나의 대상으로서 바라보거나 인지할 수는 없다. 배경자아는 ‘인식의 주체‘ 이지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식대상이 아니기에 의식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의 생각과 언어의 세계에서 ‘나‘는 자의식을 지칭하지만, 실제로 ‘나‘는 자의식을 포괄하면서도 그것을 훨씬 더 뛰어넘는 존재다. 자의식 밖에 있으면서도 자의식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 존재가 바로 ‘배경자아‘다.
마음근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이 배경자아의 존재를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고 경험자아의 습관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을 한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경험자아가습관적으로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수동적으로 휩쓸리지 않고 건강한 방향으로 능동적으로 바꿔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배경자아와 경험자아를 동시에 느낄 수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내가 나를 훈련시키는, 내가 나를 변화시키는, 내가 나의 마음근력을 강화하는 훈련을 시작할 수 있다. 배경자아를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내면소통의 출발점이자 마음근력 훈련의 첫걸음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갈등과 괴로움을 겪는 근본적인 이유는 ‘나 자신‘이 하나의 견고한 실체로서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환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견고한 실체가 아니다. 스쳐 지나가는 봄바람 같은 존재이고, 물거품이나 이슬방울처럼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존재이며, 게다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이러한 "변치 않는 실체로서의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깨달음에서 깊은 평정심을 얻게 된다. 그래야 편도체는 차분해지고 전전두피질은 활성화된다. 그래야 깊이있는 내면소통이 가능해지며, 진정한 자유와 행복감을 누릴 수 있다. 그래야 마음근력이 강화된다.
배경자아의 목소리는 누군가에게는 때로 ‘신의 목소리‘로 들려오기도 한다. 또 누군가에게는마음속 저 깊은 곳 어디에선가 울려오는 ‘내면의 목소리‘이며, 혹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지켜보는 ‘시선‘으로만 느껴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내가 나의 마음작용과 감정을 지켜본다고 할 때그 지켜보는 주체가 바로 ‘배경자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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