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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해
임성순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7월
평점 :
극한 상황에 처하면 사람은 어떤 모습을 보일까. 마지막까지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모습을 보여주고 자신조차 몰랐던 모습이 나올수 있을 것이다. 아직 못본 영화이지만 최근 개봉작 중에서도 극한의 상황에 놓인 배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 영화가 있다. 물론 영화를 보지 않았기에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넓은 바다 떠 있는 배 안에서 일어난 상황들은 비슷하다. 배는 그들의 세계이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세계만의 법칙을 만들어가며 살아갈 것이다.
다소 묵직한 소재를 다루고 있어 고민이 많았던 책이다. 책을 읽다보면 나까지 사건에 빠져 헤어나오기 힘들때가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이 출간된 계기가 되었던 것은 몇 년전 일어났던 해양사고였다고 한다. 한국 선원들이 동남아시아 조선족 선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우리가 모르는 세계에서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탄생한 '극해'는 현재가 아닌 일제강점기가 배경이다.
프롤로그부터 충격적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뿔테 안경, 털북숭이, 광대 등의 사내들이라 불리는 인물들이 무참하게 갑판장을 살해한다. 더 끔찍한 것은 프롤로그의 마지막 장면이다. 아직 누구인지 알수 없지만 뿔테 안경의 안경알에 비친 청년의 모습이다. 피를 뒤집어쓴 청년이 차갑고 환희에 찬 모습이 안경알에 비친 것이다. 도대체 이들은 누구이고 이렇게 잔인한 일을 벌이는 것일까. 청년은 누구이길래 살인을 하고도 입꼬리를 올릴수 있는 것일까.
유키마루 배는 1920년대 남빙양에서 포경 붐이 불 때, 노르웨이에서 건조된 600톤급 디젤 포경선이다. 얼어붙은 바다에서 조업하기 위해 뱃머리가 쇄빙선 형태로 제작되고, 빠른속도를 내기 위해 두 쌍의 디젤 엔진까지 내장한 배이다. 이제는 포경선이 아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징발 대상이 되어 특별감시선으로 팔라우 등지의 남방 전선 일대에세 감시선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전쟁이라는 상황속에 놓여 있는 이들이 타고 있는 배 안에 일어나는 사건들.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극한 상황에 처하면 사람이 이렇게 변하는 것일까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인육을 먹는 모습은 정말 공포 그 자체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들에게도 숨어 있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끝까지 보고 싶지 않고 숨기고 싶은 인간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조센징.자네도 내가 무사로 만들어주지. 사람 살맛을 알면 무사는 귀신이 된다던데 조센징도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군. 어쨌든 조센징도 대일본제국의 신민 아닌가. 내 오늘 자네에게 귀한 선물을 내리지." - 본문 83쪽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 유키마로 배에 탄 선원들의 절반은 징용된 군속이도 나머지는 일본수산과 노무 업체에서 선원 모집으로 돌아온 이들이다. 일등 항해사 스기야마 다케로, 감판장 고토 히로시, 돈 때문에 배를 탄 선생. 동경 유수의 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전문학교의 조선어과 조교수였던 그가 전쟁 때문에 직업을 잃게되고 그로인해 돈까지 없는 것이다. 조선인들 중 가장 어린 막내 정섭. 곱상한 얼굴의 정섭은 상업학교 졸업 후 징용을 피해 근로 보국대로 자원을 했다고 한다. 평생 고래를 잡은 포수는 뇌격기의 기총 세례를 받아 한쪽 눈을 잃었다. 이들은 한 배에 타게 되었다, 서로 다른 이유로 모인 사람들.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이미 지휘자도, 명령도, 명분도, 이상도, 목표도, 심지어 적도 아군도 없었다. 살기 위해 벌이는 맹목적인 폭력만이 갑판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이곳은 아귀도였다. 적자생존이란 무간지옥이 유키마루란 이름의 흔들리는 세계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 본문 305쪽
어떠한 상황이든 약자들이 가장 먼저 희생을 당한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원주민 남녀의 죽음. 특히 원주민 여성에게는 인간으로서 할수 없는 일들을 저지른다. 약자일수 밖에 없던 조선인들. 그들도 조용히 반란을 일으킨다. 배라는 특정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 그 사건들속에서 알고 싶지 않은 추악한 인간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