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우리는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혔다. 일찌감치 비밀정보국의 감시망 안에 걸려든 거였다. 당시 루마니아 문학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미학이 없는 문학은 문학이 아니다. 신문과 교과서에 넘쳐나는 당의 문학이 머릿속에 주입되었다. 거짓, 허위, 프로파간다, 유치하기 그지없는 언어들이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만큼 주변에 널려 있었다. 그 모든 걸 거론하는 것은 물론 정부에 대한 반발이었으므로 우리 모두가 비밀경찰들로부터 미행을 당했고, 그럴수록 우리는 서로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우리가 지향하는 문학 프로그램의 골자는 우선 삶의 경험과 연관 지어져야 한다는 것이었고, 비판적인 시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학은 섬광과도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 공동체를 통해 우리를 지켰다. 모임은 우리에게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계간『문학동네』2010년 여름호 헤르타 뮐러 인터뷰 中에서)
헤르타 뮐러의 삶은 고스란히 문학으로 화한다. 감시와 강제, 탄압과 위협, 무기력함과 두려움을 담고서. 살아남기 위한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낱말로 치환하는 과정은 섬세할수록 혹독한 통증을 동반한다. 그의 낱말상자 안의 어휘들이 아름답게 단련되어갈수록 현실에 대한 고발 또한 강도 높아진다. 아름다움이 삶을 구원하는 이상적인 일들은 쉬이 일어나지 않지만, 미추의 경계를 세밀하게 중계 할 수는 있다. 그래서 그의 문장들은 결코 쉽사리 다음 문맥으로의 등정을 허락하지 않은 채 지독한 여운을 안긴다. 전작을 읽는 것도 힘겨웠고, 날뛰는 '마음짐승'을 다스리는 것 또한 어렵기 그지없음을 고백한다.
『마음짐승』에 등장하는 에드가, 쿠르트, 게오르크와 '나'는 헤르타 뮐러가 루마니아에서 활동했던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젊은 독일어권 작가들의 모임인 '악티온스그루페 바나트'을 연상시킨다. 독일에서 건너온 금서를 읽고, 불온한 사상을 담은 시를 공유하며, 당에 가입하라는 압력을 죽음의 위협과 맞바꾸는 일원들. 부당하게 죽어, 또 다른 부당한 죽음의 전신이 되어버린 롤라를 추모하기 위해 맺어진 이들은, 비밀경찰의 표적이 되어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감시, 미행, 협박, 회유, 예비 된 사망선고로 범벅된 일상을 버텨내는 그들이 무너져가는 과정 속에서 각자의 마음짐승은 소리높여 절규할 수조차 없다.
구름 한 점마다 친구가 들어 있네 / 공포로 가득한 세상에서 친구란 그런 거지 /
어머니도 원래 그런 거라 하셨네 / 친구야 아무렴 어떠니 / 진지한 일에나 마음을 쓰렴
루마니아의 시인 겔루 나움의 시는 『마음짐승』에서 네 명의 친구들의 저항의식과 비밀경찰과의 알력관계를 동시에 표방하는 선언문인 셈인데, 불온한 시대에 읊기에는 적절하지 않아서기보다는 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독재정권의 폭거의 증명이 되기도 한다. 사람을 물도록 훈련받은 개 프옐례와 같은 이름을 가진 프옐례 경감은 이 시를 다음과 같이 왜곡해 노래하도록 강요한다.
구름 한 점마다 세 남자친구가 들어 있네 / 구름이 가득한 세상에서 창녀란 그런 거지 /
어머니도 원래 그런 거라 하셨네 / 남자친구가 셋이면 어떠니 / 진지한 일에나 마음을 쓰렴
누구도 신뢰할 수 없고, 어디서도 자유롭지 못한 젊은이들은 비밀경찰의 눈을 속이기 위한 체계를 만들어낸다. "날짜 쓰는 거 잊지 마. 편지 속에 머리카락 한 올 넣는 것도. 머리카락이 들어있지 않으면 누군가 편지를 펼쳐봤다는 거야.", "심문은 손톱가위, 수색은 신발, 미행은 감기 걸렸다로 써. 호칭 다음에는 언제나 느낌표를 쓰고, 생명에 위협을 받을 때는 쉼표 하나만 찍어."(p.107). 머리카락 한 올과 대치된 단어와 부호에 기대에 안전을 도모하려는 그들의 미숙함이 서글프다. "일주일째 감기에 걸려 있고 손톱가위가 보이지 않아", "일주일째 감기에 걸려 있고 손톱가위가 말을 듣지 않아."(p.121)라는 문장들은 자신들에게조차 요새가 되어주기보다는 의혹과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며, 심문 중에 다양한 색상의 머리카락을 내보이던 프옐례에게 조롱의 대상이 된다.
어찌 보면 『마음짐승』은 커다란 줄거리와 등장인물을 필요치 않는 소설이다. 차우셰스쿠 정권이 만들어낸 이삼중의 감시체계가 불러일으키는 공포와 두려움이 그 중심에 서서, 예정된 좌절과 죽음을 불러낸다. 독재자의 지병에 대한 유언비어는 비밀경찰이 불순세력을 속아내기 위한 함정이며, 실패한 도주에 대한 은밀한 속삭임과 부검이 허락되지 않은 의문사는 암울한 미래에 대한 사망선고이다. 가족과 지인들을 포섭해 감시의 대리인으로 파견하는 악랄함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는 이중 언어사용자들의 처절한 절망이 마음짐승마저도 침묵하게 만든다.
스탈린 정권의 소비에트에 살았던 유대인만큼이나 혹독한 탄압의 역사를 지닌 루마니아의 소수 독일계 주민들은 염원하던 독일로의 이주가 성사된다 해도 자유와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 독일 땅에서조차 루마니아 비밀경찰의 영향력은 사회적 살인이나 다름없는 자살로 그들을 내몰기도 하며, 다음 차례의 사형집행을 통보하기도 한다. 공문서에 대한 권리행사를 막거나 스파이 혐의를 흘려 정착을 방해하는 끈질김까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고, 편히 죽을 수도 없는 공포의 시대를 묘사하는 헤르타 뮐러의 정련된 언어는, 고통과 더불어 시가 가진 근원적 힘을 복원해낸다.
'시적 고발'보다 더 적확한 표현을 찾기 힘든 헤르타 뮐러의 문학. 끊임없이 독재의 폭압을 재현하고 공포와 불안에 잠식당한 인간유형을 그려내는 테마와 마주쳐야하는 것은 참담한 듯 보였다. 독재자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암울한 그림자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나약한 존재일지라도 지난 시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투를 멈추지 않는 인간에게 허락된 언어의 힘이 생동하는 것에서 희망을 본다. 마음껏 울부짖지도 못했던 그들의 마음짐승은 강요된 거짓에 침묵했을 지라도, 공포의 시대가 멸시하던 인간은 언어가, 시가, 문학이 가진 결코 왜곡될 수 없는 근원적 진실에 힘입어 생존의 의미를 되살려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