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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장미 ㅣ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3
캐서린 패터슨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평점 :
1912년 메사추세추의 방직도시 로렌스에서 일어난 일련의 동맹파업을 일컬어 '빵과 장미 파업'이라고 부른다. 세계에서 몰려든 가난한 이민자들이 대다수였던 방직공장의 작업환경은 결코 낯설지가 않은 백태를 보여주는데, 스물도 안 된 젊은이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나갔던 1970년대의 우리나라 평화시장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아무리 일해도 가난을 늘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절망 속에서 그들이 택한 연대적인 투쟁은 '빵과 장미'로 대변되는 전설적인 슬로건과 더불어, 지금도 여전히 그 구호가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지를 일깨운다. 캐서린 패터슨의 『빵과 장미』는 이 파업의 한가운데로 우리를 이끄는데, 성장소설의 틀을 택하며 진행되는 스토리텔링은 처절한 고발의식의 발로이기보다는 가슴을 울리는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로렌스의 이민노동자들을 조직화했던 유명한 이탈리아계 사회주의자들을 내세우기보다, 경찰의 총탄과 무고에 스러져간 희생자를 조명하기보다, 노동자 가정의 가장 여린 구성원인 아이들의 일화를 중점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과는, 이 파업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벼랑 끝에 선 이들의 최후의 보루, 그들이 지켜내고자 했던 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인지를 역설한다. 파업에 휩쓸려 거리로 나선 아이에게 위스키 값을 벌어오지 않으면 주먹질을 해대는 아버지를 둔 제이크 빌과 자신을 사랑한다면 파업에 동참하기보다는 '미국시민'답게 정부에 순응해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로사 세루티의 시각으로 전개되는 이 책은, 당시 로렌스에서 벌어졌던 소요를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한다.
최소한의 생계, 일한만큼 받는 대우를 기대하는 것이 사치인 당시의 로렌스에서 파업에 동참하는 일은 무정부주의자, 반미국적인 사회주의자의 선동에 휘말린 결과로 치부되었던 시절. 결국 '미국적'이라는 기치 자체가 공장주와 공권력에의 무조건적이 순응이며, 노동자의 생존이자 인권을 논하는 것이 금기시되는 분위기 속에서 '토박이'들이 아닌 이민자, 그 중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의 분연한 움직임은 미국 전역에 이 파업의 실체와 당위성을 알리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토박이가 아닌 이민자 계층, 남성이 아닌 여성노동자와 나이를 속인 어린이 노동자들이 받았던 처우 속에서 탄생한 '우리는 빵을 원한다, 그리고 장미도'라는 슬로건이 가진 울림은 무서운 속도로 전파될 수밖에 없었다.
젊고 나이든, 찌들고 지친 어머니들이 거리에 나서자 곡기와 온기가 사라져버린 집안에 방치되거나, 거리에서 곤봉과 물대포와 총구에 고스란히 노출된 아이들을 구제하고자 벌어졌던 '휴가'로 불리던 다른 도시로의 잠시잠깐의 입양운동은 '빵과 장미파업'이 지켜내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재확인시킨다. 로렌스의 아이들을 보호하고자 그들과 처지가 비슷한 타 지역의 노동자 가정들은 앞 다투어 '휴가'를 제공하기 위해 일어선다. 캐서린 패터슨이 『빵과 장미』를 쓰게 된 동기가 바로 이 파업 기간 동안 버몬트 주 배러에 머물렀던 로렌스의 아이들의 사연을 접하게 되고 나서라고 한다. 부유한 이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 파업 노동자들을 무고하고, 폭력으로 대항하는 동안, 가장 누추한 곳을 인간적인 배려와 희망으로 불 밝히던 그들의 연대가 무엇보다 강력한 지지세력이 되어주었을 것이 자명하다.
'빵과 장미'라는 슬로건이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분분한 설은 많지만 시초를 정확히 짚어낼 수 없다고 한다. 파업에 진심으로 동참할 수 없고, 미국시민이 되는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썼던 로사가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만들어지게 된 것으로 묘사된 부분("우리가 원하는 건…… 단지 우리의 배를 채워줄 빵만은 아닌 것 같아요. 우리에게는 빵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죠. 우리는 우리의 가슴과 영혼을 위한 양식도 원해요. 우리가 원하는 건- 그걸 뭐라고 해야 하나- 푸치니의 음악 같은 거예요.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것들도 어느 정도 필요해요. 우리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위해서 말이죠. 우리는 장미도 원해요."(p.114-115))은 캐서린 패터슨의 창작이지만, 이 슬로건이 서부의 여성 노동자 운동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던 순간을 포착하려했다면 그리 벗어날 것은 아닐 것이다.
파업보다 가정의 생계, 노동자의 인권보다 가족의 안위가 더 절실했던 파업 노동자들의 자녀들을 전면으로 부상시켜 '빵과 장미파업'의 이상과 현실의 접점을 포착해내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는 100여 년 전의 메사추세추의 로렌스를 넘어 21세기의 우리에게도 시사 하는바가 크다. 이것은 사회주의 연대에 있어서 한 획을 그은 미국노동자들의 발자취이기도 하지만, 지금도 현재진형형인 그들의 싸움을 쉬이 잊어버리고 만 우리를 향한 노성이기도 하다. 용산, 이랜드, 쌍용자동차……. 100년 전의 로렌스가 어떻게 '빵과 장미'를 쟁취해냈는지를 너무도 쉽게 망각한 우리네는 인간답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이상적인 연대에 대한 회의감에 찌들어있었음을 발견하게 한다. 모든 이들이 빵과 장미를 나누는 아름다운 정경을 현실로 이끌어내는 문제에 힘을 보탤 수 있는 용기가 절실해진다.
'빵과 장미'파업 이후 한 세기가 흘렀다.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빵과 장미를 향한 투쟁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아프다. 로렌스의 위대한 승리가 이 땅에 쉬이 강림하지 않는 것은 타인의 아이를 기꺼이 껴안을 수 있는 진한 동질감이 결여되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한다. 모든 인간은 자기 몫의 정당한 빵과 생에 대한 헌화를 누려 마땅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