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 크루소 네버랜드 클래식 32
다니엘 디포우 지음, 김영선 옮김, N.C. 와이어스 외 그림 / 시공주니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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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국내에 첫 완역된 『로빈슨 크루소』는 참으로 연륜이 느껴지는 책이다. 삼중당 문고본에서, 문학세계사판 완역본으로 옷을 갈아입었을지언정 70년대에 거쳐 90년대에 개정판을 내면서도 번역은 거의 달라진 것이 없다고 역자 스스로 밝히고 있다. 2004년 개정 1쇄라는 명목 하에 1부와 2부의 완역을 내었다고는 하나, 오역을 가다듬어 개역을 한 것이 아닌 표지의 변화 말고는 거의 ‘원형’을 유지하며 띠지만을 둘렀을 뿐이다. 국내의 『로빈슨 크루소』완역판은 출판사와 판형의 변화에 따라 ‘개정’이라는 이름을 달고 유구한 세월을 살아남아왔다.

    이 책은 근 3세기 동안 가독성이 좋기로 소문난 책이 아니었던가? 문학세계사의 그것은 가독성은커녕 빨간 펜을 붙들고 ‘교정’을 하고 싶을 만큼 분통이 터지는 책이었다. ‘화란’(유럽이 ‘구라파’였던 시절, 네덜란드는 ‘화란’이었지, 아마-)이라는 지명을 보는 순간 느꼈던 아득한 4차원적 절망감이 무인도 생활에의 몰입을 방해한다. 차라리 완역 전의 각색동화를 찾아 읽어보고 싶어졌을 때, 네버랜드 클래식의 32번째 타이틀로 『로빈슨 크루소』가 나왔다. 28년 2개월 만인 크루소의 귀향과 많이 닮았다!

    국내 첫 완역이라는 스포트라이트를 홍보 전략으로 이용할 수 없지만, 역시 매끄럽게 읽힌다. 그런데 매끄럽게 읽히는 만큼 껄끄러운 반감들이 만조에 쓸려오는 난파선의 잔해가 되어 쌓여간다.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서 추구하는 ‘한 재산 만들기 프로젝트’를 따라 읽게 되는 것이 스릴 있었던 그때 그 시절에 비해, 너무나 많은 자극에 지난날의 나를 잃은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18세기 영국인이다. 그가 외려 식민주의를 부정하고, 원주민의 인권에 대한 NGO운동을 펼치기라도 한다면 그것이 바로 넌센스가 아니겠는가? 로빈슨 크루소는 영적인 체험을 무인도라는 극한적인 환경에서 부닥뜨릴지 몰라도 골수까지 상인정신으로 무장한 중상주의자이다. 로빈슨 크루소가 영국에서 브라질로, 브라질에서 칠레의 무인도로, 무인도에서 브라질을 거쳐 다시 영국으로 귀환하는 매 순간, 그가 배를 타게 되는 방향성에는 자유가 아닌 재산상의 문제가 계산되어 있다.

    미셸 트루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도 통쾌 상쾌하게 읽었으며, 존 쿳시의 『Foe』또한 고개를 주억거리며 독파했다. 그리고 또다시 『로빈슨 크루소』로 귀환한다. 새 시대의 패러다임으로 고전을 분석해내는 ‘논술고사’식 강박관념을 벗어나 그의 섬에서 이 책을 다시 읽고 싶어진다. 인종차별주의자이면서, 기회주의가 넘치며, 무인도에서조차 재산 축적을 게을리 하지 않는 그에게선 최소한 위선의 악취는 느껴지지 않는다. 모두가 무인도에서 ‘월든’을 구현할 수는 없는 일이다.

    너무나 많은 복합적 사고가 급류를 만들어 격한 결론을 내리기를 독촉하는 시대적 소명을 거부하는 것도 재미난 경험이다. 네버랜드 클래식에 『제인 에어』와 『로빈슨 크루소』가 끼어들면서 이 전집은 아동용이라는 한계를 한참 전에 뛰어넘었다. 이런 바람직한 고전에의 회귀와 도전에 참으로 거슬리는 구성은 역자후기의 지나친 간섭을 꼽지 않을 수 없다.

“프라이데이에게 영어를 가르칠 때, ‘예’와 ‘아니요’에 앞서 ‘주인님’이라는 표현을 먼저 가르치는 것은 서구 문화와 기독교를 중시한 사고방식이 낳은 편견입니다. 그리고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늘날의 독자들이 <<로빈슨 크루소>>에 나타난 이러한 시대적 한계도 놓치지 않는다면 작품을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역자 김영선 씨가 밝히고 있다. 그런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렇다. 그렇다 해도 그것을 어린이들, 그리고 몇 번이고 다시 로빈슨 크루소를 다시 읽게 될 300년 후의 오늘날의 독자들이 스스로 발견해내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것일까? 고전 읽기에 몰입한다고 해서 모두가 시대착오적 사고를 전승받는 것은 아니다. 작품 이해에 대한 매뉴얼까지 안내해주는 넘겨짚기는 간곡히 사양하고 싶다. 바른 길이 어딘지, 스스로 그 항로를 찾아 문명과 맞부닥트릴 모험 정도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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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칵테일 -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상큼한 세계사가 온다!
역사의수수께끼연구회 지음, 홍성민 옮김, 이강훈 그림, 박은봉 감수 / 웅진윙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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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출판관행을 유추해볼 때, ‘감수’라는 작업에 있어 네임밸류를 빌려주는 것 말고, 정말 그 책을 철저히 점검했을까 하는 의문을 자아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예를 들면 명화 읽기에 관한 책의 가장 권위 있는 감수자는 이주헌 교수이다. 한젬마의 대필의혹이 불거진 다수의 책들을 비롯, ‘감수 이주헌’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미술관련 서적들은 지금도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을 것이다. 일본의 헤이안 문학, 일본중세의 풍속사를 다루는 책들의 가장 권위 있는 감수자는 김유천 교수이며, 동물생태에 관한 책에서는 최재천 교수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각 분야의 가장 성공적인 명사들이 그저 타이틀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는 신뢰가 쌓여갈 수 있는 충실한 출판물을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

    『세계사 칵테일』의 감수자는 박은봉 씨다. 청소년 대상의 역사개론서(<엄마의 역사편지>나 <한국사 편지>)로 유명하신 분인 만큼 저서 또한 즐겨 읽고 있다. 잠깐 감수의 변을 살펴보면-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내용이 충실한 역사책, 즉 ‘재미’와 ‘유익’이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장점을 고루 갖춘 역사책을 발견하기가 어디 쉬운 일이던가.(중략) 그런데 흥미롭게도 『세계사 칵테일』은 재미와 유익함 두 가지 장점을 균형 있게 갖추고 있다.”

    과연 그런가?

    소설 분야에서만 일류가 부는 것이 아닌가싶다. ‘역사의 수수께기 연구회’라는 단체는 일본 내에서 이와 유사한 가벼운 역사 읽기를 지향하는 저서를 다수 써낸 듯싶은데, 그 가벼움과 가독성이 가장 큰 장점으로 작용해 역사 입문을 원활하게 돕고 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130가지 에피소드 안에 담긴 역사적 고찰에 담긴 역사관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재미 삼아’ 읽고, ‘재미 삼아’ 이미 알고 있던 에피소드들을 꼽아보았다. 8할이 넘는,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익히 알려졌으며, 그것도 익히 ‘잘못 알려진’ 기존의 정사와 야사에서 볼 수 있었던 새로울 것 없는 해석들이었다. 저자가 아니라, 엮은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새로운 시각의 부재와 재미를 빙자한 가쉽성 에피소드만을 나열하고 있다. 참신했고, 새로웠던 유일한 것이 한국판에서 첨가한 개성만점 일러스트였다는 것에 우월감을 가져볼까 했지만 되려 씁쓸해져온다.

    다시 감수사로 돌아가-

“감수를 보면서 일부는 우리의 역사관에 맞게 손을 보았다. 특히 일본에서 통용되는 용어나 개념으로 우리에게 낯선 것은 내용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우리에게 고쳤음을 밝혀둔다”

    일본식 역사 용어가 기존의 한국식 역사 용어와 충동한다면 이 책을 읽는 목적성이 위태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호모 에렉투스’를 ‘원인(原人)’, ‘호모 사피엔스’를 ‘구인(舊人)’,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를 신인(新人)‘이라 칭하는 용어는 낯선 것을 넘어서 일본식 조어들의 역유입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게 든다. ’내용에 어긋나지 않아도‘ 고쳤어야 하는 부분들이 꽤 눈에 띄는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역사서가 재미있기를 바라는 요구는 타당하다. 그렇지만 번역과 포장으로 그것을 추구하는 것에는 의문점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역사 바로읽기, 뒤집어 읽기, 낯설게 읽기의 일환으로 지금도 치열하게 저술되는 국내의 역사개론서들을 더 찬찬히 살펴보고 싶어진다. 조금은 무분별해 보이는 검증이 덜 된 일본의 역사개론서들의 유입을 경계했으면 한다. 오히려 청소년층이 읽기에는 가쉽성 역사서술이 많은 부분 문제가 있었으며, 검증 없이 가짓수에만 신경 썼다는 인상이 짙다. 

    역사를 처음 접하게 되는 입문자일수록 가짓수가 많은 메뉴에 현혹되지 말고, 까다로운 주문자가 되어주었으면 한다. 상큼발랄하지 않으면 어떤가? 원래 장사가 잘되는 음식점일 수록 메뉴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자신 있는 추천메뉴로 승부하는 것이다. 색이 고운 칵테일을 여러 잔 가볍게 마시는 기분으로 손에 들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가장 자신에게 어울리는 맞춤 칵테일 한잔의 여운이 더 절실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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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 네버랜드 클래식 11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 지음, 타샤 투더 그림, 공경희 옮김 / 시공주니어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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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에서 태어난 메리는 고아가 되어 영국의 외삼촌댁으로 온다. 아이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삼촌 대신 가정부와 하녀에 둘러싸여 요크셔의 황량한 평원에 세워진 저택에서의 생활이 시작된다. 메리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입을 모아 말한다. “이렇게 얼굴빛이 나쁘고 못생긴 아이는 처음 봐요. 엄마는 그렇게 미인이었는데. 빼빼마르고 볼품이 없군요. 못된 성질 때문에 사랑받기는 틀렸어요. 참 버릇없는 아이에요.”

    어렸을 때는 몰랐다. 어른들은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만 사랑할 때도 있다는 것을.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면서 내 영혼에는 식은땀이 고인다. 살갑진 않았지만 열병으로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열대의 인도에서 황무지의 영국으로, 타의에 의해 살러 온 아이에게 어떤 어른도 먼저 다가서지 않는다. 그토록 거대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살아남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메리는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만한 자격이 충분하지 않은가, 진심으로 분개하는 내가 있다.

    콜린은 황무지 저택의 금지옥엽이다. 그저 약하디 약하게 존재해주는 것 말고는 어떠한 기대도 받지 못한다. 아버지는 너무나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슬픔에 반쯤은 세상을 등진 채 상실감에 붙들려 살아간다. 에밀리 브론테였다면 크레이븐씨는 신사가 아닌 광인이 되어 마땅하지만, 이 책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그 정도이다. 필요할 때는 없는 사람.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하고, 아버지처럼 등에 혹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하루하루 ‘죽어가는’ 아이가 콜린이다. 아무도 콜린에게 음침한 침실을 벗어나 햇살 한 줌과 신선한 공기를 넣어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버려둔 그 아이는, 자신의 고독과 죽음에 대한 집착 안에서 날로 생기를 잃는다. 사랑해주지도 않으면서 책임도 지지 않는 어른들. 『비밀의 화원』은 읽을수록 아픈 이야기이다. 그리고 끝까지 읽어야 분노와 화해할 수 있는 마법 같은 이야기.

    메리와 콜린과는 달리 디콘에게는 화원이란 절체절명의 가치는 아니다. 황무지에 흐드러지게 핀 히스처럼 또렷하고 확고한 존재감을 좀 더 거친 대자연에서 얻을 줄 아는 아이니까. 그래서 디콘은 메리와 콜린처럼 상류층의 위선 속에서 배양된 아이들에게 자연과 화해하고, 어른들의 방임에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부단한 존재증명을 해낼 수 있는 중재자가 된다.

    메리가 발견해낸 화원은 죽어가고 있었다고 알려졌지만, 실은 잊혀지고 있었다고 해야 한다. 금기가 깨지는 순간, 아이의 건강한 호기심과 삶을 긍정하는 사명감이, 기성세대가 무책임하게 봉인해놓은 과거의 문을 열고 현재와 화해하게 한다. 휠체어가 아닌 두 다리로 서서 아버지를 부르는 콜린의 모습에서, 쉽사리 생의 의미를 지우는 일 없는 아이만이 가진 근원적인 에너지를 발견한다. 아이들이 살려낸 것은 화원만이 아니다. 기성세대가 감추고 싶고, 도망치고 싶었던 자신들의 과오와 회환이 빚은 ‘어제’를 나 또한 바로 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비밀의 화원』을 십대가 되기 전, 십대가 되어서, 이십 대의 나날들 사이에서 몇 번이고 다시 읽는다. 그저 단순히 메리가 사랑스런 아이로 거듭나는 이야기라고 믿어왔던 그 때에도 좋았고, 비밀의 화원의 열쇠를 발견한 그 장면에서는 여지없이 숨이 멎을 만큼 매혹되었고, 아이들이 가진 생명력과 포용력의 초신성과 맞먹는 폭발을 목도하면서 진정한 해피엔딩을 찾아낸 요즘도 좋았다. 어떤 관점으로, 어떤 기분으로 읽을지라도 책을 덮으면 초록의 에너지와 삶을 긍정하게 되는 평원의 바람을 느낄 수 있으니.

    타샤 튜더가 가꾼 버몬트의 30만평에 이르는 ‘비밀의 화원’의 일부를 이 책의 삽화를 통해 만나는 것도 흐뭇한 경험이 된다. 틀림없이 이 책의 읽기 전, 그리고 읽은 후 타샤 튜더 3부작(『아름다운 사람, 타샤 튜더』, 『타샤의 정원』,『타샤의 집 』)을 만나게 될 테니까. 타샤에게는 말 그대로 정원이 그렇듯, 인생을 향기롭게 가꿔주는 나만의 비밀의 화원과, 잊혀진 비밀의 화원의 열쇠를 발견하는 다시 없을 마법의 순간을 제발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을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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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쉽게 산다는 것 Easy Life
톨리 버칸 지음, 김지영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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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름대로 일정한 수준의 책들을 걸러 읽고 있다고 자부했으나, 얄팍한 분량과 비례하듯 내용은 더 얄팍하고 조악한 한 권의 책이 극악의 실망감을 안긴다. 다른 장르의 책과는 달리 자기계발서는 뚜렷한 방향성과 행동강령을 내포하며, 출간의 묘를 극대화하여 일상의 획기적인 변혁을 촉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때문에 늘 반복적이며, 상식적인 법칙의 틀에 갇히게 되기도 하며, 타이틀만 다르지 내용의 대부분은 닮은꼴인 책들이 늘어만 간다. 공감을 느끼는 것과 습관을 재구축하는 것이 쉽게 융화되지 않기 때문에 자기계발서는 매너리즘과 더불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Easy Life 그저 쉽게 산다는 것』은 여러모로 필요악이라는 인상만을 남긴다. 저자의 이력이 책날개에 써있는 대로, 얼마나 미디어에 노출되어 있고 메이저에 오르내리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대단하지 않은가’라는 도취성 집필은 전혀 와 닿지가 않는다. 150여 페이지, 그나마 사이사이의 공백을 빼면 겨우 100페이지를 넘길까싶은 11가지 행동코드에 대한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조롭고 반복적인 논조들은 화려한 제스쳐와 카리스마로 좌중을 휘어잡는데 능한 대중강연자가 할 법한 메시지들의 빈곤한 향연 같다.

 

    진실을 말하라, 원하는 것을 찾아라,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라, 자신의 행동을 책임져라, 경제적 안정을 위해 노력하자,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라, 자신의 가치를 높여라, 인정을 베풀며 살라, 창의적인 표현을 늘려라, 주의력을 길러라, 보다 높은 이상을 추구하라-


    11가지 항목이 곧 ‘그저 쉽게 사는’ 비결이라는 것이 이 책의 핵심코드이다. 메모를 하고, 주입을 해서 자기 세뇌를 통해 끊임없이 인지하라는 요지의 매뉴얼이 안 그래도 허술한 매 장의 끝머리마다 등장한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지를 안내하는 것은 아주 가볍게 부재하고 있으며, 묘하게 적대적인 자신감이 독자를 향해 호령한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옛 고사들의 인용과도 겉돌고 있으며, 저자가 완벽한 이상적 모델로 내세우는 자신의 인생관이 등장할 때마다 실소가 나온다. 자기과시 안에 진실성이 깃들지 않는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에.


    이 책은 과연 완성된 출판물이 맞는 것인지 여전히 의심스럽다. 가제본이라 여긴다 해도 그 허술함에 그나마 몇 안 되는 책장이 잘 넘어가지가 않는다. 부록이라고 ‘끼어있는’ 열 댓 장의 노랑종이를 보고 폭소했다. 솔직히 말해서 거기 적힌 부단한 명령조의 빈약한 메시지가 이 책에 담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생을 쉽게 변화시키는 비결이란, 누군가가 완성한 청사진대로만 사는, 매뉴얼을 따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얻은 유일한 교훈은 쉽게 사는 지침을 스스로 발견해내야 한다는 것과 부실한 출판물처럼 용서가 안 되는 것은 없다는 상식의 확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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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표 이야기 -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정표.김순규 지음, 이유정 그림 / 파랑새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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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리터의 눈물]에서 아야는 말합니다. "일기는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척수소뇌변성증으로 꽃봉오리를 피우지도 못하고 사지가 마비된 채 세상을 떠난 가토 아야는, 손가락이 움직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기를 남겼습니다. 병상의 기록이며, 문학소녀의 사람의 마음을 한 없이 끄는 작품이며, '아야'라는 한 인간이 치열하게 생존했던 증거로써. 사와지리 에리카가 아야로 등장하는 동명의 드라마는 정말 감동적인 최루성 드라마였지만, 실제의 아야의 인생은 장애가 일상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당하면서도, 진실이 주는 외면할 수 없는 무게 탓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먹먹한 데가 있습니다. 

  정표도 일기를 씁니다. 아야처럼 작가를 꿈꾸는 이 아이는 13살의 짧은 인생을 백혈병으로 마감하기 직전까지, 부단히 일기를 썼습니다. '일기는 정표가 살아있다는 증표'였지요, 아야와 똑같이. [정표 이야기]를 읽지 않기 위해 많은 날들을 외면해왔습니다. 그것은 책을 펼치는 순간, 짐작만 하는 것으로도 버거운 그 애의 처절한 사투를 똑바로 바라봐줄 살아남은 자의 소명을 저버리는 행동이었지요. 그리고 정표의 병상일기는, 삶과 죽음을 매 순간 상기해야만 하는 이들이 갖는 감히 짐작하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생각이었는지를 확인하게 해주었습니다.

  골수이식을 받으면 건강해져야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까지 골수기증자를 찾지 못해 아쉽게 떠나보낸 백혈병 환자들이 그렇게 많은데... 정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정표는 기적적으로 일본에 사는 46세의 친절한 아저씨게 골수를 기증받아 수술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정표는 훌훌 털고 일어나리라, 정표가 이미 1월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믿어버렸습니다. 신을 믿는다면 온통 부정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신을 믿지 않았다면 자기도 모르게 절실히 기도하고 싶어질만큼 정해진 결말을 책을 읽으면서도 바꾸고 싶어졌습니다.

  정표는 12살 때 발병한 백혈병과 싸우며, 딱 그 또래의 아이다운 감성을 하나도 잃지 않는 내 주위의 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과거형으로 그 애를 떠올린다는 것이 이렇게 아플 줄 예상했기 때문에, 정말 읽는 것을 미뤄두고 싶었겠지요). 늘 맛있는 음식이 고프고, 유희왕 카드를 모으고, 그리고, 겨루기를 좋아하는, 학교에 안가는 동안 점점 조급해지는 마음과 때로는 너무 의젓하게 고통을 감내하기도 하고, 마음껏 투정도 못하면서도 금새 미안함에 짜증낸 것을 창피해 하는... 누구보다 마음이 눈부시게 건강한 우리의 아이였습니다.

  탤런트 김명국 씨의 작디작은 아들, 영길이는 골수기증자를 찾기 못해 세상을 떠났지요. 김명국 씨 부부는 그 뒤로도 백혈병 어린이들을 위해 참 많은 정성을 쏟고 계시더군요. '불멸의 이순신' 세트장에 정표를 초대해 이순신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배려했던 김명국 씨 이야기를 읽다가 어느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TV속의 영길이. 평소 좋아했던 어느 댄스그룹 형들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이는 종일을 기다리고도 그 형들을 만나지 못했었는데... 영길이는 생전에 꿈꾸었던 어느 소망을 이루지 못했지만, 남아있는 아빠(김명국 씨)는 다른 백혈병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참 많이 애쓰고 계시더군요. 정표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참으로 많은 일들을 해주신 분들, 이렇게 정표의 책을 읽을 수 있게 해주신 분들, 정표는 지금도 살아있네요.

  김명국 씨 부부처럼, 정표의 부모님도 또 다른 아픈 천사들을 위해 살아남은 이들의 소명을 열심히 이루시겠지요. 아야노 마사루가 쓴 [생명의 나팔꽃]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한 동화가 있어요. 고스케는 갓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백혈병이 발병해, 골수이식을 받지 못해 엄마의 가슴에 묻혔습니다. 엄마는 고스케가 학교에서 키우던 나팔꽃을 보며, 일본 전역에 나팔꽃씨를 보냅니다. 그리고 골수은행에 골수를 기증해 달라는 운동을 하셨지요. 정표에게 기꺼이 골수를 나눠주신 그 아저씨께서도 어쩌면 고스케 엄마께서 보내신 고스케의 나팔꽃씨를 받으셨을지도 모르지요. 아이들을 가슴에 묻어야하는 이들이 과연 무엇을 해야하는지, 슬픔을 이겨내야하는 이유를 조금을 알 것 같습니다.

   너무나 분하지만, 세상에는 지금도 작은 몸으로는 절대 싸워 이길 수 없을 듯한 거대한 병과 하루하루 생명을 줄다리기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건강한 사람들이 짐진 것이 무거워질수록, 가볍게 병상에서 그 아이들이 일어날 줄 거라 믿습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작지만은 않은 절체절명의 도움이 되어 생명을 이어가게 하겠지요. 살아남은 이들만이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이들을 보듬어 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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