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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표 이야기 -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정표.김순규 지음, 이유정 그림 / 파랑새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1리터의 눈물]에서 아야는 말합니다. "일기는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척수소뇌변성증으로 꽃봉오리를 피우지도 못하고 사지가 마비된 채 세상을 떠난 가토 아야는, 손가락이 움직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기를 남겼습니다. 병상의 기록이며, 문학소녀의 사람의 마음을 한 없이 끄는 작품이며, '아야'라는 한 인간이 치열하게 생존했던 증거로써. 사와지리 에리카가 아야로 등장하는 동명의 드라마는 정말 감동적인 최루성 드라마였지만, 실제의 아야의 인생은 장애가 일상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당하면서도, 진실이 주는 외면할 수 없는 무게 탓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먹먹한 데가 있습니다.
정표도 일기를 씁니다. 아야처럼 작가를 꿈꾸는 이 아이는 13살의 짧은 인생을 백혈병으로 마감하기 직전까지, 부단히 일기를 썼습니다. '일기는 정표가 살아있다는 증표'였지요, 아야와 똑같이. [정표 이야기]를 읽지 않기 위해 많은 날들을 외면해왔습니다. 그것은 책을 펼치는 순간, 짐작만 하는 것으로도 버거운 그 애의 처절한 사투를 똑바로 바라봐줄 살아남은 자의 소명을 저버리는 행동이었지요. 그리고 정표의 병상일기는, 삶과 죽음을 매 순간 상기해야만 하는 이들이 갖는 감히 짐작하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생각이었는지를 확인하게 해주었습니다.
골수이식을 받으면 건강해져야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까지 골수기증자를 찾지 못해 아쉽게 떠나보낸 백혈병 환자들이 그렇게 많은데... 정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정표는 기적적으로 일본에 사는 46세의 친절한 아저씨게 골수를 기증받아 수술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정표는 훌훌 털고 일어나리라, 정표가 이미 1월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믿어버렸습니다. 신을 믿는다면 온통 부정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신을 믿지 않았다면 자기도 모르게 절실히 기도하고 싶어질만큼 정해진 결말을 책을 읽으면서도 바꾸고 싶어졌습니다.
정표는 12살 때 발병한 백혈병과 싸우며, 딱 그 또래의 아이다운 감성을 하나도 잃지 않는 내 주위의 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과거형으로 그 애를 떠올린다는 것이 이렇게 아플 줄 예상했기 때문에, 정말 읽는 것을 미뤄두고 싶었겠지요). 늘 맛있는 음식이 고프고, 유희왕 카드를 모으고, 그리고, 겨루기를 좋아하는, 학교에 안가는 동안 점점 조급해지는 마음과 때로는 너무 의젓하게 고통을 감내하기도 하고, 마음껏 투정도 못하면서도 금새 미안함에 짜증낸 것을 창피해 하는... 누구보다 마음이 눈부시게 건강한 우리의 아이였습니다.
탤런트 김명국 씨의 작디작은 아들, 영길이는 골수기증자를 찾기 못해 세상을 떠났지요. 김명국 씨 부부는 그 뒤로도 백혈병 어린이들을 위해 참 많은 정성을 쏟고 계시더군요. '불멸의 이순신' 세트장에 정표를 초대해 이순신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배려했던 김명국 씨 이야기를 읽다가 어느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TV속의 영길이. 평소 좋아했던 어느 댄스그룹 형들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이는 종일을 기다리고도 그 형들을 만나지 못했었는데... 영길이는 생전에 꿈꾸었던 어느 소망을 이루지 못했지만, 남아있는 아빠(김명국 씨)는 다른 백혈병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참 많이 애쓰고 계시더군요. 정표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참으로 많은 일들을 해주신 분들, 이렇게 정표의 책을 읽을 수 있게 해주신 분들, 정표는 지금도 살아있네요.
김명국 씨 부부처럼, 정표의 부모님도 또 다른 아픈 천사들을 위해 살아남은 이들의 소명을 열심히 이루시겠지요. 아야노 마사루가 쓴 [생명의 나팔꽃]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한 동화가 있어요. 고스케는 갓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백혈병이 발병해, 골수이식을 받지 못해 엄마의 가슴에 묻혔습니다. 엄마는 고스케가 학교에서 키우던 나팔꽃을 보며, 일본 전역에 나팔꽃씨를 보냅니다. 그리고 골수은행에 골수를 기증해 달라는 운동을 하셨지요. 정표에게 기꺼이 골수를 나눠주신 그 아저씨께서도 어쩌면 고스케 엄마께서 보내신 고스케의 나팔꽃씨를 받으셨을지도 모르지요. 아이들을 가슴에 묻어야하는 이들이 과연 무엇을 해야하는지, 슬픔을 이겨내야하는 이유를 조금을 알 것 같습니다.
너무나 분하지만, 세상에는 지금도 작은 몸으로는 절대 싸워 이길 수 없을 듯한 거대한 병과 하루하루 생명을 줄다리기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건강한 사람들이 짐진 것이 무거워질수록, 가볍게 병상에서 그 아이들이 일어날 줄 거라 믿습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작지만은 않은 절체절명의 도움이 되어 생명을 이어가게 하겠지요. 살아남은 이들만이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이들을 보듬어 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