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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 ㅣ 네버랜드 클래식 32
다니엘 디포우 지음, 김영선 옮김, N.C. 와이어스 외 그림 / 시공주니어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국내에 첫 완역된 『로빈슨 크루소』는 참으로 연륜이 느껴지는 책이다. 삼중당 문고본에서, 문학세계사판 완역본으로 옷을 갈아입었을지언정 70년대에 거쳐 90년대에 개정판을 내면서도 번역은 거의 달라진 것이 없다고 역자 스스로 밝히고 있다. 2004년 개정 1쇄라는 명목 하에 1부와 2부의 완역을 내었다고는 하나, 오역을 가다듬어 개역을 한 것이 아닌 표지의 변화 말고는 거의 ‘원형’을 유지하며 띠지만을 둘렀을 뿐이다. 국내의 『로빈슨 크루소』완역판은 출판사와 판형의 변화에 따라 ‘개정’이라는 이름을 달고 유구한 세월을 살아남아왔다.
이 책은 근 3세기 동안 가독성이 좋기로 소문난 책이 아니었던가? 문학세계사의 그것은 가독성은커녕 빨간 펜을 붙들고 ‘교정’을 하고 싶을 만큼 분통이 터지는 책이었다. ‘화란’(유럽이 ‘구라파’였던 시절, 네덜란드는 ‘화란’이었지, 아마-)이라는 지명을 보는 순간 느꼈던 아득한 4차원적 절망감이 무인도 생활에의 몰입을 방해한다. 차라리 완역 전의 각색동화를 찾아 읽어보고 싶어졌을 때, 네버랜드 클래식의 32번째 타이틀로 『로빈슨 크루소』가 나왔다. 28년 2개월 만인 크루소의 귀향과 많이 닮았다!
국내 첫 완역이라는 스포트라이트를 홍보 전략으로 이용할 수 없지만, 역시 매끄럽게 읽힌다. 그런데 매끄럽게 읽히는 만큼 껄끄러운 반감들이 만조에 쓸려오는 난파선의 잔해가 되어 쌓여간다.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서 추구하는 ‘한 재산 만들기 프로젝트’를 따라 읽게 되는 것이 스릴 있었던 그때 그 시절에 비해, 너무나 많은 자극에 지난날의 나를 잃은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18세기 영국인이다. 그가 외려 식민주의를 부정하고, 원주민의 인권에 대한 NGO운동을 펼치기라도 한다면 그것이 바로 넌센스가 아니겠는가? 로빈슨 크루소는 영적인 체험을 무인도라는 극한적인 환경에서 부닥뜨릴지 몰라도 골수까지 상인정신으로 무장한 중상주의자이다. 로빈슨 크루소가 영국에서 브라질로, 브라질에서 칠레의 무인도로, 무인도에서 브라질을 거쳐 다시 영국으로 귀환하는 매 순간, 그가 배를 타게 되는 방향성에는 자유가 아닌 재산상의 문제가 계산되어 있다.
미셸 트루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도 통쾌 상쾌하게 읽었으며, 존 쿳시의 『Foe』또한 고개를 주억거리며 독파했다. 그리고 또다시 『로빈슨 크루소』로 귀환한다. 새 시대의 패러다임으로 고전을 분석해내는 ‘논술고사’식 강박관념을 벗어나 그의 섬에서 이 책을 다시 읽고 싶어진다. 인종차별주의자이면서, 기회주의가 넘치며, 무인도에서조차 재산 축적을 게을리 하지 않는 그에게선 최소한 위선의 악취는 느껴지지 않는다. 모두가 무인도에서 ‘월든’을 구현할 수는 없는 일이다.
너무나 많은 복합적 사고가 급류를 만들어 격한 결론을 내리기를 독촉하는 시대적 소명을 거부하는 것도 재미난 경험이다. 네버랜드 클래식에 『제인 에어』와 『로빈슨 크루소』가 끼어들면서 이 전집은 아동용이라는 한계를 한참 전에 뛰어넘었다. 이런 바람직한 고전에의 회귀와 도전에 참으로 거슬리는 구성은 역자후기의 지나친 간섭을 꼽지 않을 수 없다.
“프라이데이에게 영어를 가르칠 때, ‘예’와 ‘아니요’에 앞서 ‘주인님’이라는 표현을 먼저 가르치는 것은 서구 문화와 기독교를 중시한 사고방식이 낳은 편견입니다. 그리고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늘날의 독자들이 <<로빈슨 크루소>>에 나타난 이러한 시대적 한계도 놓치지 않는다면 작품을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역자 김영선 씨가 밝히고 있다. 그런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렇다. 그렇다 해도 그것을 어린이들, 그리고 몇 번이고 다시 로빈슨 크루소를 다시 읽게 될 300년 후의 오늘날의 독자들이 스스로 발견해내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것일까? 고전 읽기에 몰입한다고 해서 모두가 시대착오적 사고를 전승받는 것은 아니다. 작품 이해에 대한 매뉴얼까지 안내해주는 넘겨짚기는 간곡히 사양하고 싶다. 바른 길이 어딘지, 스스로 그 항로를 찾아 문명과 맞부닥트릴 모험 정도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