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1
한승원 지음 / 열림원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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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 <목민심서>를 읽었을 때는, 다산(茶山)뿐만 아니라 다산의 시대의 아픔이 절절이 느껴져, 당쟁만 일삼은 조선의 선비가 아닌 실사구시를 구현하기 위해 당파를 초월한 사귐을 나누는 인물들의 존재감에 흐뭇해져왔던 것을 느꼈다. <책만 보는 바보>를 읽었을 때는, 청장서옥과 규장각의 장서관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덕무와 그 벗님들의 신분과 시대를 아파하며 곰 삭이는 사귐에 가슴으로 울었던 적이 있었다.

     사색당파와 성리학적인 논쟁의 희생양인 그네들의 후손들이 재기와 역량을 채 쏟아보지도 못하고, 격동에 휩쓸려 좌초해버리곤 말았던 어느 시대를 따라 읽는 것은 아픔이자 선각자들을 재발견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된다. 『추사』또한 그러했다. 중견작가 한승원의 진한 묵향을 머금은 듯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는 예술혼을 치열하게 그려내고 있는 추사 김정희의 생애가 정말 그러했다.

     정조 대왕 사후, 실학의 거두들과 정약용을 잃고, 북학파 서얼들의 일생일대의 기회가 되어주었던 규장각 검서관들의 명맥이 끊기고, 안동 김씨 김조순 일파의 세도가 조선왕조의 사망선고처럼 다가올 즈음. 몰락한 양반도 아니고, 신분의 벽 앞에서 귀기서린 서얼지식인도 아닌, 왕가와 인척 관계에 있는 명문가에서 천재로 불리며 나고 자란 문제적 인물, 추사를 담아낸 역사소설을 대할 때마다 들었던 당혹감을 한승원의 작품에서도 만나게 된다. 이 인물을 이해하기에 내 삶과 앎이 지나치게 얕다는 자괴감을 꼭 닮은 그것과.

     최후의 작품이 될 글씨를 앞에 둔 초로의 추사가 절명하려는 순간을 도입으로 삼은 소설은, 살아낸 인생과 이룩한 예술 모두에서 길을 잃은 모습을 보여준다. 간간이 정신을 되찾을 때마다 조금씩 비쳐지는 반생을 통해 어지러운 운무에 갇혀있는 듯했던 그 고단한 삶을, 불현듯 한 깨달음으로 안내하고 있다. 북학파의 절대 거두이며, 훈고학과 금석학의 대가였던 추사를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로 배치한 것은, 학문적 성과와 시, 서, 화로 이룬 일가도 아니며, 돈오와 점수 논쟁을 비롯한 불심인 것은 왜일까?

     추사를 다룬 여느 소설처럼 일대기를 빼곡하게 그리는 평전이 아닌 고로, 초로의 추사부터, 양자로 입약되는 추사, 청나라 문인들과 교류하는 추사, 평생지기 초의선사와 사귀게 되는 추사, 제주도로 유배 가는 추사, 해배되었다가 다시 북청으로 유배되는 추사- 두서없을 만큼 문득문득 떠오르는 일화를 풀어내는 식으로 급작스럽게 전개되는 가운데, 평생의 업인 글씨와 운명의 여인인 초생과 그의 서얼 자신 상우에 대한 회환이 정치적 격변기 속에 깃들어있다. 한승원이 추사를 그리는 방식은 불현듯 한 깨달음, 깨닫기 위한 탐구, 돈오인가, 점수인가 하는 불교계의 오랜 논쟁과 꼭 닮지 않았는가?

     경지에 오른 그의 문장과 예술가적 기질은 천재의 기벽인양 그려지지 않는다. 한 획을 긋기 위해 선비는 수천 권의 장서를 독파하여 자신을 바로 세우는 독량으로 삼아야하며, 난 한 잎을 치기 위해 선비는 우주의 질서와 진실로 감흥 해야만 한다는 차열하고 긴박한 승부수를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설파하는 추사에게서 지난한 업을 부여받은 문제적 천재의 고뇌가 엿보인다. 시대가 온전히 품지 못한 범접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총체적 자취는 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모사되고, 부정되고, 곡해 받으며 전해 내려오고 있음을 확인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추사를 알기엔, 읽기엔, 담기엔, 풀어내기엔 내가 알아온, 살아온 앎과 삶이 지나치게 적고, 얕다. 군데군데, 아니 거의 전 영역에 걸쳐 공으로 남아있는 추사를 이해하기 위한 나름의 기준과 주석들을 앞으로의 정진 속에서 조금이나마 발굴할 수 있기만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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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머니
이시다 이라 지음, 오유리 옮김 / 토파즈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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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와 <빅 머니>, 이시다 이라 원작의 두 편의 드라마 모두 나가세 토모야가 인상적인 주연을 맡고 있다. 젊고 방송출연이 잦아 언론에 익숙한 재기 넘치는 작가와 아이돌과 연기자 사이의 경계를 점차 좁혀가고 있는 배우(들)의 만남이 가져온 시너지는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이나 강렬했다. 영상 세대를 문학으로 선도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중견 작가와 그의 페르소나가 되어 '이시다 이라' 월드를 연기하는 스펙트럼 넓은 젊은 배우가 동시에 떠오를 정도로, 신작이 나오면 주인공을 연기할 배우를 짐작해보곤 하는 사이클이 정착되려고 하는 즈음에-

     드라마 <빅 머니>의 원작소설이 국내에 출간되었다. 원제인 <파도 위의 마술사>가 아니라, 2002년에 방영된 드라마 타이틀에서 따와 『빅 머니』로 나온 연유가 넘치게 짐작이 가는 바지만, 역시 원제가 가진 은유적 암시가 묻혀버린 것이 아쉽기만 하다. 주식시세표의 급락을 그래프로 도식화하면 볼 수 있는 분석표를 떠올려보라. 첨단의 정보전과 시세표의 파고를 조합해 '빅 머니'를 창출해내는 이들을 '파도 위의 마술사'라고 명명한 메리트가 희석 되어 버렸지만, 그 파도의 낙폭마저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이들이 벌이는 머니 게임은 여전히 날카롭기만 하다.

     1998년은 일본의 거품경제가 무너지고 나서, 그 여파가 경기전반에 완연한 영향을 미쳐 불황이 심화되던 시기이다(우리나라가 IMF의 직격탄을 맞은 1997년 이후를 떠올려보면 되겠다). 대학을 졸업하고 빠찡코로 출퇴근하는 백수인 시라토는, 제 3 금융권의 실세인 정체불명의 노인의 비서로 스카우트 되어, '빅 머니'를 만들어내기 위한 숫자전에 길들여지게 된다. 마쓰바 은행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초전을 준비하면서, 숫자와 정보가 어우러져 넘실대는 파도를 제어하기 위해 '마켓 감각'을 키워나가면서, 노인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하는 시라토의 성장드라마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거품이 붕괴될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부동산을 소유한 노인들에게 접근해 거액의 생명보험을 들게 만든 후, 자살자가 속출하게 될 정도로 참담한 빚을 지게 만든 마쓰바 은행을 몰락하게 만들려는 노인의 사연이 그들에게는 주어진 인간미의 마지노선이다. 오히려 노인과 시라토가 탐욕의 노예가 되어 마켓의 파도에서 표류했다 해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마쓰바 은행을 쥐락펴락 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조작된 정보와 방송까지 장악하여 보도전을 펼치는 면모들이 그들을 '(파도 위의)마술사'답게 했을 텐데, 역시 이시다 이라는 작품 속에 진정한 악역을 남겨 두려하지 않는다.

     이시다 이라의 젊은 주인공은 좌초는 하지만, 결코 실패자가 되는 법이 없다. 선악의 모호한 경계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몇몇의 범죄행위조차 껄끄러운 수단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의 통과의례가 되어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로 삼는다. 시라토는 노인의 진정한 후계자라 할 만한 '차기 마술사'가 되어,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일본의 다음 세대에게 넘겨줘야하는 사명까지 부여받는다. 이시다 이라의 소설은, 그 주인공은, 하나의 소명을 발견하면, 그 외의 것들은 가볍게 스러지게 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머니 게임에서 승리한 이후, 다시 위험한 연애물로 돌아온 이후에도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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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와 함께한 그해
아르토 파실린나 지음, 박광자 옮김 / 솔출판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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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탈출을 꿈꾸는 소시민들에게 '자연'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일탈? 도피? 회귀? 원점? 모체? 인간성의 회복? 어쩌면 그 모든 것을 얻을 최후의 기회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휴가 기간에 맛보는 막간의 자연이 아니라 뭔가 더 원초적이고 압도적인 풍광 속에서라면 더 쉽게 얻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우리네와 달리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자연을 영유하며 사는 핀란드에서조차 '자연'이란 지친 도시인들의 최후의 보루로써 치열하게 갈구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핀란드의 국민작가라는 아르토 파실린나의 『토끼와 함께한 그 해』은, 일상과 습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도시적 삶에 찌든 중년남자가 야생토끼 한 마리와 마주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탈극이다. 3류 잡지에 시류에 편승한 적당한 기사를 쓰며 닳고 닳아버린 바타넨은 우연히 야생토끼를 치게 되는데, 토끼를 안아든 순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던져버리고픈 충동에 사로잡힌다. 지옥 같은 결혼 생활은 끝내고, 꿈도 없는 직장도 내팽개치고 달랑 토끼 한 마리를 대동하고, 핀란드의 오지를 구석구석 누비는 유랑이 시작된다.

     단순노동자가 되어 벌목꾼이 되고, 별장수리를 하고, 부랑자나 위험인물로 오인 받으며 '되는대로' 살아가면서 진정한 희열을 맛보는 바타넨은, 점차 야성을 넘치게 회복해 절대 도시적 삶으로 복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토끼의 야생성이 바타넨에 의해 희석되어 갈수록, 바타넨의 야수성은 점차 짙어지는데, 핀란드 전역을 누비며 벌어지는 여정 속에는 범죄라고 볼 수밖에 없는, 정도를 지킬 수 없는 일들이 늘어만 간다. 실제로 곰을 쫓아 러시아국경을 넘어버린 바타넨은 국제문제를 야기 시키며 구속되는데, 교도소의 벽조차 바타넨과 토끼 콤비의 한 번 풀려버린 야(수)성을 가둬둘 수가 없다.

     바타넨은 과연 위험인물인가? 자연을 소비하고 도시로 복귀할 뿐인 이들에게 바타넨은 위험인물이다. 위선과 위악의 경계가 무너져 본능이 극대화 되어버리는 바타넨의 일탈은, 그네들의 내면에 잠들어있는 본성을 스스로 포기해버렸음을 일깨우기에, 그의 폭주가 부러워죽을 것 같으면서도 질서유지의 명목 하에 처단해야만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야성이 깨어나는 것과 비례해, 자연조차도 설계하고 질서를 부여해야만 하는 의무감에 사로잡힌 대다수의 사람들은 위기의식을 느낀다. 바타넨은 이제 도시로도, 도시의 연장선상에서의 유사자연으로도 돌아갈 수가 없다.

     핀란드 현지인들은 바타넨의 여정을 따라 읽는 재미가 유별날 듯싶다. 오지에서 오지로, 국경마저 넘나드는 그의 행각을 생생히 그려볼 수 있는 자국민들에게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리라 짐작해본다. 불쑥 야생토끼(가 있을 리가 없지만) 한 마리와 조우한다 해도, 마음 내키는 만큼 유리걸식할 만한 야성을 깨울만한 일탈에 서슴없을 수 있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바타넨은 그런 의미에서 질시와 기피대상이 되어 마땅한, 실로 위험천만한 우리의 봉인된 야성의 화신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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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
잭 캔필드.게이 헨드릭스 지음, 손정숙 옮김 / 리더스북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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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도 전에 그 책에 대해 선입견을 갖는 일은 불행한 일이다. 꽉 닫힌 마음으로 이미 정해버린 결론에 따라, 좁디좁은 시야로만 책을 품평해버리고 마는 일이 거듭되는 것에, 자신의 책임은 없다고 회피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그렇지만 틀에 박힌 자기계발서, 경제경영서, '닭고기스프'의 아류작들, 공저와 대필이 넘치는 매너리즘의 매너리즘에 빠진 '베스트셀러'들에 시달리다보면, 읽기도 전에 지례짐작으로 걸려야만 하는 독자의 노고(?)도 종종 필요했노라고 항변도 해본다.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이라니, 거기다 공저자의 한 사람은 잭 켄필드('닭고기 스프'의 공저자)이다. 두툼한 분량 안에 명사들의 널리 알려진 에피소드들이 다이제스트로 실려 있을 것만 같아 읽기도 전에 투덜대기부터 시작한다. 48명의 명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베스트셀러작가, 전문경영인, 대중연설가, 환경운동가 등부터 다양한 이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읽다보니, 이 책은 정말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인생을 전환점을 책에서 발견하고 성공에의 지짐으로 삼은 이들의 진솔한 성찰이 담겨 있었다.

      명사들의 자기과시가 담긴 그저 그런 에세이였다면 과감하게 덮어버렸을 테지만, 그들이 써낸 베스트셀러에서는 미처 발견해낼 수 없었던 인생의 바로미터들이 빼곡하게 담겨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선정 위대한 100권'식의 리스트가 아닌, 말 그대로 인생 전반의 길잡이가 되어준 그네들만의 특별한 사연이 담긴 책들을 소중하게 전하고 있는 에세이들이 뜻밖의 선물처럼 귀하게 다가온다. 무엇보다도 별 볼일 없다고 치부해버린 어느 어느 책들에게서 정수를 발견해내는 그들의 경계 없는 사고와 과감한 실행이 아름다웠다.

     한 권의 책이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세간의 통설만이 아닌, 진실한 고백과 열정을 목도할 수 있는 것은 기분 좋은 경험이 되어주었다. 한번 고착되어 쉽게 교정되지 않는 고정관념을 곧바로 깨버릴 수는 없지만, 독선과 아집으로 단단히 무장한 채 독설과 무관심으로 일갈해버렸던, 결코 선호한 적 없던 책들 속에서 그들이 발견했던 초신성의 폭발만큼이나 파급력이 강한 일생일대의 만남들이 한 없이 부럽기까지 하다. 48명의 명사들이 인생의 책으로 소개하고 있는 리스트들을 따라 읽노라니, 불과 하루 전에 읽었던 책(존 F. 케네디의 <용기 있는 사람들>)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물론 내게도 '인생의 책'이라고 할 만한 귀한 만남이 되었던 책이 있다. 차마 말로, 글로 표현하기에도 아까울 정도로 아끼고 있는. 책을 통해 인생의 변혁을 이룩한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그 귀중한 평생의 책과의 마주침을 묻어두었던 지난 시간들을 한탄하는 것보다, 세상에 나온 이상 자신만의 소명의식을 여전히 찾아 헤매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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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영혼 1 뫼비우스 서재
막심 샤탕 지음, 이세진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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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테의 <신곡>은 성경 다음으로 서구사회에 영향을 끼친 한 권이라 할 수 있다. 인문학적인 가치며, 문학사적인 가치는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장르문학의 굳건한 축으로 이 순간에도 그것을 토대로 삼은 미디어믹스가 진행 중이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을 두루 쓴 단테지만, 유독 지옥도의 아수라장을 계시로 삼아 연쇄살인의 헤로글로빈의 향연을 벌어지게끔 만드는 방대한 작가군들을 본다면 대체 어떤 생각을 할까?


     '단테(그리고 <신곡>)'를 타이틀 삼은, 아니 아예 타이틀 롤로 삼아 후속편을 양산되는 시리즈물이 좀체 수그러들 줄을 모르고 쏟아져 나오는 즈음이지만, 그만큼 널리 알려진 구도를 차용해 독보적 장르소설을 써보려는 작가적 야심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것을 목도하는 것 또한 쉬이 질리지 않는 것도 같다. <신곡>을 완독하는 것보다, '신곡 살인'을 숨죽이며 읽어 내려가는 것이 영혼을 살찌우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무더위 속에서 체온을 냉각시키는 반가운 효과를 가져 오는 요즘이라면 더더욱.


     프랑스 스릴러 계의 총아로 급부상했다는, 막심 샤탕이 20대에 발표한 데뷔작 『악의 영혼』은 미국적 장르소설의 공식에 철저히 부합하는 작품이다. 눈을 뗄 수 없는 빠른 전개와 연속되는 사건으로 가독성을 높이고, 사지가 절단되고 사방에 피가 넘쳐나는 스플래셔 무비만큼이나 영상미가 넘치며, 젊고 매력적인 형사의 고군분투가 인상적이면서도, 히어로(와 독자)를 좌절과 경악으로 몰아가는 사이코패스인 극악무도한 연쇄살인마가 여지없이 등장하는. 북미의 영상물과 여타의 스릴러의 계보를 충실히 잇고 있어, 철저하게 재미를 줄 수 있는, 어찌 보면 위화감이 전혀 들지 않는 '데뷔작스럽지' 않은 작품이다.


     장르소설은 더욱 잔혹하고, 선정적으로 진화해야만 살아남는다. 웬만한 설정으로는 독자가 기대하는 자극을 전달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CSI-DAY에 열광하며 거의 전문가적 수준의 범죄 수사용어에 익숙해져 있는 세대와의 파워게임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면 그럴 만도 하다. 『악의 영혼』은 CSI 전 시리즈를 수도 없이 시청한 예비독자들마저도 감탄하게 만들 만한 치밀한 범죄수사와 프로파일링 과정을 선보이면서, 기선을 제압당하지 않을 만큼 자신감이 넘쳐난다. 과학수사기법에 대한 묘사는 영상물과 장르소설을 탐독하며 얻어진 '안락의자 탐정'식의 산물이 아니라 작가가 실제로 범죄심리학을 비롯한, 법의학연구소를 드나들며 여러 차례 부검에 입회하면서 얻어진 것으로, 작품 내의 '현장감'의 정체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있게 만든다.


     반전과 결말에 이르는 과정까지 뭔가 헐리웃 영화의 전형 같다. 오컬트를 암시하며 밀교적 주술들이 넘쳐날 듯싶던, 이미 죽은 것이 확실한 연쇄살인범의 재래가 ***라는 설정 하나로 풀려버리는 그 허무함. 주인공이 만난 운명의 여인이 끝내 희생되어버리고 말아 그에게 우수의 그림자를 안겨 더 인간적인 면모를 부여해 속편에서 활약하게 만들려는 계산. <신곡>에서 암시를 얻은 시신의 특정부위를 도륙하는 살인극의 정체가 드러나는 장면에서의 허술한 반전. 무엇보다 <신곡>을 '지옥에서 살아남아 돌아온 이야기'로 해석해내는 그 독창성(!) 하나로 악의 축을 담당하고 있는 **이란 인물이 가진 턱 없이 부족한 존재감까지.


     오리건의 포틀랜드 경찰청의 조슈아 브롤린과 그 동료들은 앞으로 발간될 두 편의 후속작에서도 활약을 볼 수 있을 예정이라니, 믿을만한 스릴러를 만났다는 흡족함을 가지고 기다려보려고 한다. 완벽에 가까운 캐릭터가 아니라, 실패와 낙담에 빠졌다가도 악에 굴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가진 인간미 넘치는 인물 군상들이, 범죄수사의 치밀한 전개과정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쉰다. 반전이 허술하고, 악의 세력이 단순하긴 하지만, 한층 강력해진 속편 속에서 멋지게 부활할 것이라고 예상해본다. 꼭 기대에 부흥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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