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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내게 삼일절에 대한 기억은 지속적이고, 견고하다고 할 수 있다. 초등학교 재학 당시의 삼일절은 개학 전날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번잡하고 고뇌에 찬 날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데, 밀린 방학숙제를 끝마쳐야할 괴롭기 짝이 없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삼일절이면 방영하곤 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한 영화는 방학숙제에 대한 근심과 초조함을 단숨에 빼앗는, 어찌 보면 그날 밤에 숙제에 치여 울어버리고 싶게 만들었던 원흉이 되기도 했다. 해마다 방영하는 특선영화였는데도 자유를 되찾는 유태인들의 모습은 언제나 희열이 되어 다가왔다.
홀로코스트가 아니더라도, 도스또예프스끼, 솔체니친, 프리모 레비, 커트 보네거트 같은 문호들의 고발로 이어지는 작가들의 극한체험을 수용소 문학으로 만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미약한 희망의 힘이 얼마나 거대할 수 있는지도 되새겨왔다. 철모르는 시절의 특선영화로 만나곤 했던 실존의 증언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파괴적인 진실을 담고 있어 점차 경외하게 되기 마련이다. 유태인, 전쟁포로, 사상범 등이 대다수인 이 범주에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다소 다른 양상을 띠는데, 주인공 레오의 증언에 따르면 "참전 경험이라곤 전혀 없는 우리가 러시아인들에게는 히틀러가 저지른 범죄에 책임이 있는 독일인들이었다."(p.50). 루마니아에 거주하는 소수 독일계 주민들이 독일과 루마니아와 러시아의 투쟁의 양상에 따라 무작위로 수용소로 끌려가게 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또 한 권의 수용소문학.
루마니아의 소수 독일인으로 헤르타 뮐러의 동료 작가였던 오스카 파스티오르의 경험담을 토대로 쓰인 이 책은 비인간적인 행태의 정점에 위치한 수용소에 대한 시적 고발이다. 파스티오르의 화신인 레오는 열일곱의 동성애자로 자신을 모르는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막연한 기대를 품고 수용소로 징집 당한다. 수용소에 모인 여기저기의 독일계 주민들이 히틀러의 망령을 대신해 속죄의 명목으로 러시아의 '재건'을 위한 강제노동에 투입된다. 그것은 곧 굶어죽고, 고문당해 죽고, 얼어 죽고, 시멘트에 빠져 질식사하고, 병사하고, 도망치다 총살당하는 것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5년간의 수용소 생활이 끝나고도 그들은 '배고픈 천사'와 이별할 수조차 없는 처지에 놓인다.
수용소의 모든 죽음의 징후에는 배고픔의 천사가 드리워져 있다. 명아주를 삶아먹고, 조금 더 큰 빵을 차지하기 위해 배급 빵을 바꾸는 의식을 하고, 수용소로 가져간 얼마 되지 않은 생필품을 털어 한 줌의 식량과 바꾸는 물물교환을 해도 채워질 수 없는 그들의 허기는 엄숙하기 짝이 없는 공식과도 같다. 삽질 1회=빵 1그램. "배고픈 천사는 석탄 속에, 심장삽 속에, 관절 속에 있다. 그는 안다. 온몸을 먹어치우는 삽보다 몸을 덥히는 것은 없음을. 그는 그러다, 배고픔이 그 기예마저 먹어치운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p.94) 수용소에서 가장 각광받는 유희는 존재하지 않는 만찬에 대한 레시피를 더듬어가는 것이다. "배고픔의 단어는 모두 먹는 단어다. 눈앞에 음식이 그려지고 입천장에 맛이 느껴진다. 배고픔의 단어들 혹은 먹는 단어들은 환상을 먹여 키운다. 말이 말을 먹으며 맛있어한다. 배는 부르지 않지만 적어도 음식 곁에 머문다."(p.178)
독일어, 루마니아어, 러시아어가 혼재하는 다문화공동체, 수용소를 '호텔'로 일컬으며 희망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으려고 애쓰는 레오는, 아니 오스카 파스티오르는 수용소의 폭압을 언어로 맞선다. 쉴 새 없이 석탄을 부려야하는 그의 삽은 '심장삽', '배고픔의 천사'가 기승을 부려 남녀의 구분을 할 수 없는 몰골을 일컫는 '뼈와가죽의시간'에 이르면 '뼈여자'와 '뼈남자'가 있을 뿐이다. 그러다 배고픔의 천사를 잠재울 수 있는 '한방울넘치는행복'을 만나는 분에 넘치는 순간에 이르기도 하지만, 수용소를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배고픔의 천사는 그 모든 시간에 깃들어 그들을 진실로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든다. 레오와 오스카, 헤르타 뮐러가 만들어내는 시적언어는 폭압에 항거하는 고요한 바리게이트이자 처연한 자기연민이다.
루마니아 안의 소수 독일인, 러시아 수용소에서의 독일과 루마니아에 동시에 버림받은 수감자, 루마니아에서 망명해 모국어인 독일어로 작품 활동을 하지만 여전히 독일 변방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느냐는 평을 듣곤 하는 헤르타 뮐러. 그의 데뷔작 『저지대』에서 루마니아 내의 소수독일인 마을 슈바벤의 촌로는 "여기가 샤르데냐 같은 섬이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한다. 철저하게 고립되고 이중의 감시에 시달리는 이들만이 풀어낼 수 있는 새로운 단어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시린 시어들은 이제 자기방어의 영역이 아닌 세계의 문단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자기방어적인 언어의 요새가 치유의 힘을 발휘하는 진솔한 힘을 책을 덮고서야 느릿하게 발견해낸 나는, 아우슈비츠의 대 탈주 못지않게 배고픈 천사에게서 해방되는 그들을 바라 마지 않는다.
"내가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손수건이 내 운명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운명을 포기하면 지는 것이었다. 나는 확신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하는 할머니의 작별인사가 손수건으로 모습을 바꿨음을. 나는 손수건이야말로 수용소에서 나를 보살펴준 단 한 사람이었다고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말할 수 있다. 지금도 그 확신에는 변함이 없다."(p.89-90)
살가운 말을 할 줄 모르는 어머니의 투박한 애정표현인 "손수건 있니?"라는 한 마디. 레오에게 끌려간 아들 몫의 손수건을 내밀었던 러시아 어머니의 손길. "넌 돌아올 거야"라는 할머니의 기원. 작지만 작지 않은 것들의 숨겨진 힘이 인간을 회의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게 만든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비루한 처지에 놓이게 될지도 모르는 모든 이들에게 마지막 자긍심을 간직하게 해주는 소박한 손수건 한 장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