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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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삼일절에 대한 기억은 지속적이고, 견고하다고 할 수 있다. 초등학교 재학 당시의 삼일절은 개학 전날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번잡하고 고뇌에 찬 날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데, 밀린 방학숙제를 끝마쳐야할 괴롭기 짝이 없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삼일절이면 방영하곤 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한 영화는 방학숙제에 대한 근심과 초조함을 단숨에 빼앗는, 어찌 보면 그날 밤에 숙제에 치여 울어버리고 싶게 만들었던 원흉이 되기도 했다. 해마다 방영하는 특선영화였는데도 자유를 되찾는 유태인들의 모습은 언제나 희열이 되어 다가왔다.
 

홀로코스트가 아니더라도, 도스또예프스끼, 솔체니친, 프리모 레비, 커트 보네거트 같은 문호들의 고발로 이어지는 작가들의 극한체험을 수용소 문학으로 만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미약한 희망의 힘이 얼마나 거대할 수 있는지도 되새겨왔다. 철모르는 시절의 특선영화로 만나곤 했던 실존의 증언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파괴적인 진실을 담고 있어 점차 경외하게 되기 마련이다. 유태인, 전쟁포로, 사상범 등이 대다수인 이 범주에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다소 다른 양상을 띠는데, 주인공 레오의 증언에 따르면 "참전 경험이라곤 전혀 없는 우리가 러시아인들에게는 히틀러가 저지른 범죄에 책임이 있는 독일인들이었다."(p.50). 루마니아에 거주하는 소수 독일계 주민들이 독일과 루마니아와 러시아의 투쟁의 양상에 따라 무작위로 수용소로 끌려가게 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또 한 권의 수용소문학.
 

루마니아의 소수 독일인으로 헤르타 뮐러의 동료 작가였던 오스카 파스티오르의 경험담을 토대로 쓰인 이 책은 비인간적인 행태의 정점에 위치한 수용소에 대한 시적 고발이다. 파스티오르의 화신인 레오는 열일곱의 동성애자로 자신을 모르는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막연한 기대를 품고 수용소로 징집 당한다. 수용소에 모인 여기저기의 독일계 주민들이 히틀러의 망령을 대신해 속죄의 명목으로 러시아의 '재건'을 위한 강제노동에 투입된다. 그것은 곧 굶어죽고, 고문당해 죽고, 얼어 죽고, 시멘트에 빠져 질식사하고, 병사하고, 도망치다 총살당하는 것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5년간의 수용소 생활이 끝나고도 그들은 '배고픈 천사'와 이별할 수조차 없는 처지에 놓인다.
 

수용소의 모든 죽음의 징후에는 배고픔의 천사가 드리워져 있다. 명아주를 삶아먹고, 조금 더 큰 빵을 차지하기 위해 배급 빵을 바꾸는 의식을 하고, 수용소로 가져간 얼마 되지 않은 생필품을 털어 한 줌의 식량과 바꾸는 물물교환을 해도 채워질 수 없는 그들의 허기는 엄숙하기 짝이 없는 공식과도 같다. 삽질 1회=빵 1그램. "배고픈 천사는 석탄 속에, 심장삽 속에, 관절 속에 있다. 그는 안다. 온몸을 먹어치우는 삽보다 몸을 덥히는 것은 없음을. 그는 그러다, 배고픔이 그 기예마저 먹어치운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p.94) 수용소에서 가장 각광받는 유희는 존재하지 않는 만찬에 대한 레시피를 더듬어가는 것이다. "배고픔의 단어는 모두 먹는 단어다. 눈앞에 음식이 그려지고 입천장에 맛이 느껴진다. 배고픔의 단어들 혹은 먹는 단어들은 환상을 먹여 키운다. 말이 말을 먹으며 맛있어한다. 배는 부르지 않지만 적어도 음식 곁에 머문다."(p.178)
 

독일어, 루마니아어, 러시아어가 혼재하는 다문화공동체, 수용소를 '호텔'로 일컬으며 희망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으려고 애쓰는 레오는, 아니 오스카 파스티오르는 수용소의 폭압을 언어로 맞선다. 쉴 새 없이 석탄을 부려야하는 그의 삽은 '심장삽', '배고픔의 천사'가 기승을 부려 남녀의 구분을 할 수 없는 몰골을 일컫는 '뼈와가죽의시간'에 이르면 '뼈여자'와 '뼈남자'가 있을 뿐이다. 그러다 배고픔의 천사를 잠재울 수 있는 '한방울넘치는행복'을 만나는 분에 넘치는 순간에 이르기도 하지만, 수용소를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배고픔의 천사는 그 모든 시간에 깃들어 그들을 진실로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든다. 레오와 오스카, 헤르타 뮐러가 만들어내는 시적언어는 폭압에 항거하는 고요한 바리게이트이자 처연한 자기연민이다. 
 

루마니아 안의 소수 독일인, 러시아 수용소에서의 독일과 루마니아에 동시에 버림받은 수감자, 루마니아에서 망명해 모국어인 독일어로 작품 활동을 하지만 여전히 독일 변방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느냐는 평을 듣곤 하는 헤르타 뮐러. 그의 데뷔작 『저지대』에서 루마니아 내의 소수독일인 마을 슈바벤의 촌로는 "여기가 샤르데냐 같은 섬이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한다. 철저하게 고립되고 이중의 감시에 시달리는 이들만이 풀어낼 수 있는 새로운 단어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시린 시어들은 이제 자기방어의 영역이 아닌 세계의 문단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자기방어적인 언어의 요새가 치유의 힘을 발휘하는 진솔한 힘을 책을 덮고서야 느릿하게 발견해낸 나는, 아우슈비츠의 대 탈주 못지않게 배고픈 천사에게서 해방되는 그들을 바라 마지 않는다.
 

 "내가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손수건이 내 운명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운명을 포기하면 지는 것이었다. 나는 확신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하는 할머니의 작별인사가 손수건으로 모습을 바꿨음을. 나는 손수건이야말로 수용소에서 나를 보살펴준 단 한 사람이었다고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말할 수 있다. 지금도 그 확신에는 변함이 없다."(p.89-90)

살가운 말을 할 줄 모르는 어머니의 투박한 애정표현인 "손수건 있니?"라는 한 마디. 레오에게 끌려간 아들 몫의 손수건을 내밀었던 러시아 어머니의 손길. "넌 돌아올 거야"라는 할머니의 기원. 작지만 작지 않은 것들의 숨겨진 힘이 인간을 회의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게 만든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비루한 처지에 놓이게 될지도 모르는 모든 이들에게  마지막 자긍심을 간직하게 해주는 소박한 손수건 한 장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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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 - 한국의 미를 지킨 대수장가 간송의 삶과 우리 문화재 수집 이야기
이충렬 지음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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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이 남장 화가였다는 설로 세간의 이목을 끈 소설과 드라마, 영화가 잇달아 흥행에 성공하면서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들이 새롭게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둘러싼 끊이지 않는 잡음이 불과 얼마 전에도 이슈가 되어 간송미술관에 수장된 훈민정음마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우리 문화재를 둘러싼 소요들의 중심에 간송미술관이 화두가 되는 경우는 너무도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결과가 아닐까 싶다. 간송 전형필이라는 희대의 대수장가가 평생을 바쳐 일군 업을 뜨겁게 논하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세간에 머물면서도, 그의 일대기를 뒤늦게나마 접할 수 있는 평전과의 만남은 한참 늦은 격이 있다.
 

일제 강점기, 미곡상을 가업으로 이어가는 손이 귀한 무관의 집안에서 태어난 전형필이 어떻게 대수장가로 거듭나고,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개인박물관 보화각을 일구어내는지 소상하게 밝혀주는 대중적인 저작이 이토록 늦되게 완성된 것이 새삼스럽지만은 않다. 그가 모으고, 되찾아온 민족의 보고들이 가진 드라마틱한 사연들과 간송의 굴곡진 인생사가 얽히고설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풀어내야할지 어찌 망설여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다만 평전이라면 으레 기대하는 객관적인 시야를 원천적으로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지적하고 싶다. 저자 이충렬이 그려내는 간송은 너무도 찬연해서 시종 일방적인 시선을 고수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하는 저자의 항변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조선 40대 거부 가운데 하나였던 독보적인 재산가였기에 전형필은 시대의식이 상실된 한량이 되어 유유자적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교육 사업에 남다른 관심과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집안의 유지, 월탄 박종화를 비롯한 민족의식이 투철한 친인척들과의 교류, 평생의 스승인 위창 오세창의 가르침에 힘입어 자신의 시대적 소명을 젊은 나이에 깨달은 선각자가 된다. 친일파가 되어 일신의 영달을 꾀하지 않으면서도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구국에 힘쓰다 외려 우리 문화를 수호하는 대수장가의 업을 이루지 못할까 다른 노선의 애국애족의 길을 선택했기에 간송의 처세는 복잡 미묘할 수밖에 없었을 테다.


막대한 자산을 소진해가며 사들였던 서화, 고서, 도자기, 불상 등에 이르는 방대한 우리 문화재를 뚜렷한 소신으로 한 데 모으고 지켜갔던 그의 노고는 일반의 기준으로 감히 헤아릴 수가 없다. 천학매병을 둘러싼 흥정으로 오간 게 기와집 스무 채의 가격이라느니, 요즘 시가로 60억 정도는 나간다는 규모도 규모거니와, 기품 있는 수장가가 감수해야하는 거래의 규범 같은 것은 어찌해도 너무나 먼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시세에 웃나가는 고액일지라도 꼭 조선 땅에 남겨야하는 명분을 찾았다면 망설임 없이 수장하려는 승부사 이전의 문화수호가의 면모에는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보화각의 수장품들이 흩어지기도 하고, 고서점 한림서림을 꾸려가며 완성한 고서적의 총체인 간송문고가 소실되기도 하는 등의 고난, 교육 사업에 뜻을 두고 인수했던 보성중고등학교의 재정이 파탄 나서 거액의 빚을 갚기 위해 고단했던 말년까지 격동하는 시대는 거인의 안식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았다. 수장가들의 대다수는 가세를 일으키기 위해 말년에 이르러 수장품을 처분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나 간송을 생을 걸고 지켜온 수장품들을 고스란히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명품을 얻기 위한 희대의 승부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이 바로 비애에 찬 말년의 신념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 문화를 지키는 것이 민족혼을 수호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간송이 희생했던 금전을 비롯한 수많은 가치들은 국보, 보물급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는 간송미술관의 실체로 남아있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방대한 컬렉션 뿐 아니라 지금도 유지에 따라 일년에 두 차례 무료로 개방되는 운영방침은 거인의 그늘이 여전히 우리에게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세금감면의 일환으로, 자산투자의 방편으로 운영하는 재벌가의 갤러리들이 산재해 있는 작금의 실태를 되돌아보지 않더라도, 간송이 이룩한 유일무이한 문화수호사업은 비교할만한 사례가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겸재, 단원, 혜원, 추사, 훈민정음 해례본, 삼국시대의 금동불상, 고려시대의 석탑, 청자와 백자 등등.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시대적 계보를 바로 세우고, 우수함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소신 있는 수장의 결과가 가히 독보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간송이라는 거인의 어깨에 서서 우리 역사를 복원하고 공백 없이 만나는 만복을 누리고 있음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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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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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소녀를 욕망하는 일화는 별자리만큼이나 무한한 것은 아니라 해도 희소하진 않다. 중년의 남성과 소녀 사이의 육체적 욕망은 굳이 '험버트 험버트'와 '롤리타'로 대변되는 거대한 소설적 그늘을 연상하지 않아도 전혀 색다를 게 없는 소재이기도 하다. 여기 칠순에 이르는 노시인과 시인이 사랑하는 젊음의 총아인 열일 곱 소녀, 거기다 문학적 재능이 전무하다는 것만 빼면 제법 건실한 시인의 중년제자가 펼치는 치정극에 가장 새로울 것이 있다면, 전작『촐라체』와 『고산자』로 기성의 팬들과 젊은 독자들을 동시에 충족시킨 박범신의 신작이라는 데 있다. 『은교』는 시인의 묘사 안에서 관능의 영력을 극대화하여 그네들의 욕망이 손끝으로 만지는 것처럼 다가오는 치밀하기 그지없는 소설이다.
 

노화가 추한 것인가, 노인의 욕망이 추한 것인가? 건강한 욕망을 젊음의 영역이라고 정해놓은 바 없으나, 노인이 소녀를 추구하는 것, 노시인이 은교를 욕망하는 것은 추악한 일이라고 시인의 제자는 질겁한다. 시인의 영감으로 다듬어진 은교는 실상 별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소녀에 불과하지만, 사랑이란 것이 어디 그런가? 눈에 들고, 마음에 드는 순간, 유일무이한 존재로 화하는 법칙에 충실할 뿐임을 우리는 안다. 『은교』는 노골적인 성애묘사에 중점을 두는 것도 아니면서, 소녀를 사이에 둔 사제 간의 치정극이 무르익어갈수록 고조되는 성적에너지가 팽배해간다. 타이밍의 문제일 뿐 파국이 예정되어있다는 것을 결코 지울 수가 없어, 원숙한 중견작가의 온유한 멜로드라마를 예상했다면 극히 다른 반향이 되쏘아 올 것이라고 단언한다.

노시인은 자신의 열망 안에서 매혹적으로 피어오르는 은교를 육체적으로 탐하는 중년의 제자를 질투하고, 제자는 노시인과 은교를 중심으로 점점 밀도 높아지는 일상을 질투한다. 단순한 치정극으로 묶여있지 않는 이 소설은 어느 순간 애욕이 아닌 예술의 중심부를 건드리기 시작한다. 평생 고아한 시인으로 살아온 스승와 빈곤한 문재로 고통받아온 제자가 대필 작가 관계로 엮이면서, 세속적 성공과 문단의 비평을 농락하는 사기극이 치정극과 맞물려 세 사람의 관계를 더욱 옥죄어오게 한다. 실제적으로 소녀를 탐하지 못하는 시인은 유령작가가 되어 세간을 비웃고, 소녀는 탐할 수 있으나 천재성에 예속되어버린 제자는 스승과의 관계를 전복시키는 순간을 욕망하기 시작한다. 애욕과 예술이 얽혀들면서 『은교』는 무수한 텍스트와의 유사성을 획득하는데 반해, 더욱 적나라하게 날뛰기 시작하는 정념이 소설을 박제가 아닌 생령처럼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노시인 이적요가 남긴 은밀한 노트에 빼곡히 들어찬 욕망의 광시곡은 그의 사후 1년이 지나면 폭로될 수 있도록 변호사에게 남겨져있고, 이제 막 전설의 영역에 들어선 시성은 자진해서 추문으로 획득되는 불멸을 얻을 판이다. 시인의 노트와 추문의 생존자 은교의 진술과 시인보다 앞서 비명횡사한 제자 서지우의 일기가 교차되며 등장하는 구성은 반전을 위한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정해진 결말을 더욱 공고히 하며, 삼각관계와 대 문단사기극이 농익어가고, 위선과 위안이 버무려진 질투와 천재성의 외줄타기의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시인의 설계대로, 고상한 척 가면을 쓰고 있는 세상을 향해, 어떻게 진실이 흉포성을 휘두르는지 목도하라 당부하면서. 어느새 공모자로까지 전락인지 격상되었는지 모를 입지를 부여받은 독자는 가쁜 숨을 가다듬을 겨를조차 없다.

'은교'는 시인들의 절대적 사랑을 받는 '영원한 여성'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적요와 은교, 서지우와 은교의 은밀하고 끈적이는 관계보다 이적요와 서지우의 공생과 천적관계 사이의 불콰한 역학구조 안에서 왜곡되어버린 미성숙한 영혼이다. 이적요의 열망을 알면서도 필요이상으로 다가간 것도 은교이며, 서지우와의 부절절한 관계 속에서 윤리보다는 자기보호가 우선인 존재도 은교이다. 은교는 시심을 돋우고 영감을 자극하는 원천이라기보다 변질되어가는 욕망을 미추로 판단하지 않는 방관자의 면모를 지녔다. 무엇보다 세 사람 사이의 질투의 핵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 이적요와 서지우 사이의 애정, 애증, 독점욕, 살의, 회환으로 점철된 깊디깊은 유대관계를 간파하는 냉철한 목격자이기도 하다.

죽음과 맞닿아있는 듯한 전인미답 촐라체의 빙벽에서 배다른 형제 박상민과 하영교는 카르마의 업보를 비워내기보다는 힘껏 껴안을 생의 의지를 가지고 귀환했다(『촐라체』). 김정호는 지도가 나라의 것으로 귀속되는 것이 당연했던 흉흉한 시절, 민초들에게 제 몫의 정당한 실용을 되돌리기 위해 옛 산들을 절대 고독 속에서 넘나들었다(『고산자』). 작가 스스로 '갈망의 3부작'이라고 명명한 『은교』에 이르러, 생을 긍정하는 인간에 대한 경의가 폭발할 것으로 자연스레 예상했다면, 그 기대는 과연 충족된 것인가, 배신당한 것인가? 고작 내릴 수 있는 결론이란, 살아있기 때문에 욕망하고, 미완의 존재이기 때문에 불멸의 예술에 생의 전부를 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고요하다'는 '적요(寂寥)'를 필명으로 삼아 예술의 가치를 재단하고, 차등을 부여하는 문단을 조소하는 이적요의 소리 없는 뇌성이 인상적이다. 평생을 시작만 발표하여 시인의 고결함을 획득한 것도 자신의 의지였으며, 서지우를 내세워 저급한 것으로 치부되는 장르문학으로 대중성마저 확보한 유령작가행각은 명민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자신의 사후, 예술의 귀천을 논하는 잡소리를 일거에 침묵하게 하기 위해 계획한 자발적인 추문의 폭로는 일견 살풍경한 냉소의 정점처럼 보이지만, 예술에의 절대적인 헌신의 역설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애욕과 예술이 양날의 검이 되어 서로를 찔렀던 이 치정극에서 이적요, 서지우는 유죄를 면치 못하는, 두 개의 심장을 지닌 한 몸과 다름없는 공범자지만, 추문의 생존자 은교는 그 길이 가시밭길임을 알아도 시를 쓰기 시작한다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비로소 『은교』가 3부작의 완결이며, 생과 예술에 대한 결코 노화하지 않는 갈망임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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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 지그재그 6
히가시 지카라 글.그림, 김수희 옮김 / 개암나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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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위의 하얀 선 앞에서 긴장한 채, 아니면 자못 심각한 결심으로 비장해진 아이의 모습이 책장을 넘기고, 다 덮으면 나를 어디로 데려다줄지 살짝 설레고 말았다. 도로시는 노란 벽돌길을 따라 에메랄드 성으로 가지만, 나는 집으로 가는 하늘이를 따라 하얀 선이 안내하는 작은 모험을 향해 떠난다. 표지 속의 하늘이가 선 풍경이 맑고 밝은 따스한 풍광인 것에 마음이 놓인다. 일조량이 너무나 부족했던 4월의 연일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이며, 이상저온에 시달리던 추운 날이 아니어서, 일상의 작은 모험을 떠나기에 안성맞춤이 아닐 런지.
 

하굣길, 하늘이는 도로 귀퉁이의 하얀 선만 밟고 집으로 가기로 다짐한다. 늘 상 지나치는 갓길표시일 뿐인데 하늘이의 다부진 표정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아 보인다. 제비꽃무덤을 보며 금광을 발견한 듯 기뻐하는 앤 셜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동류의식이 있다면, 어른이든, 아이이든 결코 이 작은 다짐을 비웃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하늘이의 미션이 과연 성공할 것인지 흐뭇한 마음으로 응원을 보내며, 조심조심 하얀 선을 밟는 그 걸음을 뒤따르기로 한다.
 

그러나 장애물이 없다면 그것은 모험이라 할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 하늘이의 부푼 기대를 날려버릴 강력한 장애물들이 이리도 산재하다니, 불쑥 그림책 속으로 끼어들어 하얀 선 위의 복작이는 방해물들을 치워주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다. 하늘아, 아무래도 너 혼자 애써야할 것 같다! 띄엄띄엄 그려진 횡단보도는 통통 뛰어서 건너고, 공사 중을 알리는 삼각 고깔의 하얀 칠을 꼭 붙잡고 살금살금 건너고, 험상궂은 커다란 개가 웅크리고 있어 가슴 졸일 때는 개가 한눈을 파는 틈에 재빨리 지나치면서, 하늘이의 작지만 다사다난한 모험은 결코 쉬이 끊어지지 않는다. 이 녀석, 제법이잖아!
 

이런 일 저런 일을 헤치고 당당하게 집 앞에 섰을 때 하얀 선은 거기서 끝이 나고 말았다. 하늘이가 딛고 선 최후의 하얀 선을 제외한 공간을 시커먼 구덩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하늘이가 느끼는 절망감이 절절하게 다가왔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이 역전의 용사의 심정은 암담하기 이를 데 없고, 모험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려 단단히 마음먹은 이 숨은 동반자 또한 외려 미안해지는 기분. 과연 하늘이는 끊어진 하얀 선 위에 선 채, 하얀 선만 밟고 집까지 가는 애초의 미션을 어떻게 완수해냈을지 반전의 묘미는 기대의 영역에 남겨두려 한다.
 

이 그림책은 보통 그림책의 판형보다 한참은 작고, 의례 기대하는 매끄럽고 도톰한 양장판도 아니다. 여백이 하나도 없이 하늘이를 둘러싼 풍경들까지 모조리 채색되어 있어 얇실한 두께와 크기가 조금은 상쇄되는 것도 같다. 이왕이면 그림책 특유의 옆으로 기다랗거나, 한참은 높다래 서가에 끼워놓기 난감한 재미난 판형으로 나와 주었더라면 하고 바라게 되지만, 하늘이의 모험담에 온통 빠져들어 계속 불퉁거릴 시간을 아껴 하늘이에게 응원을 보내고자 하는 마음이 더 자라버렸다. 
 

오늘은 어제와 다름없고, 내일은 오늘의 또 다른 모습이라 투덜거리는 아이들에게 슬며시 묻고 싶다. "일상이 지루한 건, 네 마음이 멈춰있기 때문은 아니니?", "세상을 보는 눈이 싫증으로 가득 차, 매 순간 달라지는 모습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라고. 학교에 가는 길, 학원으로 가는 길, 집으로 가는 길. 어쩌면 우리 아이들은 길에 발을 내디딜 틈도 없이 엄마의 차와 학원버스에서만 길을 내다보기 때문에 '하얀 선'의 비밀을 발견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길이란, 모험이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않고, 즐길 줄 아는 너른 마음을 가진 아이에게만 열려있는 것이라고 소소하게 항변하고 싶어진다. 일상의 작은 모험을 스스로 기획하고 누릴 수 있는 자유는 도처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채는 것이 열쇠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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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으로 학교 간 날 꿈공작소 1
타이-마르크 르탄 지음, 이주희 옮김, 벵자맹 쇼 그림 / 아름다운사람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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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사연으로 알몸으로 학교에 갔단 말인가?', 그림책을 보기도 전에 즐길 생각보다 걱정이 앞서는 걸 보면, 나는 참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어른일 뿐인가 보다. 그렇지만 이런 연상에 익숙한 이들에게 일상적이지 않은 무엇에 대한 그림책만이 줄 수 있는 해학의 코드가 담뿍 실려 있을 것 같아 심각한 표정을 풀기로 한다. 알몸에 커다란 가방, 빨간 장화만 신고 있는 표지의 남자아이가 미소 짓고 있는 것에 주목하며, 나도 따라 웃을 준비를 한다. 얘, 너 정말 알몸으로 학교 갔니? 


피에르네 아빠는 늦잠을 잔 나머지 피에르를 학교 보내는 데 급급해 피에르가 알몸인 채인 걸 눈치 채지 못한다. 거기다 피에르의 항변 또한 묵살하는 센스. 역시 원흉은 어른이었다! 책가방과 빨간 장화만 몸에 걸치고 학교에 간 피에르가 학교에 들어서지 못하고 고래만 빼꼼 내밀고 교문을 배회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아이의 난감함이 참으로 와 닿아 다음 장부터 펼쳐질 수군거리는 소리, 손가락질 하는 모습, 난감해하시며 꾸중하실지도 모를 선생님이 떠올라 마음이 좋지 못했다. 우리의 피에르, 그나마 신발을 신어서 다행이라는 네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알몸의 피에르를 전신샷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빨간 장화를 신은 모습을 부각시킨다거나, 부끄러운 부분(?)을 소도구들로 가려주기도 하면서, 피에르의 불편한 심기를 에둘러 표현하고 있는 그림들이 눈에 띄었다. 무척 색다른 차림으로 학교에 온 피에르를 본 친구들과 선생님은 아무도 피에르에게 직접 묻지 않는다. 장화가 예쁘다고 칭찬하거나, 빙그레 웃어줄 뿐이다. 슬슬 몸이 꼬이고,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는 건 피에르도, 지켜보는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딱 한 친구, 가장 친한 폴만 넌지시 물을 뿐. "안 추워?"
 

피에르는 빨간 장화만 신고 여전히 알몸인 채로, 매시간 발표를 하고, 폴짝폴짝 체육도 한다. 그러다 자기처럼 알몸으로 학교를 온 마리를 만나 비로소 크게 웃을 수 있게 되는데… 피에르를 편하게 해주려고 알몸인 사람들만 그리는 친구들이랄지, 발표 잘하는 피에르에게 정성스럽게 칭찬을 해주는 선생님이 고맙긴 하지만, 나는 여전히 피에르에게 누군가 입을 옷을 건네준다거나, 아빠에게 피에르의 옷을 가져와달라고 부탁하는 '재미는 없지만' 지극히 상식적인 장면이 나오길 바라고 있는 것을 알았다. 참 아름다운 배려이긴 하지만, 이봐요, 그 아인 하루 종일 알몸이었단 말이에요! 


'프랑스식 성숙한 배려', 즉 '똘레랑스'를 넌지시 일깨우는 그림책이라는 것은 단박에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똘레랑스가 지나쳐 살짝 가면극으로 보이는 건 역시 상식의 틀에서 좀처럼 끌어내지지 않는 타협의 결과물일 것이다. 내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정말 학교에 처음 가게 된 초등학교 1학년에게 이 책을 주었다. 장면마다 즐거워하고, 교묘하게 가려진 피에르의 특정한 부위를 콕 가리키며 자지러진다. 그렇다면 된 것 아닐까? 아이들에게 배우는 단순명쾌한 진리들이 꽉 막힌 어른들의 세계를 단숨에 무너뜨리는 순간과의 조우, 그래서 그림책은 파격이 아니라 미쳐 들어다보지 못한 차이를 조명하게 하는 만화경이 된다.
 

갓 학교에 간 아이들은 무수한 실수들로 뒤범벅이 된 채 하루하루를 보낸다. 화장실에 제 때 가지 못해 옷에 실례를 하거나, 깜빡 잊은 숙제 때문에 선생님께 한 소리 듣는 순간 터지는 울음이랄지, 가끔씩 선생님을 "아줌마!"라고 부르는 난감한 순간들. 그때마다 터지는 웃음과 큰 소리, 모여드는 눈초리와 수근거림에 마음을 다치는 일이 빈번해질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사소한 일들이지만 어마어마한 마음의 무게로 다가와 휘청대는 작은 아이들을 떠올리며, 알몸으로 학교 간 피에르가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처럼, 충분히 배려 받고 실수는 살짝 눈감아 줄 수 있는 이들에 둘러싸여 학교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알몸으로 학교 간 날은 아무래도 난감하게 그지없지만, 옷을 입고 학교 간 날이면 이렇게 재미나지 않았겠지? 피에르, 참 수고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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