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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으로 학교 간 날 ㅣ 꿈공작소 1
타이-마르크 르탄 지음, 이주희 옮김, 벵자맹 쇼 그림 / 아름다운사람들 / 2009년 12월
평점 :
'대체 무슨 사연으로 알몸으로 학교에 갔단 말인가?', 그림책을 보기도 전에 즐길 생각보다 걱정이 앞서는 걸 보면, 나는 참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어른일 뿐인가 보다. 그렇지만 이런 연상에 익숙한 이들에게 일상적이지 않은 무엇에 대한 그림책만이 줄 수 있는 해학의 코드가 담뿍 실려 있을 것 같아 심각한 표정을 풀기로 한다. 알몸에 커다란 가방, 빨간 장화만 신고 있는 표지의 남자아이가 미소 짓고 있는 것에 주목하며, 나도 따라 웃을 준비를 한다. 얘, 너 정말 알몸으로 학교 갔니?
피에르네 아빠는 늦잠을 잔 나머지 피에르를 학교 보내는 데 급급해 피에르가 알몸인 채인 걸 눈치 채지 못한다. 거기다 피에르의 항변 또한 묵살하는 센스. 역시 원흉은 어른이었다! 책가방과 빨간 장화만 몸에 걸치고 학교에 간 피에르가 학교에 들어서지 못하고 고래만 빼꼼 내밀고 교문을 배회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아이의 난감함이 참으로 와 닿아 다음 장부터 펼쳐질 수군거리는 소리, 손가락질 하는 모습, 난감해하시며 꾸중하실지도 모를 선생님이 떠올라 마음이 좋지 못했다. 우리의 피에르, 그나마 신발을 신어서 다행이라는 네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알몸의 피에르를 전신샷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빨간 장화를 신은 모습을 부각시킨다거나, 부끄러운 부분(?)을 소도구들로 가려주기도 하면서, 피에르의 불편한 심기를 에둘러 표현하고 있는 그림들이 눈에 띄었다. 무척 색다른 차림으로 학교에 온 피에르를 본 친구들과 선생님은 아무도 피에르에게 직접 묻지 않는다. 장화가 예쁘다고 칭찬하거나, 빙그레 웃어줄 뿐이다. 슬슬 몸이 꼬이고,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는 건 피에르도, 지켜보는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딱 한 친구, 가장 친한 폴만 넌지시 물을 뿐. "안 추워?"
피에르는 빨간 장화만 신고 여전히 알몸인 채로, 매시간 발표를 하고, 폴짝폴짝 체육도 한다. 그러다 자기처럼 알몸으로 학교를 온 마리를 만나 비로소 크게 웃을 수 있게 되는데… 피에르를 편하게 해주려고 알몸인 사람들만 그리는 친구들이랄지, 발표 잘하는 피에르에게 정성스럽게 칭찬을 해주는 선생님이 고맙긴 하지만, 나는 여전히 피에르에게 누군가 입을 옷을 건네준다거나, 아빠에게 피에르의 옷을 가져와달라고 부탁하는 '재미는 없지만' 지극히 상식적인 장면이 나오길 바라고 있는 것을 알았다. 참 아름다운 배려이긴 하지만, 이봐요, 그 아인 하루 종일 알몸이었단 말이에요!
'프랑스식 성숙한 배려', 즉 '똘레랑스'를 넌지시 일깨우는 그림책이라는 것은 단박에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똘레랑스가 지나쳐 살짝 가면극으로 보이는 건 역시 상식의 틀에서 좀처럼 끌어내지지 않는 타협의 결과물일 것이다. 내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정말 학교에 처음 가게 된 초등학교 1학년에게 이 책을 주었다. 장면마다 즐거워하고, 교묘하게 가려진 피에르의 특정한 부위를 콕 가리키며 자지러진다. 그렇다면 된 것 아닐까? 아이들에게 배우는 단순명쾌한 진리들이 꽉 막힌 어른들의 세계를 단숨에 무너뜨리는 순간과의 조우, 그래서 그림책은 파격이 아니라 미쳐 들어다보지 못한 차이를 조명하게 하는 만화경이 된다.
갓 학교에 간 아이들은 무수한 실수들로 뒤범벅이 된 채 하루하루를 보낸다. 화장실에 제 때 가지 못해 옷에 실례를 하거나, 깜빡 잊은 숙제 때문에 선생님께 한 소리 듣는 순간 터지는 울음이랄지, 가끔씩 선생님을 "아줌마!"라고 부르는 난감한 순간들. 그때마다 터지는 웃음과 큰 소리, 모여드는 눈초리와 수근거림에 마음을 다치는 일이 빈번해질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사소한 일들이지만 어마어마한 마음의 무게로 다가와 휘청대는 작은 아이들을 떠올리며, 알몸으로 학교 간 피에르가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처럼, 충분히 배려 받고 실수는 살짝 눈감아 줄 수 있는 이들에 둘러싸여 학교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알몸으로 학교 간 날은 아무래도 난감하게 그지없지만, 옷을 입고 학교 간 날이면 이렇게 재미나지 않았겠지? 피에르, 참 수고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