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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 ㅣ 지그재그 6
히가시 지카라 글.그림, 김수희 옮김 / 개암나무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도로 위의 하얀 선 앞에서 긴장한 채, 아니면 자못 심각한 결심으로 비장해진 아이의 모습이 책장을 넘기고, 다 덮으면 나를 어디로 데려다줄지 살짝 설레고 말았다. 도로시는 노란 벽돌길을 따라 에메랄드 성으로 가지만, 나는 집으로 가는 하늘이를 따라 하얀 선이 안내하는 작은 모험을 향해 떠난다. 표지 속의 하늘이가 선 풍경이 맑고 밝은 따스한 풍광인 것에 마음이 놓인다. 일조량이 너무나 부족했던 4월의 연일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이며, 이상저온에 시달리던 추운 날이 아니어서, 일상의 작은 모험을 떠나기에 안성맞춤이 아닐 런지.
하굣길, 하늘이는 도로 귀퉁이의 하얀 선만 밟고 집으로 가기로 다짐한다. 늘 상 지나치는 갓길표시일 뿐인데 하늘이의 다부진 표정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아 보인다. 제비꽃무덤을 보며 금광을 발견한 듯 기뻐하는 앤 셜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동류의식이 있다면, 어른이든, 아이이든 결코 이 작은 다짐을 비웃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하늘이의 미션이 과연 성공할 것인지 흐뭇한 마음으로 응원을 보내며, 조심조심 하얀 선을 밟는 그 걸음을 뒤따르기로 한다.
그러나 장애물이 없다면 그것은 모험이라 할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 하늘이의 부푼 기대를 날려버릴 강력한 장애물들이 이리도 산재하다니, 불쑥 그림책 속으로 끼어들어 하얀 선 위의 복작이는 방해물들을 치워주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다. 하늘아, 아무래도 너 혼자 애써야할 것 같다! 띄엄띄엄 그려진 횡단보도는 통통 뛰어서 건너고, 공사 중을 알리는 삼각 고깔의 하얀 칠을 꼭 붙잡고 살금살금 건너고, 험상궂은 커다란 개가 웅크리고 있어 가슴 졸일 때는 개가 한눈을 파는 틈에 재빨리 지나치면서, 하늘이의 작지만 다사다난한 모험은 결코 쉬이 끊어지지 않는다. 이 녀석, 제법이잖아!
이런 일 저런 일을 헤치고 당당하게 집 앞에 섰을 때 하얀 선은 거기서 끝이 나고 말았다. 하늘이가 딛고 선 최후의 하얀 선을 제외한 공간을 시커먼 구덩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하늘이가 느끼는 절망감이 절절하게 다가왔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이 역전의 용사의 심정은 암담하기 이를 데 없고, 모험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려 단단히 마음먹은 이 숨은 동반자 또한 외려 미안해지는 기분. 과연 하늘이는 끊어진 하얀 선 위에 선 채, 하얀 선만 밟고 집까지 가는 애초의 미션을 어떻게 완수해냈을지 반전의 묘미는 기대의 영역에 남겨두려 한다.
이 그림책은 보통 그림책의 판형보다 한참은 작고, 의례 기대하는 매끄럽고 도톰한 양장판도 아니다. 여백이 하나도 없이 하늘이를 둘러싼 풍경들까지 모조리 채색되어 있어 얇실한 두께와 크기가 조금은 상쇄되는 것도 같다. 이왕이면 그림책 특유의 옆으로 기다랗거나, 한참은 높다래 서가에 끼워놓기 난감한 재미난 판형으로 나와 주었더라면 하고 바라게 되지만, 하늘이의 모험담에 온통 빠져들어 계속 불퉁거릴 시간을 아껴 하늘이에게 응원을 보내고자 하는 마음이 더 자라버렸다.
오늘은 어제와 다름없고, 내일은 오늘의 또 다른 모습이라 투덜거리는 아이들에게 슬며시 묻고 싶다. "일상이 지루한 건, 네 마음이 멈춰있기 때문은 아니니?", "세상을 보는 눈이 싫증으로 가득 차, 매 순간 달라지는 모습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라고. 학교에 가는 길, 학원으로 가는 길, 집으로 가는 길. 어쩌면 우리 아이들은 길에 발을 내디딜 틈도 없이 엄마의 차와 학원버스에서만 길을 내다보기 때문에 '하얀 선'의 비밀을 발견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길이란, 모험이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않고, 즐길 줄 아는 너른 마음을 가진 아이에게만 열려있는 것이라고 소소하게 항변하고 싶어진다. 일상의 작은 모험을 스스로 기획하고 누릴 수 있는 자유는 도처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채는 것이 열쇠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