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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산고의 고통을 겪으며 낳는 아기는 그들만의 세계를 갖고 태어난다. 그것은 육체를 지니고 그만큼의 무게로 세상을 내리누른다. ‘나’의 존재감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우는 울음소리는 내 존재를 각성한 자의 외침이라 할 수 있다.
어머니 뱃속의 태아 상태였을 때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다양한 소리들과 흔들리는 진동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라고 구별할 수 있는 인식의 대상은 아니다. 태아에겐 그런 현상을 설명할 ‘언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로 설명할만한 인식의 틀이 없었다. 이것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철학적 사유를 연상시킨다. 작자인 김애란은 하이데거의 사유를 자신의 소설에서 문학적 상상력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위의 글에서도 자궁 속에 있던 작중 화자는 언어를 몰랐기 때문에 어제와 내일, 즉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첫 울음을 우는 순간 하나의 존재로 인식된 개인은 그제야 신체의 바이오리듬이 원활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종이 물고기」의 주인공인 ‘그’는 미숙아로 태어난다. 미숙아는 체중이 2.5kg이 못되게 태어난 아기를 말한다. 젖을 빠는 힘이 약해 여러 감염에 대한 저항력이 낮아 사망률이 높다. 정상인과는 다르게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뭔가 모자라는 게 있기 때문에 어떤 희망을 갖고 꿈꾼다. 모든 게 만족스럽게 충족된 상태라면 살아갈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갖고 싶은 게 있고 채워 넣고 싶은 게 있다는 욕망이 우리를 바쁜 생활로 몰아내는 것이다.
세상은 물고기가 유영하는 낮꿈의 축제장이다. 사람들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현실을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이뤄주는 ‘환상’속으로 떠나고자 한다. 이것은 현실적인 삶과 구별되는 원시적인 태고의 삶에 대한 욕구가 꿈틀거리는 것이다. 그가 낮꿈을 자주 꾸는 것은 어머니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가 젖이 잘 나오지 않아 ‘막걸리’를 많이 마셨던 것이다. 막걸리를 마신 어머니의 젖은 그를 취하게 만들어 낮꿈을 꾸게 만든다. 꿈을 꾼다는 것은 깊게 잠들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가 불안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린이는 보통 낮보다 밤을 무서워하기 마련이지만 그에겐 아니었다. 그에게는 밤보다 낮이 훨씬 불안하기 때문에 현실을 잊기 위해 공상의 세계로 들어선다.
그가 밤보다 대낮이 더 불안한 이유는 부모님이 일을 하러 나가 집에 혼자 있기 때문이다. 어두컴컴한 방에 혼자 갇혀 있는 그에게는 밤보다 더욱 짙은 어둠을 느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밤은 공포의 대상이지만 그에게는 그래도 부모의 곁에 있어서 보호받을 수 있는 시간이다. 그에 비해 대낮은 밝아서 두려울 게 없지만 어두운 방에서 혼자 견뎌내야 하는 시간으로, 그에게는 참아낼 수 없이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학교나 사회에 나가기 전에 집에만 갇혀 지내는 시간, 낮잠을 자는 동안 꾸는 꿈의 시간, 서울로 올라가 옥탑방에 포스트잇을 붙이는 시간 등은 그에게 있어서 원시적인 삶의 생명력이 태동하는 순간이다. 물고기가 바다를 유영하고 그 물고기의 입 속에 자신의 몸을 맡긴 그는 시간을 거슬러 태초로 향하려는 것이다. 누구나 자궁 속 태아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자궁회귀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 속에 있을 때, 비로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완전한 충족의 상태에 이르기 때문이다. 김애란의 소설 속 물고기는 물속을 자유롭게 떠다니는 태초의 원형적 패턴을 상징한다. 육지의 중력을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물속에서는 인간의 몽상적인 상상이 더 수월하게 발휘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삶과 죽음의 환원성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 우리는 그 근원적인 질문에 답할 시간이다. 우주의 끝은 어디인가? 인간의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세상의 종말 이후에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그 어느 질문에도 우리는 답할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끝났어도 다시 시작되는 것이 생명의 신비다. 산에 불이 나 모든 것이 타 버렸어도 몇 년이 흐르면 그곳에는 자연스럽게 새싹이 돋는 등의 생명이 움터 오르는 것이다.
네버엔딩스토리(never ending story),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우리의 언어로 쓰여 공상의 세계를 꿈꾼다. 이것이 작가들이 바라는 궁극적인 ‘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