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등학교를 잘 나온 덕분에, 난 부자 동창이 제법 되는 편이다. 술이 덜 취한 어느날, 집에서 소주를 마시면서 인터넷에 글을 쓰고 있었다 (집에서 마시는 건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그랬는데 바로 그 친구가 채팅을 요구한다.
친구: 넌 뭐해? 난 술한잔 하고 있어.
나: 어? 그래? 나둔데!
친구: 넌 뭐마시니? 난.... 발렌타인 21 마시는데.
나: 어? 그, 그냥... 섬씽 마셔.(왜 하필 떠오르는 술이 썸씽밖에 없었을까)
친구: 그렇구나. 언더럭으로 마시기엔 발렌타인보다 레미마틴이 더 좋고...조니워커 블루는 어쩌고...
나: 그, 그래...
그날 들은 얘긴데, 그는 세상에 과천 경마장에 자기 말도 있었단다. 말들의 세계는 잘 몰라도, 경주말의 경우 말 한마리가 승용차보다 훨씬 비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와, 이런 별천지에 살고 있는 애가 있구나, 이런 게 그때 내 생각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우리 어머니와 그친구 어머님은 서로 아는 사이였다.
"민아, 너 영식이(가명) 알지? 영식이가 아-------------주아주 부자래. 건물이 몇십채고....."
그때 알았다. 내가 가끔 영화를 보러 간 극장이 그의 소유라는 걸.
어느날 모임에 다녀오신 어머님이 이러신다.
"민아, 영식이 어머니가 그 극장 1층에 엄청난 커피숍을 개업했더라. 오늘 다녀 왔는데..."
어머님께 이랬다. "엄마, 돈 없다고 기죽지 마 (초등 동창들 사이에선 내가 극빈자다). 늘 당당하셔야 해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난 그의 앞에 서면 기가 죽는다. 눈처럼 흰 피부는 무슨 영국 왕실의 귀족같고, 거기다 재벌이고... 동창회서 만났을 때, 오랜만이라고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을 난 나도 모르게 두손으로 잡았고, 고개까지 숙이는 오버를 범한 것 같다. 그 후로도 난 그 앞에만 서면 주눅이 들었다.
그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민아, 내가 수달, 스컹크, 펭귄(모두 가명)...이렇게 만나는 모임이 있거든. 다들 널 좋아하는데, 언제 우리 모임 한번 안올래?"
히익! 수달, 스컹크, 펭귄... 다들 알아주는 재벌들 아닌가. 난 "마음의 준비가 안됐다"는 선문답식 답변을 하면서 집요하기 짝이 없는 그의 요청을 뿌리쳤다. 어머니께 말씀드린 것과는 반대로, 난 돈을 가지고 내게 우호적인 한 친구를 경계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는 거다. 돈이 많은 것은 분명 그의 잘못은 아니고, 나도 뭐 극빈자는 아니니 당당해도 되련만, 왜 그럴까? 모르겠다. 그게 옳든 그르든, 내게 있어서 누군가에게 돈이 너무 많다는 것은 친구가 되는 데 있어서 지장을 초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