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새해 첫날에는 모교 교수님들 집을 돌면서 세배를 하는 전통이 있는데, 어제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맨 처음 간 집-채선생님댁이다-에서 중국요리에다 맥주 4캔과 양주 석잔을 마셨다. 난 양주보다는 소주를 좋아하지만, 선생님 댁은 양주를 마음껏 먹는 몇 안되는 좋은 기회이기에 좀 마시는 편이다. 와인은 전혀 못먹는 내가 양주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술은 발렌타인이다. 맛은 구별하지 못하지만 햇수가 오래될수록 비싸다는 것 쯤은 알고 있다. 채선생님은 발렌타인 17년산을 꺼내 놓으셨고,  난 석잔을 마셨다. 그거밖에 안마신 이유는 다음 번에 들를 이선생님 댁에 고급 양주가 있을 거였기 때문.

작년에  이선생님 댁에 갔을 때, 난 발렌타인 30년산을 처음으로 먹었다. 맛은 기억하지 못하고 그냥 먹었다는 사실만 생각나지만, 하여간 먹었다. 술맛을 안다는 내 동료는 "역시 틀려!"라면서 아는 체를 했지만, 그에게 눈을 가리고 구별해 보라면 12년과 30년도 구별하지 못할 것임을 확신하는 바다.

몇년 전, 이선생님 댁에서 발렌타인 17년이 나오기에 귀한 술이라고 생각해서 옆에다 끼고 홀짝홀짝 다 따라 마셔버렸다. 술이 거의 비어가자 선생님은 갑자기 "어, 술이 없네?" 하면서 21년을 꺼내놓으시는 거다. 급한 마음에 남은 17년을 다 비우고 21년을 허겁지겁 마셨는데, 얼마 안있어서 다들 일어나는 분위기다. 나도 따라서 일어났는데, 일어나다가 그만 몸이 기우뚱 하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아픈 것보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기에 굉장히 쪽팔렸던 기억이 난다.

발렌타인을 그래도 몇번 먹어본, 그것도 30년까지 먹어본 사람이니 이제 좀 의젓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달랬지만, 이선생님이 꺼내놓으신 21년산을 어찌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나만큼 발렌타인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과 경쟁을 하듯 홀짝홀짝 따라마셨고, 다음 차례인 홍선생님 댁에 가는 것까지는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홍선생님이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떠왔다는 싱싱한 회를 보자 난 그만 이성을 잃어 버렸다. 회를 어찌 술 없이 먹겠는가. 맥주를 두병쯤 마시고, 몇년산인지 기억도 안나는 양주를 마셨다. 그 다음 일은 기억에 없다. 택시 아저씨가 깨우는 바람에 난 내가 집에 도착한 것을 알았는데, 그때 시각은 놀랍게도 오후 7시 40분이었다. 그럼 도대체 몇시에 맛이 간 걸까? 혹시 실수는 하지 않았을까? 온갖 걱정들이 머리 속을 어지럽히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으련다. 며칠만 잠복해서 선생님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다 잊어버리실 테니까. 그리고, 내가 어디 실수 한두번 하나? 후회가 전혀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새해 첫날 그래도 알차게 술을 마셨다는 데 만족한다. 첫날부터 마시면 한해 내내 마신다는 말도 안되는 말은 잊어 버리자. 첫날은 첫날이고, 오늘은 오늘의 삶을 살면 되는 거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