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대학이 다 그렇듯, 우리 학교도 논문점수를 가지고 재임용 여부를 결정한다. 유수 외국저널에 논문을 실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 다른 대학에 비해 우리 학교는 그래도 널럴한 편인데, 외국잡지에 논문 한편을 혼자 실으면 300점이고, 우리나라 잡지는 150점을 준다. 일년에 150점인가만 채우면 문제가 없으니 별거 아니구나 생각하겠지만-한편만 쓰면 되잖아?-꼭 그런 건 아니다. 논문 한편을 혼자 쓰면 150점이지만 다른 사람 이름이 들어가면 그만큼 점수가 깎인다. 저자가 2명이면 75점, 3명이면 50점이 된다. 5명 이상이면 무조건 30점.

문제는 내가 쓰는 대부분의 논문이 다섯 이상의 저자를 거느린다는 거다. 실험을 하면서 도와줬던 사람들이 둘, 셋은 되고, 지도교수 및 기타 은사를 넣으면 기본이 다섯이다. 1저자인 경우 보너스 점수가 있긴 해도, 그래봤자 50점 정도가 고작이다. 그러니 매년 할당되는 점수를 채우려면 세편 이상을 써야 한다. 혼자 교실을 지키고 있는데다 실험을 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내가 무슨 수로 그 점수를 채운담? 그래서 생각한 게 바로 책이었다.

저서는 대개 혼자 쓴다. 그리고 점수도 크다. 무려 250점이니, 웬만한 논문 6편에 해당한다. "일이년마다 책 한권씩만 쓰면 되겠네?"라는 생각이 들 법하다. 여기서도 문제가 있다. 그 책이라는 게 반드시 학술서, 그러니까 교수들이나 전공 대학원생이 읽는 것이어야 한다. 일반 대중을 위한 책은 겨우 50점을 얻을 뿐이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교수의 말이다. "오리엔테이션 때 저서 얘기를 많이 하더라구요. 대중서를 써놓고 학술서라고 우기는 사람이 많답니다" 그렇게 우긴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나다. 몇백권밖에 안팔려서 그렇지, 내가 작년에 쓴 <xxxxxx>은 대표적인 대중서적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난 "학술서적이다, 제목에 기생충이 들어갔잖아!"라고 박박 우겼는데, 안타깝게도 내 뜻은 관철되지 않았다.  다시금 신임교수의 말, "사실 심사하는 사람들이 자세히 읽어 보지는 않거든요. 제목을 잘 붙이라고 하더라구요"

올해 10월부터 난 또다른 책을 준비 중이다. 기생충을 쉽게 설명한 책이 외면받았으니, 기생충을 소재로 한 소설을 써서 독자와 만나고자 한다. 현재 90% 가량 썼는데, 술만 안먹는다면 내년 초까지는 원고를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제목...그렇다. 제목이 중요하다. 내용은 엽기.추리.전투 등이 망라된 스릴러일지언정, 제목만은 그럴 듯하게 쓰는거다. <기생충 감염의 윤리적 고찰>-이건 우리학교 다른 교수가 쓴 <의사파업의 윤리적 고찰>을 베낀거다-이랄지, <기생충의 생물학적 특성에 대한 관찰>, <기생충 뒤집어 읽기>-그러면 '충생기'가 되나?-등등... 출판사야 그런 제목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겠지만-아마도 그들은 <기생충의 역습>같은 선정적 제목을 붙일 거다-책이란 게 나를 위해 있는 거지, 출판사를 위해 있는 건 아니잖아? 정 뭐하면 제목은 학술적으로 해놓고, 그 밑에 부제를 다는 방법도 있다. "당신의 창자는 안녕하십니까?"라는 식으로.

사실 학술서나 대중서를 차별하는 건 말이 안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딱딱하고 어렵게 써내려간, 읽다보면 저자도 어지러움을 느끼는 그런 책들은 도대체 왜 출판되는 걸까? 내가 기생충에 대해 아주 딱딱한 책을 쓴다고 해보자. 그걸 도대체 누가 읽는가. 우리 전공 사람들도 외면할거다. 새로 나오는 논문 읽기도 바쁜데, 남이 쓴 책을 왜 읽는담? 책이란 게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전제로 한 것일진대, 거의 읽혀지지 않는 책을 내는 건 저자의 업적점수 외 다른 의미는 없다. 정말 훌륭한 학술서를 쓴다면 모르겠지만-우리학교 이정구 선생님이 쓴 <어지러움>이 바로 그런 책이다-그런 건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나무가 아까울 책들이 너무도 많다. 글을 쉽게 쓰는 건 그리 만만한 작업이 아니며, 어렵게 쓰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울 수 있다.

시대는 변했지만 교수들의 의식은 아직도 폐쇄적이다. 대중의 수준은 날로 높아가는데, 언제까지 대중서적을 차별하면서 딱딱하기 그지없는 논문적 글쓰기에 매몰되어 있는가. 책에 관한 발상의 전환이 아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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