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난 벤지 사진을 보고 쓴 소설입니다. 전적으로 허구이며, 벤지는 지금 제 곁에서 자고 있지요. 물론 건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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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공원의 호수가에 앉아 있는 내 눈에서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다. 공원에서 여름의 정취를 느끼던 사람들이 힐끗힐끗 날 쳐다보았다. 그 중 한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연 당했나봐"
"그러게"
여기 올 때마다 벤지는 호수에 뛰어들 것같이 폼을 잡곤 했다.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봐서 그런 거였을까. 원래 말을 못하는 녀석이었지만, 이젠 물어볼 수도 없게 되었다.

그렇다. 벤지는 죽었다. 난 병에서 벤지의 유골을 호수에 던졌다. 몸무게 5킬로그램, 당당한 체격을 가진 벤지는 한줌도 못되는 유골로 변해 있었다. 그렇게 이뻤던 벤지와 하얀 분필가루와도 같은 유골 사이에서 난 어떤 연관성도 발견할 수 없었다.

모든 건 그대로였다. 심보가 고약한 여자가 사장인 우리집 앞 맥주집은 여전히 파리만 날렸고, 맞은편의 '옛시골집'은 몰려드는 손님들로 북적댔다. 좁은 골목길은 숨쉴 틈이 없이 차들이 지나다녔다. 벤지만 없을 뿐이었다.

현관 문을 열고 습관처럼 소파로 눈을 돌렸다가, 이내 고개를 떨궜다. 언제나 소파에 누워 잠을 자던 벤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 현실을 인정하자. 벤지는 이제 없다. 새벽 한시가 지난 시각이었지만, 난 잠이 오지 않았다.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신이 더 맑아진다. 내 옆에 벌렁 누워 잠을 자던 벤지가 없어서일까. 허전함을 잊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밤을 더 보내야 할까.

십오년의 세월은 집안 곳곳에 흔적을 남기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벤지가 가끔 실례를 하던 마루는 이미 썩어 있었고, 벤지가 주로 소변을 보던 화장실에는 특유의 찌린내가 베었다. 벤지가 쓰던 밥그릇 4개와 물그릇들, 우유를 먹던 접시는 이젠 더이상 필요가 없었지만, 난 그걸 버리려는 엄마를 말렸다. "제가 보관할께요"
그게 부질없는 집착이란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당장이라도 벤지가 저 방에서 나와 꼬리를 흔들것만 같은데 어떻게 밥그릇을 버린단 말인가. 벤지와의 추억이 남아있는 물건을 볼 때마다, 내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벤지는 맨 바닥보단 방석에 앉기를 좋아했다. "우리 벤지는 양반이라서 그래"라고 대견해했던 기억도 난다.

벤지가 짐으로 느껴진 적도 여러번 있었다. 이따금씩 벤지가 없는 삶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지의 빈자리는 너무도 컸다. 실성한 사람처럼 혼잣말로 "벤지야" 하고 불러본 것도 여러번, 하지만 그 대답을 들어줄 이는 이미 없었다.

사흘이 지나자 난 서서히 제정신을 차렸다. "그래, 현실을 인정하자. 벤지는 죽었어"
난 다시금 직장에 출근했고, 예전처럼 사람들을 만나 술을 마셨다. 밤늦게 집에 와서는 밀려오는 공허감에 눈물을 훔쳤지만, 날이 갈수록 그 강도는 약해졌다. 벤지는 그렇게 내게서 잊혀져 갔다.

열흘이 지났을 무렵, 출근을 하던 난 우리집 앞 맥주집에 개 한마리가 있는 것을 보았다. 마르치스, 벤지와 같은 종이었다. 벤지 생각이 나서 손을 흔드니 꼬리를 친다.
"벤지랑 참 닮았구나" 난 쓸쓸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뒤를 돌아보니 그 개가 슬픈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신문을 줏으러 밖에 나갔을 때, 그 개가 여전히 거기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주인이 없니?" 난 녀석에게 다가가 별 생각없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순간 난 온몸이 굳어졌다. 녀석의 눈 주위에 사마귀가 나 있었다. 벤지의 눈에도 사마귀가 있었다. 두번이나 수술을 해줬지만 자꾸 재발해 방치해 두지 않았던가. 자연스럽게 내 눈은 녀석의 등으로 향했다. 등에 있는 딱지를 발견했을 때, 난 공포에 질렸다. 슬픈 듯한 녀석의 눈은 내겐 악마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방문을 잠그고 두시간 동안이나 떨고 있었던 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날 난 출근을 하지 못했다. 꼭 참석해야 하는 회의가 있었음에도. 

다음날 아침, 난 옥상에 올라가 우리집 앞을 살폈다. 동아일보를 배달하는 아줌마가 눈에 띄었지만, 벤지는 없었다. 서둘러 옷을 챙겨입고 출근을 했다. 하지만 난 그날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난 우리 동네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술이나 한잔 하겠어?"
친구에게 그 얘기를 했지만 그는 역시나 날 믿지 않았다.
"벤지가 보고 싶으니까 헛것이 보였겠지"
"아냐, 정말이라니까. 내가 손으로 만지기까지 했어"
"마르치스가 어디 벤지 뿐이냐.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응?"
친구의 집은 우리집에서 좀더 걸어야 했기에, 난 그와 함께 우리집 쪽으로 향했다.

"저, 저기..."
벤지는 맥주집 앞에 앉아있었다. 특유의 그 슬픈 눈을 하고선. 살아있는 동안, 내가 출근할 때마다 벤지는 슬픈 눈동자를 내게 보였었다. 자기가 심심하니 빨리 들어오라는 암시라도 하듯이.
"어디? 난 아무것도 안보이는데?"
"저기 있잖아! 안보여?"
난 공포에 질려 달아나려 했지만, 친구는 내 손을 꽉 잡았다.
"민아, 제발 정신 좀 차려"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친구 말에 의하면 내가 실신해 버렸고, 그가 날 들쳐업고 우리집까지 왔다고 한다.

엄마의 권유에 따라 난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야 했다. 의사는 별 말없이 내 말을 듣고 있다가 약을 하나 지어줬다. "괜찮을까요" 어머니의 질문에 의사는 퉁명스럽게 그렇다고 했다.

사람들은 날보고 돌았다고 했다. 나 역시 내가 제정신인지 아닌지 헷갈리기만 했다. 다음날부터 난 맥주집 쪽을 아예 외면한 채 출근을 했다. 그러길 열흘. 이제는 없겠지, 하고 고개를 돌렸을 때, 난 하얀 개 한 마리가 슬픈 눈으로 날 보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가! 제발 내앞에 나타나지 마!"
내 말에 벤지는 힘없이 골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난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친구 집에서 밤새 술을 마셨다.
"왜 벤지가 니 앞에 나타난다고 생각해?"
"사실은..."
누구에게도 털어놓고 싶지 않았지만, 갑자기 그 친구에게라도 사실을 말하면 마음이 좀 가벼워질 것 같았다.
"벤지가 늙어죽은 게 아니야"
"그럼?"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내, 내가...."

그 며칠간 벤지는 많이 아파 보였다. 소파 위에서 자는 건 여전했지만, 내가 불러도 겨우 고개만 돌렸을 뿐, 몸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방안에다 대변을 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깨끗한 걸 좋아하는 녀석이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짐작이 갔다. 난 벤지를 들쳐업고 병원에 갔다. 의사는 주사를 한 대 맞고, 항생제를 먹어야 한다고 했다. 의사가 커다란 주사기에 약을 담을 때, 나도 모르게 이 말을 하고 말았다.
"그냥...안락사 시켜주면 안되요?"
의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십만원만 내면 그렇게 해주마고 했다. 의사는 다른 주사기를 꺼내 약을 담았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한걸까. 병원에 갈 때만 해도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벤지를 짐스럽게 생각했던 내 무의식이 방어막을 뚫고 밖으로 표출된 걸까. 

벤지가 청산가리가 든 주사를 맞는 광경을 차마 볼 수가 없었기에, 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고개를 돌리자 유리문을 통해 벤지가 보였다. 흰 털과 슬픈 듯한 눈이. 병원에 갈 때마다 몸을 떨며 무서워하던 벤지지만, 그날만큼은 누운 채 움직임이 없었다. 너무 힘이 들어서? 아니면 모든 걸 체념해서일까. 벤지와 나의 눈이 마주친 순간, 난 내가 정말 바보같은 결정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벤지는 죽었다....
내 요청에 따라 의사는 개 전문 장의사를 불러줬다. 난 그에게 십만원을 줬고, 벤지의 유골이 담긴 조그만 병을 받았다.

"그러니까 넌 벤지가 복수를 하기 위해서 니앞에 나타난다는 거니?"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다.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은데. 너 벤지한테 굉장히 잘해 줬잖아?"
그래서 더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잖아. 난 속으로 외쳤다.
"혹시 영매를 찾아가 보는 건 어때?"
영매? <사랑과 영혼>이란 영화에서 영매로 나온 우피 골드버그가 아카데미상을 탔지. 물론 난 영매를 믿지 않았다. 사람이 신과 소통을 한다는 걸 날더러 믿으라고? 하지만 난 진심으로 날 걱정해 주는 친구의 집요함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리고 영매를 통해서 내가 안정을 찾을 수만 있다면, 영매가 진짜건 가짜건 상관없는 일이었다. 친구는 내 손을 잡고 영매의 집으로 향했다. 이준영이라는 영매의 집으로.

네이버 검색을 보면 이준영에 대해 이렇게 나와있다.
[이준영씨(34)는 장충체육관 등지에서 29층 높이로 쌓아올린 작두를 사다리 타듯 맨발로 올라가 멋대로 춤을 추며 방언을 해대 지켜보는 이들을 경악으로 몰아넣어온 영매다.그는 자신이 모시는 신을 ‘할아버지’할머니’라고 칭한다.초등학생 때부터 병약했던 그는 청년이 됐지만 몸무게가 40㎏을 밑돌았다.신의 접근을 감지할 무렵 그는 서울 천호동 동서울시장 내 자택에서 잠을 자다가 꿈 속에서 얻어맞았다.그를 때린‘사람'은 김유신 장군이었다.‘빨리 나가거라.’

눈을 뜨니 집 안으로 불길이 들이닥치고 있었다.벌떡 일어나 한 걸음을 떼어놓았다고 느낀 순간 몸은 이미 10m쯤 날아가고 있었다.가스폭발로 시장 안 70여 점포가 전소된 상황에서 그는 그렇게 살아났다.귀신이 먼저 그에게 접근한 셈이다.귀신에게는 역시 공짜가 없었다.‘내가 너를 구했으니 너는 나를 받아들여야 한다.네 병을 고쳐주겠노라.’ 귀신의 첫번째 요구는 ‘작두를 탈 것’이었다.거부했다.“싫다.발바닥을 베이면 어떡하나.안 타련다.” 그러자 갑옷과 투구로 중무장한 장군 귀신들이 그를 에워쌌다.이어 몽둥이 찜질이 가해졌다.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난 그는 엉덩이에 시퍼런 멍이 든 것을 보고 무릎을 꿇었다.“원하는 대로 하겠다.”

그가 언제나 작두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때’가 오면 귀신들이 몰려들어 그의 눈 앞에서 작두날을 시퍼렇게 간다.종이가 잘릴 만큼 날이 서 있다.무서워서 뭉툭한 작두를 골라 타려 들면 당장 귀신들의 불호령이 떨어진다.그래서 눈 딱 감고 파리한 작두날 위에 체중을 실을 수밖에 없다.그리고 다음 일은 기억 못한다.“그 순간부터는 100% 할아버지들의 기운이 나를 제어하기 때문이다.” 귀신들이 자신의 양 겨드랑이를 부축한다는 것이다]

"개귀신이 붙었군!"이라고 하는 대신, 이준영은 내게 왜왔냐고 천연덕스럽게 물어와 내 친구를 실망시켰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 영매는 날더러 잠시 나가 있으라고 했다.
"거봐. 돌팔이잖아!"
한참이 지나자 영매는 날 다시 불렀다. 아까와는 목소리가 바뀌어 있었지만, 그런 트릭에 속을 내가 아니었다. 목소리 변조는 웬만한 사람이면 다 하는 거 아닌가.
"오늘밤 그 개를 만나면 한번 안아 줘"
나보다 나이도 어린 놈이 왜 반말이야. 영매면 다냐.
"네?"
"녀석이 죽을 때 작별인사를 못해서 니 앞에 나타나는 거야"
"그, 그래요?"
"복수하러 온 게 아니니 그렇게 알아"
영매의 집을 나서며 난 피식 웃었다. 그런 말은 나도 하겠다.

집앞 맥주집에는 과연 벤지가 앉아 있었다. 영매를 만난 뒤라서 그런지, 녀석이 예전처럼 공포스럽지 않았다. 난 벤지에게 다가갔다. 벤지가 꼬리를 쳤다.
"벤지야"
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곤 손을 뻗어 벤지를 품에 안았다. 벤지의 몸이 차가웠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벤지야. 보고싶었어"
벤지가 내 손등을 핥았다.
"녀석, 핥는 버릇은 여전하네"

얼마나 벤지를 안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벤지가 갑자기 몸을 움직였다. 난 벤지를 땅에다 내려놓았다. 벤지는 날 한번 보더니, 어두운 골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발짝을 걷던 벤지가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그전처럼 슬픈 눈은 아니었다. 난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벤지는 다시 골목 안으로 걷기 시작했다. 벤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난 골목 안으로 달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벤지를 볼 수 없을 것 같았기에.

하지만 벤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벤지야!"
난 몇 번이고 벤지를 불렀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콩나물 국밥을 파는 아주머니가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때 공중에 하얀 물체가 있는 게 보였다. 몇 번의 실패 끝에 잡은 것은 하얀 털 몇가닥이었다. 그게 벤지의 털인지 아닌지는 지금도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어떤가. 내가 그렇게 믿으면 되는거지.
'벤지가 하늘나라로 가면서 흘린 털'-그 털은 이런 글귀와 함께 내 책상에 보관되어 있다.

그 후로 난 벤지를 더 이상 보지 못했다. 집에 올 때마다 맥주집 근처를 살폈고, 벤지가 사라진 골목길을 바라봤지만, 벤지는 없었다. 이따금씩 벤지 생각이 났지만, 그 횟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벤지는 하늘나라에 무사히 갔을까. 나와 만날 날을 기다리면서 어디선가 방황하고 있을까.

엊그제, 동창회가 있었다. 2차를 갈 때 여자애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민아, 너 벤지 데리고 촛불시위 간 적 있지?"
영문을 몰라하는 내게 그녀가 설명을 했다. 자기가 모시는 교수가 있는데 그 교수가 개를 주제로 한 화보집을 냈다, 그런데 그 화보집에 내가 벤지를 안고 촛불을 든 모습이 있어서 굉장히 놀랐다는 것. 작년 12월, 여중생 죽음과 관련된 미군들이 무죄가 되자 거기 항의하는
촛불시위가 있었는데, 난 벤지를 안고 광화문에 간 적이 있다. "정의로운 벤지의 성격으로 볼 때,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그 역시 촛불을 들고 이 자리에 섰을 거야"
이게 내가 벤지를 데려간 이유였다.
난 그녀로부터 그 교수의 이름을 알아냈고, 다음날 교보에 들러 그 책을 샀다. 최미경 지음, <추백이와 따굴이가 함께 사는 세상>. 책 중간쯤에 벤지를 안은 내 사진이 있었다. 한손에 촛불을 든 채로. 사진 속의 벤지는 여전히 귀여웠지만, 내 눈에서 오래도록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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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7-15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때 심정이 좀 슬프다보니-벤지가 아팠거든요-소설이 슬퍼졌습니다. 님의 개소설을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