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내가 무능력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특별히 잘하는 게 없다. 강의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교수라면 반드시 해야 할 연구 면에서도 난 자타가 공인하는 바닥이다.
의사면허는 있지만 환자를 볼 능력도 없는데다, 지인들이 가끔씩 자문을 구할 때도 헛소리만
남발한다 (그래도 의학적 자문이 끊이지 않는 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그러니, 내가 학교에서
잘리기라도 한다면 다른 일자리를 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내 생각에 난, 좋은 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교수가 되었고, 교수라는 직위를 이용해 허구헌날 술만 퍼마시는 인간이다.
(그러고보니 내가 잘하는 게 딱 하나 있다. 연속해서 술마시기!).
나같은 사람이 다 그렇듯, 남들은 다 출중한 실력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었다. 며칠 전, 내 친구가 애를 낳았다. 어렵게 생긴 첫번째 아이인지라
친구 부부는 나름대로 신경을 썼는데, 친구가 다니는 산부인과에서는 그 아이가 '아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9개월쯤 지났을 때, 병원에서는 난데없이 "딸이에요"라고 하는거다.
"아니 어떻게 그런 걸 틀리지? 애기 옷도 다 사놨는데.."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게 말이야. 5주면 다 아는데..."
그런데 막상 애를 낳았을 때, 친구는 더더욱 놀랐다. 애는...아들이었다! 애기옷은 건졌지만,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친구의 황당함과는 별개로, 내게는 그런 실력으로 산부인과를 하고,
돈도 제법 번 의사의 존재가 위안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그런 사람이 한둘은 아닐 거다. 남들 보기엔 어엿한 회사에 다니고 그러지만,
회사에는 그다지 기여를 하지 못하는 나같은 사람이. 사실 출중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뭐 그리
많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하던 끝에, 난 새해부터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보기로 했다.
남들은 없는 능력을 짜가면서 열심히 사는데, 난 능력이 없다고 나자빠져서 허구헌 날
술만 마시는 건 너무하지 않는가. 연구, 새해에는 연구를 하자. 논문도 많이 쓰고 그래서
2년 후 있을 재임용도 통과해 버리자. 그러면 5년은 더 버틸 수 있고, 그런 식으로 계속
가다보면 55세 정도까지 버티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학교에 부임한지도 벌써 5년,
그간 놀만큼 놀았잖니?
때마침 학교에서는 갑자기 돈이 많아졌는지 기계 살 게 있으면 사라고 돈을 나눠준다.
얼마 전에도 돈을 주더니만, 두달도 안되서 무슨 일이람? 열심히 일하는 남들은 살건 많은데
돈이 적네 하지만, 연구와 담을 쌓고 줄곧 놀아온 난 그 돈으로 무슨 기계를 사야하나
심난하다. 어찌되었건 이것저것 사다보면 냉기만 감도는 내 실험실도 제법 그럴듯한
곳으로 변하겠지.
어제, 내가 군대 때 몸담았던, 아니 적만 두고 출근은 안했던 보건원에 다녀왔다. 새해부터
일을 같이 좀 해보자고. 그쪽에서는 늘 바라던 거였다고, 내가 놀기만 하는 게 안타까웠다면서
적극 환영한다. 그 얘기를 하면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 9시도 되기 전에 필름이 끊긴 게
부끄럽지만, 이제라도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뭔가를 해보련다. 이게 다 그 의사 덕이다.
* 택시 아저씨가 날 깨운다. 택시비를 달라고. 아까 준 것 같아서 "줬잖아요"라니까, 안줬다고
달란다. 그 아저씨의 말, "경남예식장에서 타셔서 홍대앞 가자고 했잖아요!" 잉? 이럴수가.
미터기를 보니 1600원이 찍혀있다. 그러니까 난 집앞까지 잘 가고선 다시 택시를 타고
엉뚱한 곳으로 온 거다. 집까지 걸어가는 십분이 술에 취한 사람에겐 무척이나 길고 멀었다.
날씨는 또 얼마나 춥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