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시열에 대해 내가 아는 건, 그의 호가 '우암'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추앙받는 학자이며 윤리 교과서에 나오는 좋은 말을 했다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난 모 잡지를 읽다가 다음 대목에서 가슴이 뜨끔했다.
[우리 역사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우암 송시열 하면 우선 그가 주장했다는 북벌론이 떠오르고, 다음으론 그 골치 아프고 복잡한 당파.당쟁이 떠오른다]
나름대로 국사가 전략과목이었다고 자부했지만, 송시열과 북벌론을 연결지어 생각해본 적은 한번도 없는데? 예전엔 알았는데, 세월이 지나서 잊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지금은 모른다. '역사에 깊은 지식이 없는' 사람도 아는 것을.
사실 난 상식 쪽으로는 그다지 아는 게 없다. 글을 워낙 많이 쓰니까 아는 게 많다고 착각을 하는 사람이 있지만, 글 많이 쓰는 건 내가 집요해서 그런 거지, 아는 거랑은 큰 상관이 없다. 초등학교 동창인 표진인도 날 과대평가한 사람의 하나인데, 그의 권유로 지금은 없어진 퀴즈 프로에 출연한 적이 있다. 15명 중 9명을 뽑고, 다시 3명을 뽑아 결선을 해서 이긴 사람은 500만원을 독식하는 형식이었는데, 세상에, 난 1라운드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물론 남들이 부저를 하도 빨리 눌러 난 말할 기회조차 잡지 못했지만, 내게 기회가 왔더라도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구상했던 곳이 갈라파고스 군도라는 것도, 그해 스포츠스타 중 상금액수가 1위인 사람이 미하엘 슈마허라는 것도, 그 밖의 다른 문제들도 난 별로 아는 게 없었다.
녹화가 끝난 뒤의 마음은 참담했지만, 내 상식의 현주소를 확인한 것은 값진 성과였다. 요즘들어 책을 많이 읽긴 해도, 서른 전에는 전혀 책을 가까이 하지 않은 터라 사막에 집을 짓는 격, 없던 상식이 갑자기 생길 리는 없었다. 그 뒤 난 겸허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데, 독서량과 상식이 비례한다면, 그리고 지금같은 추세로 계속 책을 읽는다면, 십년쯤 후에는 퀴즈프로에 한번 도전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시 그 잡지로 돌아가자면, 내가 읽은 글은 장정일이 쓴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라는 책의 리뷰인데, 그 글을 보면서 우리가 아는 지식이란 지배계층의 시각에서 본 편향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송시열은 효종 때 이름을 드날린 학자인데, 양반의 수탈이 문제가 되던 그 당시, 송시열은 토지를 많이 가진 사람이 세금을 더 내는 '대동법'을 맹렬히 반대한 양반 부호들 편에 섰으며, 효종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북벌론'을 반대하는 대신 자식이 죽을 때 부모가 상복을 얼마나 오래 입느냐를 놓고 벌어진 당쟁-일명 예송논쟁-에
힘을 쏟았으며, "자신의 논리에 반대하는 동료 유생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인 조선 최초의 유학자"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북벌론=송시열'의 등식이 성립되는 것은 그가 속한 서인정권이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정권을 잡음에 따라, 그리고 일제와 해방 이후에도 온존함에 따라서 그런 잘못된 신화가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역사 거꾸로 보기'식의 책이 수없이 나오는 와중에 특정한 책 한권을 보고 "아, 그건 그렇구나" 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지배계층의 시각에 따라 역사가 왜곡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 않는가? 책에 기술된 내용들이 그렇게 신뢰성이 없다면, 책만 달달 읽는다고 그게 온전한 지식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퀴즈 프로에서 "북벌론과 관계있는 학자는?"이란 문제가 나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