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가 걸려왔을 때, 난 시험감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부지런히 눈을 좌우로 돌리는 학생들을 감시하는 일을 잠시 뒤로 미루고 복도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저 송승헌(가명) 동생인데요..."
송승헌이라면 내가 고교 때 연대장을 했던, 그야말로 미모와 학식을 겸비한 친구다. 작년에 만났을 때 이미 대머리가 되어 있어 날 실망시킨 그 친구. 그의 동생이 왜 내게 전화를 했을까?
"저희 형이 형 얘기를 많이 하더라구요. 사실은 제가 프루덴셜에 다니는데요, 찾아뵙고 말씀을 좀 드리고 싶어서요"
아하, 그러니까 날더러 보험에 들어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군. 난 '지금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중이라 오래 통화는 못하며, 만나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이미 ING 보험에 가입했으니 큰 기대는 하지 말라'고 했고, 다음주 수요일 정도에 보기로 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어제, 그를 만났다. 아무리 거절을 못하는 나지만, 난 보험에 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리 비싸지 않은 부대찌게를 주문한 뒤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어, 라면사리와 만두, 쏘세지를 추가로 시켰다. 목소리도 비슷하고 외모도 형을 닮았지만, 형보다는 훨씬 못생겼다. 의례적인 덕담이 오갔다.
"형 TV에 나오신 거 다 봤구요, 형한테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이렇게 뵙다니 영광이네요"
영광은 무슨... 밤에 술집에 가면 늘 나를 볼 수 있는데. 난 이렇게 내 입장을 밝혔다. "내가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결혼 생각이 없어서 보험을 들 욕구가 없는데다, ING라는 걸 이미 든 상태라..."
하지만 밥 한그릇을 다 비우기도 전에, 난 그의 고객이 되어 버렸다. 만성활동성 간염이고, 이런저런 이유로 결혼도 못했다는 그의 딱한 처지 앞에서 "안된다"는 말을 하기엔 내가 너무 마음이 약했다.
"까짓것, ING 해약하고 하나 들죠 뭐"
20만원이 넘는 걸로 하라는 걸 10만원 선으로 깎은 것만도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결과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그는 계속 열변을 토했다.
"무슨무슨 보장을 해주고...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난 그의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보험이란 게 자신을 위해 드는 측면도 분명 있겠지만, 내가 보험을 들겠다고 한 건 순전 그를 위한 거였으니까. 그가 말하는 동안 난 머리속으로 이 생각만 했다. "ING를 어떻게 해약하지?"
ING를 들도록 만든 친구가 이미 그 회사를 그만둔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 영등포로 가는 도중 여친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그냥 보험 들었어"라고. 금방 답장이 왔다. "만난다고 했을 때부터 그럴 줄 알았어"
후후, 내가 보험에 들 걸 나만 몰랐지, 남들은 다 알고 있었나보다.
생각해 보면 거절을 했으면 좋았을 일들이 너무도 많다. 몇십만원짜리 토익아카데미, 이코노미스트 잡지, 주간한국, 내셔널 지오그라픽, 뉴스위크.... 그 중 본전을 뽑은 게 과연 얼마나 된담? 뉴스위크 같은 건 아예 비닐조차 뜯지 않고 버리지 않았던가. 이렇게 위안을 했다. "보험은 좀 다를거야"라고. 그나저나 거절은 어떻게 하는 걸까?